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순례(2) - 무법자의 도시
봄의 청취가 물씬 풍기는 절정의 계절이 되었다. 케실리온은 27층에 마련된 방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옆에 놓여 있는 갑옷을 집어 들었다. 처음 보는 형식의 갑옷이었다. 어깨와 가슴을 살짝 가리는 장식품처럼 보이는 갑옷이다.
스르륵-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케실리온은 갑옷과 함께 딸려온 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검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의복이다. 이 모든 것이 미스릴로 이루어진 옷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신축성이 강한 초커(chocker : 목에 하는 장식)를 들어 목에 차기 시작했다. 검은색 바탕에 역 십자가가 인상적인 천이었다. 케실리온을 상징하는 검은색 초커를 착용하자 목에서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흰색인지 은색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천 옷이었다. 이것 역시 신전에서 준비한 미스릴제 옷이었다. 전신을 가리는 옷이었다. 딱 달라 붙는 것이 문제였지만 특별히 불편함은 없었다.
옆구리 부분에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져 마음에 드는 옷이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그것을 입고는 침대 위에 나뒹구는 갑옷을 집어 올렸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갑옷이었다. 공기처럼 일체의 무게감이 없었으며, 불편함이 없게 제작된 갑옷이었다.
어깨와 가슴을 살짝 가리는 갑옷이었다. 그리고 망토를 달수 있도록 제작된 갑옷인 만큼 등 뒤로 퍼진 양날의 어깨선이 살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허리와 무릎을 가리는 보호대를 착용하자 모든 것이 준비됐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고 나자 모든 것이 완료됐다.
은빛의 추기경이라는 위명답게 모든 것이 은빛으로 이루어진 갑옷이었다. 아직 망토는 달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멋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망토를 착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케실리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현신!”
고오오오!
마치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풀듯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등 뒤로 튀어나온 갑옷의 뒤에 검은색 망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망토 뒤에 수 놓여 있는 드래곤의 모습이 포효하는 것 같았다.
똑똑!
“케실리온님, 신성순례가 준비됐습니다.”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출발인 것 같았다. 시온들도 다 준비 한 것인지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기운의 파장에 놀랄 법도 하건만 모두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케실리온이 기운을 컨트롤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방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기운을 잡고 있었기에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었다. 방을 둘러보던 케실리온은 천천히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신발이 약간의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청명하게 울리는 것이 듣기에는 좋았다. 무식하게 만들어진 기사들의 갑옷과는 다르게 확실히 움직임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무게감도 없거니와 검을 휘두르기 위해 움직이는 팔의 동선도 일정했다.
“와! 이게 그 갑옷이야?”
문밖으로 나온 케실리온을 보며 감탄하는 시온이 보였다. 알파도 약간 놀랍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기에 얼마나 이 갑옷이 케실리온에게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 갑옷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케실리온은 성녀가 가다리고 있을 아케인 광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켄인 광장에는 많은 수의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신성순례라는 타이틀답게 모두 성녀의 축복을 받기 위해 나온 자들이다. 거기다 몇 백 년에 한번 있을 까 말까한 신성순례였기에 모두 기대하는 눈치였다.
은빛의 갑옷을 걸친 케실리온이 나오자 성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교황과 성녀, 그리고 케실리온이 모두 모이자 신성순례의 출발을 알리는 성종(聖鐘)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동서남북으로 퍼지는 거대하고도 성스러운 소리에 성녀는 신성력을 뿜으며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에게 축복을 내리기 시작했다.
“성 카르디스의 이름아래 그대들에게 축복이…….”
“와아아아!”
성녀의 외침에 많은 신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후, 성녀를 중심으로 크루세이더와 프리스트가 모였고, 몇 몇의 신성기사들이 도열하기 시작했다. 이제 신성순례가 시작될 것이다. 교황은 흰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하며 웃고 있었다.
