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41/269)

 척-

 남문으로 모여든 수많은 신자들이 케실리온을 둘러쌌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들로 인해 케실리온은 당혹스러움보다도 짜증이 치솟았다. 언제 이렇게 모인 것인지 의문마저 들었다. 옆에 있던 프린이 케실리온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아무래도 환영식 같은데? 저들의 행동을 보니…….”

 “…….”

 케실리온은 아무 말 없이 앞을 쳐다봤다. 모든 사람들이 집결하자 그들을 대표해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은빛의 갑옷과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는 자였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은색의 롱소드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크루세이더(Crusader)의 단장, 앤더슨이 위대한 영웅을 뵈옵니다.”

 앤더슨은 크루세이더의 단장이다. 과거 실버 울프와 같이 용병으로써 의뢰를 할 당시 같이 동행했던 자였다.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이름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케실리온이다. 그가 앞으로 나섰으니 케실리온은 그의 모습을 지켜만 봤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외에 찬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앤더슨을 시작으로 신성도시의 모든 존재들이 케실리온을 향해 경배하기 시작했다. 모두 감동과 경외에 찬 표정이다.

 “내가 왜 영웅이지?”

 “악을 대표하는 마왕을 퇴치하셨으니 응당 영웅이라 칭해야 합니다.”

 “난 나를 위해 움직였을 뿐.”

 케실리온의 말에 다시 한 번 감동했다는 표정을 짓는 앤더슨은 무릎을 펴며 다시 말했다.

 “마왕을 격퇴시킨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 겸손함에 감탄했습니다. 응당 누군가에게 뽐내도, 자랑해도 되건만. 은빛의 추기경께서는 겸손하십니다.”

 앤더슨의 말에 얼굴을 살짝 구긴 케실리온은 주위에서 몰아치는 감동의 물결을 보며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앤더슨이 옆으로 물러섰고 다른 기사로 보이는 자가 케실리온의 앞에 섰다.

 “제 4 신성기사단의 단장 마티스가 영웅을 뵈옵니다.”

 “난 너희들의 인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닌, 성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케실리온은 더 이상의 인사치례를 받지 않기 위해 딱 잘라 말했다. 모든 존재들이 약간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케실리온은 마왕을 퇴치한 위대한 영웅이다.

 “시답잖은 환영은 집어치워라. 나의 행보를 막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겠다.”

 “……하하, 저희들이 너무 추기경을 잡았나 봅니다.”

 케실리온의 말에 앤더슨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만큼 케실리온의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이다. 살기만 싣지 않아다 뿐이지 압도적인 기운을 흘리며 경고한 것이다. 

 “그럼 저희 제 4 신성기사단이 에스코트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해주십시오!”

 케실리온을 향해 또박또박 말하는 제 4 기사단의 단장, 마티스가 말했다. 그의 말을 선창삼아 외치는 수많은 신자들이 강렬한 시선으로 케실리온을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의 케실리온은 마티스라는 자의 얼굴을 꼬나봤다.

 “케실리온,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역사책을 뒤져봐도 신전 기사들이 먼저 에스코트를 신청한 적은 없어.”

 프린의 신중한 말에 케실리온은 살짝 끄덕이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언의 승낙에 제 4 기사단의 단원들은 주위를 호위하듯 거탑인 아케인으로 향했다. 말이 에스코트였지 수많은 행렬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간간히 비치는 신성도시의 주민들이 미리 준비된 꽃가루를 허공에 뿌리며 케실리온의 도착을 축복했다. 그만큼 한 달이라는 기다림은 길었다. 선망에 찬 아이들의 모습과 뒤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은 일대 황제의 걸음만큼이나 위대해 보였다.

 10분도 되지 않아 신성도시의 전역에 추기경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즉시 아케인으로 모여드는 자들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위대한 영웅이자, 12 추기경을 보기 위한 인파들이었다.

 “위대한 영웅이자, 12 추기경인 퍼니쉬 경께서 도착했습니다!!”

