“잘 가…….”
휘이잉-
레나는 멀리 사라져가는 케실리온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깨진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레나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출렁이게 만들었다.
또르륵!
찰랑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물방울이 우유 빛 피부로 흘러내렸다. 때마침 떠오르는 금빛의 태양에 비춰 금색으로 빛을 뿜었지만, 그 어떤 빛보다 슬프게 보였다. 붉게 출혈된 눈과 퉁퉁 부어 있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숨죽여 울고 있는 레나의 모습은 한마디로 애처로웠다. 간간히 들썩이는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굳은살이 자리 잡고 있는 손이었지만 따뜻한 느낌의 손길이다.
“레이디 레나, 슬픔을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흑. 울고 싶지 않아.”
“슬플 때는 남자도, 여자도 우는 것입니다. 누구도 흉보지 않습니다.”
레일 단장은 애써 참고 있는 레나를 가엽게 쳐다보며 말했다. 깨진 창문을 통해 불러오는 바람이 주위 공기를 정화시켰지만 레나의 마음만큼은 정화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영주를 지키는 레일 단장의 마음도 정화시키지 못했다.
장렬하게 죽어간 그란 기사단을 떠올린 레일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마침, 레나의 울음이 커졌다. 간간히 들려오던 흐느낌은 거친 파도가 되어 레일의 품에서 크게 출렁였다.
“흑… 흐아앙.”
애달픈 눈물이었지만 시원한 울음소리였다. 마침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영주성을 비췄다. 멀리 사라져가는 케실리온의 당당한 등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레나와 케실리온은 애달픈 이별을 맞이했다. 큰 울음소리를 듣고 있던 레일 단장은 말없이 레나의 등을 토닥거렸다.
1시간… 2시간이 지났고 레나는 흐느낌에 지쳐 잠에 빠져들었다. 슬픔의 수마에 빠져든 레나의 모습은 그 어떤 때보다도 편안한 미소를 그리며 자고 있었다.
스멀스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레일은 갑작스럽게 몰아치기 시작한 음습한 기운에 레나를 구석 소파에 눕혔다. 그리곤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을 뽑아들며 주위를 경계했다. 강렬하게 전해지는 살기와 광기에 레일은 무의식적으로 검을 꽉 잡았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땀에 의해 검병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고오오오- 찌이익!
검은 기류 속에서 누군가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레나와 같은 보라색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다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과 끈적이는 살기, 광기에 절로 공포를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또한, 어깨와 가슴, 복부를 가리고 있는 야수형상의 갑옷은 공포를 자극했으며, 창백한 피부위에 자리 잡고 있는 입술이 눈을 흔들리게 했다. 그 어떤 모습보다도 섬뜩한 미소였다.
“빠르군. 언제까지 더러운 검을 쥐고 있을 거지?”
공간을 찢고 나타난 사내가 처음한 말이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과 창백한 피부에 어울리는 목소리다. 살기와 광기에 휩싸여 있는 눈빛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목소리가 레일의 마음을 동요케 했다.
“……약속은 지켰소. 이제 영주님을 풀어주시오.”
“하찮은 인간. 의심하는 건가? 풀어주지!”
척-
사내는 레일의 눈을 쳐다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정확히 레일의 옆에 있는 그란 영주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린 것이었지만, 레일은 움찔거리며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레버레이트(Liberate : 해방)!!]
고오오!
사내의 손에서 뻗어나간 어둠의 기운이 그란 영주의 몸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코와 입, 눈과 귀 등 모든 곳으로 흘러들어간 마기가 잠시 빛을 뿜어대더니 그란 영주를 일깨웠다. 몸을 비틀며 움찔거리던 그란 영주가 깨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크으으…….”
장시간 잠을 잔 것처럼 피부가 푸석푸석하던 그란 영주는 순간 젊어진 것처럼 윤기 있는 피부로 변했다. 그렇게 한참이지나자 그란 영주는 일말의 신음을 토해내며 눈을 번쩍 떴다.
“여, 여긴!?”
“영주님! 영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저 레일입니다.”
“레일……?”
레일은 놀란 표정으로 영주의 어깨를 잡았다.
“영주님! 저 레일입니다.”
“나의 기사……”
“예! 영주님 저 레일입니다. 주군의 검이자 방패인 레일입니다.”
주르륵!
레일은 진심으로 주군을 위한 충신이요. 기사였다. 그란이 깨어난 것에 감동해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쁨은 접어둬라. 인간…….”
“이제 돌아가. 네 녀석이 원하는 것을 얻었지 않느냐!”
“물론, 그전에 충고하나 해주지.”
화아악!
레일과 그란 영주를 쳐다보고 있던 사내는 돌연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보랏빛 눈동자를 부라렸다. 인간이 눈이 아니라는 듯이 좌우로 찢어진 눈동자였다. 마치, 고양이 눈처럼 안광을 터뜨리며 레일과 그란 영주를 위협했다.
“크윽- 마, 마족!?”
“이게 무슨 짓이냐! 그만! 영주님이 괴로워하신다. 그만하지 못할까!”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란 영주를 보며 레일이 급히 소리쳤다. 자칫 살기로 인해 그란 영주가 죽을 지도 몰랐다. 기사인 레일도 죽음의 공포를 맛보고 있건만, 검과 마법조차 익히지 않은 그란 영주가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다.