“허허허,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교황이 대표로 신성순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감미롭고 따스한 신성력이 감싸자 모두들 감동어린 눈빛으로 교황을 쳐다봤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교황이 다시 앞으로 나서며 광장에 모여든 신자들과 신성순례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랜 침묵 속에서 대륙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본 교단이 성 카르디스의 이름으로 움직일 것이오. 더불어 그동안 신탁을 이행하게 될 것이오. 성녀와 12 추기경이 움직이며 만민의 백성을 돌볼 것이며, 대륙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오.”
교황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을 했다. 사실상 교단은 성전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아마, 신탁을 위해서는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케실리온은 따분하게 말하고 있는 교황이 못마땅했지만 짧게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만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성녀는 교단의 모든 것이 될 것이오. 또한, 12 추기경은 칭호와 같이 이단을 처단(處斷)할 것이오. 성녀는 추기경의 등불이 될 것이고, 추기경은 성녀의 검이 될 것이오. 부디 그대들이 잘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오.”
교황의 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 성종이 끝도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녀와 케실리온들은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오르며 신성순례의 시작을 알렸다.
신성순례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성녀 직속 하이 프리스트 하이덴과 성기사 10명, 크루세이더 1명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인원이다. 하지만, 그들의 위상은 더없이 높았다. 교단을 위해 움직이며, 신탁을 이행하는 영웅적 파티가 된 것이다.
휘히히힝!
10명의 성기사와 1명의 크루세이더가 말에 올랐고, 하이 프리스트 하이덴은 성녀와 같은 마차에 올랐다. 가장 선두에 선 크루세이더가 소리 높여 출발을 알렸다.
“출발!!!”
크루세이더는 익히 알고 있는 앤더슨이었다. 크루세이더들의 단장이었기에 대표로 나선 것이다. 마차를 호위하듯 움직이는 성기사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천천히 신성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나는 내내 꽃이 뿌려졌고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조금이라도 성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자들로 거리를 많은 인파의 물결이 몰아쳤다. 가끔 손을 흔드는 성녀는 미소로 모든 존재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신성순례가 시작되었다.
신성순례(2) - 무법자의 도시
신성도시에서 벗어난 케실리온과 성녀 일행들은 첫 번째로 작은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속의 마을답게 조잡하게 만들어진 목책과 도시의 빈민가라고 믿을 정도의 더러운 판자 집이 지천에 널려 있는 마을이었다.
제국선상에서 이름도 없는 마을이었다. 바로, 케실리온이 태어난 곳이자, 노예로 팔려간 마을이었다. 목책사이로 비치는 비릿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지만 6개월 이곳을 지나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케실리온과 레나, 프린이 처음 이곳에서 동행을 하기 시작한 곳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곳은 낡을 대로 낡아 판자가 부스러진 곳도 곳곳에 보였다. 저 멀리 허름한 집이 눈에 들어오자 케실리온은 찹찹한 눈빛으로 그곳을 쳐다봤다.
“죽은 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군요.”
성녀의 말에 케실리온은 대꾸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던 시절의 향수가 배어나오는 눈빛이다. 처음으로 따뜻한 가족을 느껴본 곳이기도 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두 모자가 지내던 곳이지…….”
“모자?”
케실리온의 짧은 말에 성녀가 반문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실리온을 대신해 알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케실리온님께서 자란 곳입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이 살던 곳이었죠.”
알파의 말에 마차를 타고 있던 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케실리온을 쳐다봤다. 모두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약간 망설이던 케실리온의 집요한 눈빛을 하며 쳐다보는 시온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모자란 듯 모자라지 않은 듯, 나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 하지만, 나의 분노를 키워낸 곳.”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잔잔히 떨려왔다. 잊을 수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 어머니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일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복수를 했기에 미련은 없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다.
“내가 노예로 잡혀가게 된 장소다.”
“…….”
케실리온의 말에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었다. 노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천시 받으며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노예다. 노예는 재산과 가죽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
잠시 가라앉은 분위기에 성녀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케실리온에게 물었다.
“아직도 노예가 성행하나요?”
“훗, 아직도?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는 것이 노예거래다. 약자는 강자에게 순응하듯. 없어지지 않는 것이 노예다.”
“그걸 바로 잡는 것이 신성순례의 일입니다.”