 4 기사단 소속 단장 마티스가 아케인의 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곧 아케인에 속해 있는 프리스트들이 조용히 문을 열며 케실리온을 맞이했으며, 조금 뒤, 성녀로 보이는 소녀가 나타났다. 어떤 존재에게나 사랑받으며 성스러운 자, 위대한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순례(1) - 준비

  

 “기다렸습니다. 퍼니쉬경”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성녀의 은발이 흩날렸다. 가지런히 모여 있던 두 손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마치, 케실리온의 볼을 쓰다듬듯 허공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저었다.

 스르륵-

 성녀의 몸에서 은빛의 기운이 뿜어졌다. 너무 찬란해 눈을 뗄 수없는 빛이었다. 만물을 포용하는 대지의 품이 이러할까? 성녀의 모습은 어떤 존재보다도 따뜻했고, 자애로웠다. 신성력에 의해 찰랑이는 은발 사이로 케실리온의 얼굴로 꽉찬 은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살짝 웃는 것 같은 눈매가 탐스러웠다. 금방 흘러내릴 듯 걸려 있는 눈망울로 인해 지켜야 하며, 보호 받아야 할 존재로 각인된 성녀가 케실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자… 이리로.”

 케실리온은 자신에게 향한 손길을 봤다.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반듯이 잡아야할 손으로 보였다. 주위의 분위기 역시 성녀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찬란한 빛 속에서 뻗어진 손길에 케실리온은 자연히 손을 뻗었다.

 멈칫-

 성녀의 손에 닿기 직전 케실리온은 멈칫거리며 손을 뒤로 뺐다. 케실리온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흘린 성녀 역시 손을 회수했다.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위의 신도들은 짧은 탄성을 자아내야 했다. 성녀의 손길을 거부한 추기경이 야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난 누구의 구원도, 도움도 필요 없는 존재다. 다시는 나에게 그런 미소와 손을 뻗지 말라.”

 성녀에게 다가선 케실리온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행동에 성녀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흘리며 주위에 포진해 있는 신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의 행동에 신도들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일말의 소음도, 기척도 내지 않았다.

 꼴깍-

 다만, 여기저기서 성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간장을 녹이고 있는 여행자들의 추태가 있을 뿐이다.

 “드디어 신탁을 위해 본 교단이 움직이게 됐습니다. 바로, 처단의 퍼니쉬. 즉, 12 추기경을 중심으로 신성순례를 돌 것입니다.”

 성녀의 조막만한 입술을 통해 나온 말치고는 엄숙했다. 거기다 말의 내용 속에는 엄청난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바로, 신성순례가 주된 내용이다.

 신성순례는 서대륙의 영지를 돌며 교단이 모시는 신, 즉 ‘성 카르디스 지저스’를 찬양하는 내용을 설파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며, 병자와 굶주림에 지친 지저스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지저스의 아이 = 피조물, 인간)

 또한, 신성순례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악한 기운을 품은 물건이나, 존재를 처단하는 것으로 신성순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성녀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은 교단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

 “병들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대륙의 자매, 형제님들을 위해…… 어딘가에서 이단행위를 하고 있는 이단들을 막기 위해! 본 성녀와 12 추기경이 움직일 것입니다.”

 성녀의 말에 신도들은 감동과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케실리온에게는 어이없음과 망상에 젖어 있는 존재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시온과 알파 역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프린 만은 제외였다.

 프린은 마치, 역사적인 순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며 성녀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책의 빈 여백에 성녀가 하는 말을 꼼꼼히 적고 있었다. 요즘 들어 그런 행동이 잦아지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과연 성녀님이시다.”

 “지저스교 만세! 신성순례 만세!”

 여기저기서 성녀와 교단을 찬양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엄청난 소리였다. 아케인 광장에 모인 존재들만 해도 최소 육백 명을 되어 보일 법했다. 아직도 몰려들고 있는 신성도시의 존재들이 광장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흰색의 예복을 입고 흰색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우우우웅!

 성녀의 옆에 있던 하이 프리스트 하이덴이 조용히 손을 올려 허공을 향해 신성력을 쏘아 올렸다. 프리스트의 신성마법인 ‘홀리 엠블럼(Holy Emblem)'이었다.