“닥쳐라. 하찮은 인간이여…… 난 너의 더러운 주둥이에 오르내릴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일은 그 누구에게 발설하지 마라. 다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크크큭”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던 사내는 그란 영주가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차갑고 냉혹하게 몰아치는 기세가 사라지자 진중한 충고가 튀어나왔다. 이건 충고가 아니고 협박이었다. 영지내의 모든 존재에게 알리는 충고!
“그럼 그만 사라지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다면…… 그 공포에서 해방될 것이다. 영원히. 크하하하!”
덥석!
사내는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는 레나의 볼을 툭 건드려보고는 옆구리에 끼며 말했다. 레나의 표정은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슬픔에 못 이겨 자고 있던 레나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공포, 절망의 표정이 떠올랐다. 자고 있었지만 주위 상황은 몸으로 느낀 모양이다.
“서쪽의 어둠으로…….”
찌이익-
사내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처음과 같이 어둠에 휩싸이며 공간을 찢고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고도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털석!
강렬한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자 기사단장 레일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과 이마,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추악하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휴- 끝인가? 응? 뭐, 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영주의 안위를 살피던 레일은 표정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기절해 있던 영주의 모습이 변해가고 있었다. 여드름이라도 날듯이 피부가 울퉁불퉁해졌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눈과 코, 귀, 입에서 검은색 연기를 내뿜는다.
“영주님! 그란 영주님!”
레일은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거칠게 영주의 몸을 흔들었다. 이것이 주군에 대한 불경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 불길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순간 레일의 몸놀림도 빨라졌다.
“영주님! 영주……”
“크아아악!”
“이, 이건 도대체… 무슨!?”
살기에 기절해 있던 영주는 눈을 부릅뜨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얼굴은 급격이 팽창했고 몸 또한, 불어나기 시작했다.
푸쉬이이이!
손을 뻗어 영주를 흔들던 레일은 급히 손을 회수했다. 눈, 코, 입, 귀 등에서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둠의 기운만 뿜어냈다면 모르겠지만 피와 벌레 같은 것이 귀에서 뿜어져 나왔다.
“뭐야 이건!”
꿈틀거리며 영주의 몸에서 기어 나오는 기분 나쁜 벌레들이 ‘키에에’라는 비명을 지르며 마기를 토해냈다. 그렇게 수십 차례 반복되었을 까? 돌연 그 벌레들이 그란 영주의 피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사각사각’거리며 살점을 뜯어 먹는 벌레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사각사각!
“날 속였구나! ……날 속였어. 마족 따위 믿는 게……”
사각사각!
“믿는 게 아니었어. 개자식!!!!”
끝도 없이 먹어치우는 벌레들이 모든 피부를 먹어치우는 순간 그란 영주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레일은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도리질 쳤다. 자신의 주군이 저런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더럽고, 추악하며,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모든 것이 그란 영주의 몸에서 나는 냄새다. 마기와 벌레들에 의해 농락당한 영주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살점을 갉아 먹던 벌레들은 들어가기 좋게 바뀌어 있는 그란 영주의 몸뚱이를 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키키키킥!
“키키키키……”
수십 마리 쯤 되어 보이는 벌레들은 내장과 심장, 간 등을 뚫고 들어갔다. 최종적으로 두개골을 파고들며 뇌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란 영주는 숨이 끊어졌다. 하지만, 그란 영주의 몸은 자유가 아니었다.
벌떡!
실이 풀린 인형처럼 그란 영주는 몸을 일으키며 레일을 붙잡았다. 그리고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던 몸은 더욱 팽팽하게 변해갔다.
찌이익-
그나마 남아 있던 근육과 내부 장기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흘러내렸던 내장들은 풍선처럼 팽창하는 영주의 몸에 의해 찌부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분의 시간이 흘렀을 까? 터질듯 부풀어 오르던 현상이 멈췄다.
쩌억!
“키키키키!”
붕어처럼 벌어진 입에서 벌레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영주의 몸은 검은 빛을 뿜어냈다.
펑- 구오오오, 쿠와아앙!
터질듯 말듯 한 몸은 기묘한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레일과 같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어둠의 기운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기운이었다. 영주성은 순식간에 어둠의 기운에 잠식되었고 소멸되어가기 시작했다.
대단한 위력이다. 마치, 9서클의 대단위 공격마법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란 영지는 순식간에 잿빛으로 휩싸이며 소멸되어갔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사라져갔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그란 영지를 없애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 어둠의 기운은 사라져갔다.
황량한 벌판으로 바뀌어버린 그란 영지의 터는 처음부터 그곳에 어떤 건물도, 생명체도 없었다는 듯이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블로우(Blow)
보라색 머리카락의 마족이 ‘그란 영주’의 몸에 심어놓은 자폭하는 키메라였다. 생명체의 몸에 기생하며 몸집을 키우는 소형 키메라로 일정한 키워드와 마기를 공급받으면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는 키메라였다.
생명체에게 커다란 고통을 선사하며 끝내 주위를 폭사시키는 키메라로써 마왕과 서쪽의 고위급 마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절정의 기술이다. 참고로 자폭의 키워드는 ‘해방’ 즉, 레버레이트(Liberate)로써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으로 자폭을 선사하는 기술이다.
폭발의 범위는 마기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지는 데, 마왕의 경우에는 일국의 반을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주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 볼때 대단한 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방금 전의 그 마족 역시 고위급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가볍게 주입한 마기로도 남부의 그란 영지를 순식간에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란 영지는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해 사라져갔다.
다크 레이디(Dark Lady), 레나 칼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