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 힘들다.
경지의 상승은 희로애락,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억제한다. 시온과는 다르게 케실리온의 경우는 더 그렇다. 1계에서의 일과 지옥에서의 900년으로 케실리온은 마음을 닫아야 했고, 강해져야 했다. 그 집착이 분노와 집착이라는 감정을 남기고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신성순례(2) - 무법자의 도시
“그만!”
경매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따끔거리는 피부와 정신이 번쩍 드는 일갈에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은발에 은안을 지닌 소년과 소녀가 보였다. 모두 은빛이 몰아치는 가운에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그 찬란함에 눈을 멍하니 뜰 수 없었다. 쭈뼛거릴 정도의 살기와 강인한 눈빛에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목덜미와 등은 축축하게 젖어갔고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그 자리에 굳어 있어야 했다.
경매금을 높이기 위해 손을 번쩍 든 사내와 머리를 쓸기 위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던 자들까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지금부터 노예거래는 금지한다! 이것은 지엄한 대륙의 정신, 성 카르디스 지저스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케실리온의 음성이 도심 일대에 몰아쳤다. 너무 큰 목소리였기에 모두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막고 있었다. 심지어 성녀조차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 졌다.
“됐소? 성녀여…….”
성녀는 케실리온의 행동에 입을 벌리며 쳐다봤다. 그만큼 빠르게 효율적으로 경매를 중단 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개화(改化)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싶었다.
“누, 누구시오?”
단상위에 사회자가 대표로 말했다. 잘 진행되고 있었던 거래가 순식간에 망쳐지자 기분도 상했고, 두려움도 일었다. 모든 존재를 압도한 존재에게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결과다.
번쩍!
“헉!”
살짝 감겨 있던 케실리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안광에 좌중은 다시 한 번 침음을 터뜨려야 했다. 너무나 강렬한 눈빛이었다. 마치, 드래곤 앞에 오크와 같은 격이었다.
“나는 지저스교의 12성좌를 차지하고 있는 처단의 퍼니쉬! 성녀의 뜻을 대변하여 행한다. 너희가 벌이고 있는 짓은 성녀의 뜻을 거스르는 것과 같다. 성녀는 교단, 교단은 성녀! 즉, 너희는 교단의 뜻을 위배하고 있다.”
“……헉!”
케실리온은 살짝 미소를 띠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성녀에게 세상에 대한 흐름을 일깨워 주리라!
“노예를 해방시키겠느냐, 혹은 신성의 철퇴를 맛보겠느냐!”
“그, 그런!”
케실리온의 말에 모든 존재는 침묵을 지켜야 했다. 너무나 곧고 오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노예 거래는 엄연히 국법에는 없지만, 국가도 신경 쓰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교단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일이건만 지금에서야 나서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노예거래는 국가와 교단에 많은 부를 창출하는 것임을 모든 존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교단에서 대대적으로 막겠다고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륙의 등불이시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시의 책임자를 불러오겠습니다.”
사회자는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대륙의 등불이라고 하면 지저스교를 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교단을 최대한 높이 사 하는 말이었다.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성녀와 신성순례자들은 케실리온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하라! 나의 뜻은 성녀의 뜻!”
케실리온은 기어코 성녀의 뜻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교단의 성녀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간교한 수법으로 모든 일을 성녀에게 돌리니 성녀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잘 처리되고 있는 일에 흡족한 마음도 들었다.
웅성웅성
사회자가 급히 사라지자 노예거래를 위해 모여 있던 자들은 불안한 마음에 웅성이고 있었다. 그만큼 교단이 움직였다는 뜻은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모두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제 만족하는 가? 그대의 뜻을 행하니 모든 존재가 불안에 떨고 있군. 세상은 순리가 있다. 그 순리는 강한 힘에서 약한 힘으로 이어지지, 강자가 흔들리며 약자 또한 흔들리는 법!”
“…….”
케실리온의 말에 성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약간 움찔거리기도 했지만 성녀라는 권좌와 위엄에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것이 성녀였다.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은 케실리온이다.
성녀는 내심 케실리온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룡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바로 교황과 성녀였기 때문이다. 언제 돌변해 대륙에 피를 뿌릴지 모르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모든 일행들의 침묵에 빠지자 주변은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각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만큼 경계심과 소란스러움은 커져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제국의 군대라도 출병했나?”
“예끼 이 사람아. 제국은 지금 전시체제지만 이곳에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그런 여력이 있다면 신전에서 파견된 사절단을 맞이하기 바쁘겠지. 문제는 저곳에 있네 저곳!”
같은 국가 출신 귀족인지 서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행들은 그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었다. 일행 중 누구도 뒤떨어지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수도에 머무르고 있단 말일세. 괜히 대륙의 등불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겠나?”
“그런데 왜 이 난리인가?”
“쯧쯧, 자네도 듣지 않았나. 사절단이 바로 이 도시에 있네. 그것도 성녀와 추기경이라는 군. 하필 성녀께서 노예 거래를 목격한 모양이야.”
“하긴…… 아직 세상을 알기에는 나이가 작지. 노예 거래로 신전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니 말일세. 모든 돈이 깨끗한 것이 아니건만. 아무리 헌금으로 모은다 한들 노예 거래로 벌어들이는 돈만큼 하겠나.”
그들의 이야기가 지속될수록 성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성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두 귀족들이 속삭이는 대화 중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쉿, 조용히 하게. 듣고 계신다면 어떻게 하겠나.”
“큼…… 틀린 말이 있던가? 대륙의 신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제국과 왕국의 힘이 아니던가? 그리고 노예 거래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의 일정량을 상납하고 있는 실정에 이것을 금지 시킨다면 신전은 궁핍해질걸 세.”
“이 사람아 듣겠어. 말을 낮추게.”
“허어, 아무리 신전이라지만 너무하는 군.”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신성기사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큼 말이 과하다는 뜻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신전의 모든 것은 노예 거래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하물며, 기사단의 갑옷이며 병기들도 노예 거래를 통해 생겨났다는 것에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상 듣고 나니 기분이 묘해지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노옴! 감히 면전에 그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빛의 심판을 받고 싶은 게냐!”
“허…… 틀린 말이 있었소이까? 아무리 신전이라고는 하나 너무 하는 군! 난 엄연히 라디안 왕국의 귀족이네, 비록 남작위에 머물고 있다고 하나, 명예를 아는 귀족이야! 준 귀족 따위가 귀족의 면전에 놈이라니! 그게 망발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참지 못한 신성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대화를 나누던 두 귀족은 얼굴이 굳어지더니 기사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귀족의 말에 주위는 금세 동요하며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옳소! 아무리 교단이라고 하나, 너무하는 것이 아니오? 먼 타국에 와서 이런 치욕을 받기는 처음이오!”
“노예 거래가 불법이라고 하나, 금지 된 것은 아니오! 제국에서 조차 쉬쉬하는 것이 노예 거래건만 교단에서 제재를 가하겠다니, 이건 누구 법이오!”
거래를 위해 모여 있던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자 성녀와 기사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교단의 세가 크다고는 하나 귀족들의 말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이 믿고 따라주기에 큰 세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귀족들은 귀족대로, 상인들은 상인대로 불만을 표했다. 그렇게 신성순례자들의 심기가 불편해질 무렵, 사회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시의 책임자인 로켈님이십니다.”
사회자의 가리킴에 모든 존재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허전한 공기만 감돌뿐 누구도 없었다. 그때 짧은 잔영을 만들어내며 누군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