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7화 (247/269)

신성순례(2) - 무법자의 도시

   

 윤기가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연한 청안, 평범한 이목구비를 지닌 평범한 자였다. 하지만, 소리 없이 나타난 그의 신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신성순례의 일행들을 쳐다보고 있는 눈빛 또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신성순례를 하고 있는 대륙의 수호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켈이라고 불린 그는 차분한 어조로 성녀와 케실리온을 번갈아 보며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이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로켈입니다.”

 그는 의외로 젊은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과 능숙함이 잔뜩 베인 모습이다.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그의 결단력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모습이다.

 그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성녀는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원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노예 거래를 중단하실 겁니까?”

 성녀의 말에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워낙 빠르게 고쳐지는 표정이었기에 케실리온과 시온이 아니고서는 눈치 챌 수 없었다. 다만, 은연중 그가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성녀는 그의 말을 기다릴 뿐이다.

 “성녀께서는 어려운 답변을 요구하시는 군요. 그 답변을 요구하신 만큼 이곳의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정?”

 로켈의 말에 성녀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모습에 로켈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그 미소가 얼마나 경멸에 차 있는지 잘 아는 일행들이다.

 “이곳은 노예 거래로 유지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물론 도박과 여러 가지 상업을 통해서도 벌고 있지만 한 달 수입에 반도 되지 않습니다. 즉, 이 도시를 움직이는 것은 노예 거래입니다. 그것을 이용해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차분하게 설명하는 로켈의 말에 일행들은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무법자의 도시도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다. 이익이 있기에 이곳에 있으며, 즐거움이 있기에 사람들이 찾는다.

 꾹!

 성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행위로 벌어들이는 돈이 많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벌어들이는 돈이 더러운 돈이었기 때문에 금지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꼭 그렇게 벌어들여야할 만큼 궁핍합니까?”

 “하하하! 성녀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평범한 일을 할 수 없기에 노예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범죄자가 평범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곳의 영토가 좋아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성녀의 말에 비웃듯 웃으며 말하는 로켈의 행동에 신성순례의 일원들은 살짝 얼굴을 굳히며 살기를 뿜었다.

 “무엄하다! 감히 성녀께…….”

 앤더슨이 대표로 로켈을 나무랐다. 그 모습에 성녀가 살짝 제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앤더슨 경 기다려주세요. 그래서 금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예! 아무리 신전이라곤 하나, 노예제도를 금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폐지한다면 계급구조의 변동이 찾아올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가장 하위 계급이 노예, 그 위로 농노 평민, 귀족, 왕족들이 있습니다. 그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대륙에 큰 혼란이 찾아올 것입니다.”

 로켈은 단호했다. 그의 말은 모두 옳았다. 노예 거래를 위해 모여 있던 자들도 머리를 끄덕일 정도로 옳았다. 모든 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자 성녀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다면 가장 혼란스러울 것이 평민입니다. 무보 상으로 일하는 노예가 없다면 가장 핍박과 고통에 시달릴 자들입니다. 물론 노예 제도가 좋다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기에 성녀께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로켈은 그 말을 하고 말을 마쳤다. 그의 화술에 모두들 감탄했다. 막무가내 식으로 몰아치던 성녀를 잠재웠던 것이다. 성녀의 얼굴이 굳어지자 로켈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타협을 제안했다.

 “교단을 적으로 돌리기는 껄끄러우니 한발 물러나 노예 거래를 최대한 줄이도록 하지요.”

 로켈의 말에 성녀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낮추며 물러나니 성녀도 약간 인정하며 타협을 했다. 주위의 귀족들과 노예 상인들은 로켈의 수완에 감탄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교단을 적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큰 손실이 따를 것이다. 자칫 ‘무법자의 도시’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성녀가 막무가내로 밀고나간다면 대륙의 신도들이 이곳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공격해 올 것이다. 

 대륙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교단인 만큼 귀족들도 피해를 감수하고 무법자의 도시를 멸하기 위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데스 스쿼드의 힘이 있지만 교단에 비해서는 약세라고 할 수 있다. 밤을 틈타 암살과 차륜전을 펼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막나가지 않는 곳이 데스 스쿼드다.

 “이렇게 많은 신성순례자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이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군요. 괜찮겠습니까?”

 성녀가 순순히 물러나자 로켈은 어느 정도 예의와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도 주위의 분위기상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로켈의 뒤를 따랐다.

 로켈이 머물고 있는 저택은 무법자의 도시 중에서 그나마 깨끗하고 높은 건물이었다. 아마, 도박과 검투장을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 같았다. 좁은 도시인만큼 로켈이 향하는 건물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 앞으로 도착하자 검을 쥐고 있는 무리가 머리를 숙이며 길을 열었다. 아마 도시를 관리하는 용병일 것이다. 도시에 주둔하며 관리하는 것도 데스 스쿼드의 일이었기에 용병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군요.”

 “예, 주위에 적이 많기 때문이죠. 가끔씩 공격해오는 자들도 있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지요. 하하하!”

 심각한 이야기를 농담으로 순화시키는 로켈의 화술에 감탄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외벽과는 다르게 의외로 깨끗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는 몇몇의 시녀와 하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소며,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로켈은 손뼉을 치며 누군가를 불렀다.

 짝짝!

 “예, 마스터.”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를 보며 일행들이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은 성기사 정도였다. 대부분 뛰어난 능력과 케실리온을 보며 익숙해진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분들을 위해 다과를 내오도록 하게.”

 “예!”

 로켈의 지시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는 총총히 사라졌다. 그를 보며 로켈이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를 따르는 수하죠. 노예로 팔려왔지만 눈에 띄었기에 제가 가르쳤습니다. 하하!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조만간 이곳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로켈의 말에 그제야 여자라는 것을 눈치 챈 일행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단발머리에 중성적 이미지를 하고 있었기에 남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여자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기에 그 현상은 더욱 짙었다.

 “놀랍군요. 이곳에 올 때는 몰랐지만 뛰어난 자들이 주위에 있군요.”

 “일행 분들에 비해서는 떨어지지요. 드래곤 앞에 오크 격이라고 해야 할까요?”

 성녀의 말에 로켈은 자연히 케실리온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의 행동에 알파가 나서려하자 케실리온이 살짝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 일말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왠지 일행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웃음이다.

 “자네 말처럼 드래곤 앞에 오크 격이지. 그래, 이곳으로 불러왔으면 뭔가 부탁이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케실리온의 도발적인 말에 로켈은 표정을 굳혔다.

 “하하하! 추기경께는 못 당하겠군요. 사실, 경매며, 모든 것은 픽션(Fiction)이었습니다. 경의 말씀처럼 신성순례의 일행분들이 이 도시로 걸음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야기 하자면 좀 길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물론, 성녀께서 원하신 노예를 어느 정도 풀어 들이겠습니다. 부당하게 잡혀온 자들을 말이죠. 아 고맙네.”

 추릅-

 로켈은 수하가 건네는 차를 홀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 모르니 차라도 한잔 드시죠. 물론,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더라도 부당하게 잡혀온 노예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추기경의 경우도 있으니 말이죠.”

 로켈은 케실리온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잠시 냉각되던 분위기는 로켈이 이야기하는 말에 조용히 흘러갔다. 그만큼 성녀 일행이 흥미로워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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