 쏴아아!

 쏘아올린 신성력의 중심을 기점으로 해 십자가(†)의 문양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상징, 홀리 엠블럼이다. 이 신성마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신성력의 분포도가 증가할 것이다. 흑마법과 마왕이 펼치는 기술 중에도 마기의 분포도를 높이는 것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성력에도 이런 기능이 있는 것이다.

 홀리 엠블럼은 성스럽게도 신성력의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찬란하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만족감, 몸 안에 가득 차오르는 따스한 기운에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 모습에 하이덴은 조용히 성녀에게 눈짓을 했다.

 “지저스교의 위대함과 자비로움을 동대륙에까지 널리 설파하겠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에게는 자비와 축복이, 진리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신성한 철퇴가 있을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성녀님 만세!!”

 성녀의 말에 모든 존재들은 커다란 함성을 토해내며 찬양하기 바빴다. 서대륙에 있어서는 지저스야 말로 유일신이며 육신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성수와 같았다. 성녀의 말은 동대륙을 향한 선전포고와도 같을 것이다.

 요즘 불안하게 돌아가는 서대륙의 중심이 란델 제국으로 향하고 있다. 란델 제국의 국경선과 테라스 제국의 국경선으로 집결되어가고 있는 군대를 보며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대륙의 이단을 처리할 절호의 기회였기에 지저스교로써는 란델 제국을 지지해야 했다.

 그렇기에 케실리온을 대동하여 란델 제국의 수도, 미스텔을 향해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다. 물론, 신성순례에는 사절단의 임무도 포함되어 있다.

 “성종(聖鐘 : 성스러운 종)을 울려라!!!”

 디바인 내추럴에 있는 4개의 종이었다. 동서남북에 있는 종들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성녀와 추기경을 위해 울리는 종소리다.

 땡- 땡-

 두 개로 겹쳐진 종이 끝도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에 8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동서남북에서 메아리가 치듯 성스럽게 울려 퍼졌다. 그에 맞추어 프리스트 들의 신성력이 허공에 뿌려지며 일대에는 일종의 축복지대로 변해갔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은빛의 신성력에 케실리온은 얼굴을 구겼고, 알파는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시온은 처음 보는 신성력에 도취되어 있었다. 다만 내공의 상성이 맞지 않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안으로 드시죠. 중요한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끄덕-

 케실리온은 빨리 지긋지긋한 신성력에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끄덕이며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온과 알파, 프린에게 손짓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함성소리 때문에 전음을 이용해 원하는 내용을 전한 케실리온은 성녀를 따라 계단을 오리기 시작했다.

신성순례(1) - 준비

    

 여러 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가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계단의 축이 되는 원주(圓柱) 모양의 크레프스(Krebs)에서는 신성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계단을 움직이게 하는 미지의 힘이다.

 단지 이동속도가 느리다 뿐이지 대단한 건물이었다. 탑을 빼곡하게 채우는 조각들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이 주신 지저스를 기리는 조각들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쳐다보며 27층 정도까지 올라가자 성녀가 걸음을 멈췄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실 테니 회의는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

 싱긋

 “27층은 손님과 추기경을 위한 층입니다. 피로를 푸시기에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성녀는 싱긋한 웃음을 띠며 케실리온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다만, 오랜 여행으로 많은 먼지가 쌓여 있는 의복이 위용을 가릴 뿐이었다. 130cm의 육신을 가릴 정도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은 먼지에 가려져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이덴, 추기경과 손님을 안내해드리세요.”

 “예.”

 하이덴이라는 프리스트가 살짝 머리를 숙이며 케실리온과 일행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계단에서 내려 통로로 들어가자 몇 개의 방이 나타났다. 각 층마다 4개의 구멍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 탑의 내부는 엄청난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공간인 셈이다.

 케실리온이 들어간 구멍안의 방은 총 15개로 엄청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었다. 아마, 각국의 사절단을 위해 생겨난 장소일 것이다. 또한, 각층에는 고위급의 프리스트와 견습 프리스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각 방에는 샤워시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여벌의 옷이 없다면 의복을 드리겠습니다.”