케실리온의 비아냥거리는 듯 한 말에 성녀가 발끈 하며 신성순례를 들먹였다.
“란델 제국의 서부에서는 대 놓고 거래하는 것이 노예, 이곳으로부터 일주일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거래되지.”
케실리온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아졌다. 평소는 입을 굳게 다물며 머리만 까딱이던 것이 지금은 흥미 있는 일에 동참하듯 성녀의 행동에 동조하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만큼 이 마을이 파괴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좋아요! 다음 목적지는 그 도시로 정했어요. 어차피 제국의 수도로 가기 위해서는 한번쯤 지나가야 할 길이니……. 아마, 그곳은 카르멘 공작령이겠지요?”
성녀의 말에 케실리온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란델 제국의 지리 따위는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프린이 눈을 빛내며 성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카르멘 공작령에 속해 있지만, 워낙 서쪽에 치우쳐 있고, 무법자와 노예상인들이 만든 도시입니다. 가끔 귀족들도 노예거래를 위해 줄 곳 찾는 곳이죠. 그곳은 공작령이되 힘이 미치지 않는 무법자의 도시.”
프린의 설명에 성녀는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하이 프리스트 하이덴에게 명령하듯 지시를 내렸다.
“그곳으로 정하세요. 첫 번째 순례지는 무법자의 도시로 정하겠어요.”
“예, 지혜로우신 판단입니다. 어둠에 물들어 있는 무법자의 도시를 개화시킨다면 교단의 위상이 높아질 것입니다.”
성녀의 의지가 전해진 순간, 신성순례에 동참한 모든 인원은 무법자의 도시로 향했다. 첫 번째 신성순례가 더럽고, 추악한 무법자의 도시로 정해졌다는 것이 본 교단에 알려진 순간 소문은 빠르게 란델 제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만큼 신성순례에 대한 행보는 대륙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성순례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주신, 성 카르디스 지저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신성순례를 하는 자들의 말은 곧 진실이요. 진리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교단에서 전해지는 최초의 신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과거 지저스교를 탄압하며 이단으로 취급하던 시절에 화자 되던 이야기다. 이것이 진실 일까? 거짓일까? 아니면,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자는 정상인 일까? 아니면 정신병자 일까? 이 이야기는 진실로 취부 되며, 진리로 통하는 이야기다.
「동생도 없는 독자(獨子)가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고 종교를 탄압하던 대륙의 기사들에게 죽을 줄 알면서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않고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이르러서도 스스로를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혹은 정상인 일까? 정신병자일까?」
「시집도 안간 처녀가 언제 부터인가 배가 불러와 임신하고는 지저스의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혹은 정상인 일까? 정신병자일까?」
「자기가 지저스의 아들이라고 믿고 죽은 자를 살리려 한다면 그는 정상일까? 정신병자일까?」
「지저스에게 기도하며, 신탁을 내려 줄 것이라며 빵 5개와 스프를 가지고서 배고프고 헐벗은 존재들을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늘을 향해, 신을 향해 기도를 시작한 남자는 정상인 일까? 정신병자일까?」
이것은 교단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교단에 속해 있는 모든 자들은 이것은 진실로 믿으며 진리라고 믿고 있다. 이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신의 철퇴를, 독실하게 믿는 자에게는 빵과 스프를 베푸는 것이 교단이다.
교단의 뜻이 진실이요. 진리다. 그렇기에 교단은 곧 법이며 대륙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성녀의 한마디에 100만이 넘는 서대륙 인들은 죽을 수도, 살수도 있는 것이 교단의 힘이며, 서 대륙의 국가가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화(改化)를 거부하는 자는 신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빠르게 무법자의 도시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성녀의 잔잔한 목소리가 바람 흩날리며 울러 퍼졌다. 그녀의 말은 진실이요. 진리가 될 것이다. 이것이 교단의 진면목이며 무서움이다.
무법자의 도시에서 노예를 거래하고 있는 자들은 알고 있을 까? 손짓 한 번에 100만이 넘는 신자를 움직일 수 있는 성녀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