 하이덴은 성녀의 지시에 케실리온과 그 일행들에게 방을 안내했다. 성녀의 방만큼이나 수수한 방이었지만 하루 밤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장소였다. 케실리온도 딱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다.

 “그럼, 추기경과 일행 분들의 의복은 견습 신관에게 일러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이덴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일행들은 모두 샤워시설을 먼저 이용했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기에 답답한 모양이다. 특히 여자들이라는 점으로 볼 때 불만을 토로 할만 했지만 모두 군말 없이 참아줬던 것이다.

 “그럼 나도…….”

 케실리온은 일행들이 모두 들어간 것을 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은제로 장식된 문의 손잡이를 살짝 비틀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2계의 주신 지저스로 보이는 조각상이 하나 있었고, 방의 곳곳에는 손님들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는 시설들이 즐비했다.

 샤워시설과 화장실, 디바인 내추럴의 정경을 볼 수 있는 창문과 작은 탁자와 의자, 침대, 옷장까지 웬만한 귀족가에 있을 법한 그림들까지 있었다. 아마, 각국에서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서쪽 대륙은 유일하게 지저스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

 “…….”

 “케실리온님. 알파입니다.”

 샤워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문밖에서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실리온은 멀리 떨어져 있는 손잡이를 보며 기운을 퍼뜨려 손잡이를 돌렸다. 허공섭물을 응용한 수법이었다. 이것은 케실리온이 내공이 극에 달해 있다는 증거였으며 내가수법의 응용력과 컨트롤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고 알파가 신전 측에서 보내준 옷으로 보이는 것을 들고 들어왔다. 아직 씻지 않았던 모양인지 먼지가 쌓여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의복을 가져왔습니다.”

 “고맙군.”

 케실리온의 무심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에 대화가 일찍 끊겼다. 너무 무뚝뚝한 행동이었지만 알파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시중? 시중이라면 시온에게 가 보거라.”

 “아- 전 케실리온님의 시중을…….”

 케실리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알파를 쳐다보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의 행동에 알파는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하고 싶다면…….”

 케실리온의 간결한 말에 알파는 살짝 미소를 띠우고 발 빠르게 케실리온이 들어간 샤워실로 들어갔다. 이미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귀족가라면 어느 곳에나 있는 시설이었다.

 마법사가 발명한 것으로 ‘샤워’라고 외치면 물이 쏟아졌기에 물은 금방 차올랐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를 보던 케실리온이 먼저 물속에 들어갔다. 

 샤워실에는 마법사가 발명했다고 하던 ‘비누’라는 아티팩트와 부드러운 천이 걸려 있었다. 실드 마법으로 방수 처리된 칸막이 안에는 가지런히 놓여 있는 깨끗한 천이 있었다. 아마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기 위해 놓아둔 것 같았다.

 “제가 등 밀어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케실리온의 뒤에 자리를 잡은 알파가 천으로 비누라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거품을 만들어냈다. 향기로운 허브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등으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알파의 손길에 케실리온은 약간 움츠려들었다.

 정신적으로는 아니었지만, 몸은 소년이었다. 약간의 자극으로도 흥분하는 몸인 것이다. 뒤에서 느껴지는 허브향이 느껴지는 숨결이 귀에서 느껴졌다. 알파의 손길에 몸을 맞긴 케실리온은 눈을 살짝 감았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물과 부드러운 손길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지만 케실리온은 편안하다는 듯이 몸속으로 퍼지는 뜨거운 기운에 순응했다. 언제나 차갑게 느껴지던 심장이 오늘따라 뜨겁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자주 시중을 들었는데…….”

 “그런가?”

 알파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알파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들려왔다. 등에서 느껴지던 손길이 옆구리로 이동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케실리온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쏴아아- 똑!

 끝내 쏟아지던 마법진의 물줄기는 일말의 기운을 토해내고는 약간의 물줄기를 끝으로 멈춰버렸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옆구리로 이동해 있던 알파의 손이 케실리온의 어깨로 올라갔다.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싼 알파는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안마를 했다.

 “지금…… 날 유혹하는 것이냐!?”

 케실리온의 목소리에 알파는 멈칫 거렸다. 확실히 케실리온에게 뱀파이어 특유의 기운을 흘렸다. 여성 뱀파이어에게 주어지는 능력, 바로 유혹이라는 기술을 펼쳤던 것이다. 감미롭게 느껴지던 목소리도, 몸을 자극하던 것도 알파의 능력이다.

 뱀파이어가 가지는 능력, 유혹은 모든 뱀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유혹해 피를 빨기 위한 수법이다. 케실리온은 그것을 은연중 느꼈다.

 “나의 피를 먹고 싶은가? 그런 건가?”

 “아닙니다. 그저…….”

 케실리온의 목소리에 알파는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푹 숙였다.

 “수하를 관리하지 못 한 것은 나의 잘못이군. 네가 뱀파이어였다는 것을 망각했다.”

 “케실리온님. 전 그저 순수하게…….”

 “변명은 필요 없다. 나의 부덕함으로 네 욕망을 깨닫지 못했을 뿐.”

 “케실리온님!”

 케실리온은 욕조에서 일어났다. 뿌옇게 흐려진 샤워실에는 알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연중 느껴지는 한기와 살기에 알파는 움찔 거려야했다. 잠시 후, 케실리온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섀도우 웨폰(Shadow Weapon)”

 알파에게 회수해 그림자 공간에 넣어 두었던 마령검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발하는 순간 알파는 눈을 꼭 감았다.

 스악-

 순간 느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알파의 얼굴에 끈적이고 향기로운 액체가 튀었다. 그것이 피라는 것을 잘 아는 알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보다 마음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순간 알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 피가 그렇게 달콤하더냐!”

 주르륵!

 케실리온의 팔에서 피분수가 쳤다. 차가운 기운을 품었지만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발과 은안에 비친 붉은 피가 알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저, 전…… 피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피를 원한 것이…….”

 “…….”

 알파의 흐느낌과 붉게 흘러내리는 피를 보던 케실리온은 뭔가 착각했다는 것을 은연중 느꼈다. 요즘 들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케실리온이다. 끝내 마신(魔神)의 길이 열리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던 케실리온이다.

 괜히 알파에게 화풀이 했다는 생각과 막혀 있는 경지의 한스러움에 떨어지지 않는 목소리를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지혈해다오.”

 알파는 케실리온의 목소리에 놀라며 얼른 케실리온의 상처에 입을 가져다댔다. 뱀파이어에게는 유혹을 제외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 피를 지혈시키는 능력, 뱀파이어의 침에는 특수한 기능이 있었기에 흡혈당한 자는 과다출혈로 죽을 염려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지혈을 억제하는 능력도 있었기에 뱀파이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할짝- 꿀꺽.

 알파는 상처에 혀를 가져다 대며 핥고 있었다. 깊게 벤 상처가 아니었기에 금방 아물 것이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검은 마검이었기에 자체적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혈은 필수였다. 간간히 흘러내리는 피를 삼키는 알파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아까 일은 잊어라.”

 케실리온은 지혈이 다됐다는 것을 느낀 순간 샤워실을 벗어났다. 수면에 가려졌던 육체는 천으로 가려졌다. 뒤늦게 떠나가는 케실리온을 보며 슬픈 눈을 하고 있던 알파는 머리를 푹 숙였다.

 ‘전 케실리온님을…….’

 알파는 끝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마 평생 꺼내지 못할 지도 모를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지난 번 에리스의 던전에서 느꼈던 두근거림의 감정을 확실하게 정의한 알파였다.

 무뚝뚝하지만, 스스로를 믿고 수하와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자비로운 그, 겉으로는 무정하지만 정에 이끌리는 존재, 너무 강해 올려다보지 못할 존재를 사랑하는 알파는 천천히 마른 천을 몸에 두르고는 샤워실에서 벗어났다.

신성순례(1) -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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