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저도 한 번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만, 어길 때도 있습니다.
약속은 오묘하면서도 사람의 언령이 깃든 마법과도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살면서 몇 번의 약속을 했으며, 몇 번을 어겼습니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안한 것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순례(3) - 피아트의 마물
어두운 밤의 불꽃.
붉은 석양, 지평선 너머로 작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3대 쯤으로 보이는 마차가 피아트(Fiat)를 향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피아트의 영주성 근처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작은 폭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마구 널린 오물과 끈적이는 검은색 물이 가득한 곳에서 한 소년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다섯 소년들이 거세게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 빵은 못줘…….”
“개 새끼! 딴 사람은 빵 하나로 만족하는데 네놈은 왜 두 개야!”
맞고 있는 소년은 가슴에 빵을 품고 오물이 가득한 곳에 엎드려 최대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 소년은 찬찬한 금발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물에 뒤범벅이 되,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때리고 있는 것은 십대로 보이는 소년들이었다.
모두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인지 순수함을 잃어 사회의 찌든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물의 침략으로 찬란한 도시 피아트는 빈민가를 보여주듯 과거의 영광은 뒷전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강도와 다를바가 없었다. 한 소년은 끝까지 빵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차례의 구타 속에서 소년은 기어코 가슴에서 빵이 떨어졌다. 오물에 떨어졌지만, 소년들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그 빵을 주워들었다.
“병신 새끼. 그냥 주면 될 것을 버티고 지랄이야.”
“키키킥.”
다들 조롱 섞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폭행과 빼앗는 것은 일상이 되어 있었다. 배고픔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복구가 진행되고 있는 피아트였지만, 생존한 사람들에 비해 구호물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리고 역병(疫病)까지 돌고 있었기에 민심은 뒤숭숭해져 있었다. 원하는 것을 빼앗은 아이들에게 남은 것은 빛의 단면에 가려져 있는 어두운 파괴충동이었다.
남을 학대하며 즐기는 오락의 일종이라도 되는 듯이 빵을 다섯 조각으로 나누고는 때 국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슥 닦고는 빵을 씹기 시작했다. 모래와 오물이 묻어 역한 맛이 전해졌지만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소년들은 죄의식이라고는 한줌도 남지 않았다. 더 배를 채우고 싶었다.
“씨발! 우리 기대를 저버렸으니 분풀이 대상 정도는 돼줘야지, 안 그럼 모처럼 움직인 보람이 없잖냐! 안 그래?”
“오, 좋아, 좋아! 대장이 그렇다면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는 금발의 소년은 몸을 웅크리고 끙끙댈 뿐 변변한 비병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배고픔에 질려 있다는 증거였다.
“이 새끼 우내? 네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던?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때리고 있는 소년들도 잘 알고 있는 소년인 것 같았다. 금발의 소년은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처량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 때문이었던지 아이들의 흥분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더욱 폭행자들의 가학 심리를 부추길 뿐이었다.
“키키킥, 어차피 죽을 목숨, 우리가 끊어 주리?”
“크크크.”
악의에 취해 신이 난 소년들은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 사이를 가르는 난데없는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그만두지 못해!”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뭐야!”
“네 이놈들! 성녀께서 말하면 그만둬야 할 것이 아닌가!”
날카로운 목소리 뒤에는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때문에 소년들은 자연스럽게 뒷골목의 출구를 쳐다봤다. 그 순간, 소년들은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은빛의 갑옷을 착용한 기사와 어리지만 아름다운 소녀가 어두컴컴한 뒷골목을 등지고 서 있었다.
막 석양지 지고 있었기에 신비로움은 한층 더 했다. 오물을 뒤집어 쓴 소년과는 대조적으로 은발을 지닌 소녀였다. 눈빛과 몸에서 풍기는 위엄과 찬란함에 소년들은 주눅이 들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서대륙의 모든 자들이 알고 있는 의복과 은발에 떠오르자 머릿속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무뚝뚝한 표정이 싸늘해지자 아이들은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서, 성녀!”
“네 이놈! 더러운 입으로 감히!”
“요, 용서를…….”
아이들은 제각기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성녀가 막 표정을 풀기 위해 손을 내렸고, 크루세이더 앤더슨은 칼집에서 손을 떼는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비릿하게 변했다.
“이럴 줄 알았지! 튀어!”
무릎을 꿇었던 아이들은 쏜살같이 가로막힌 벽을 타기 시작했다. 붉은 하늘위로 보이는 태양이 서늘하게 느껴진 순간, 소년들은 다시 아득한 늪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벽 위에서 더욱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뭘 끙끙대며 움직이고 있지?”
“헉!”
꽈당!
벽 위에 고고하고 태양이 지는 석양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눈빛 사이로 차가운 은안이 비춰졌다. 성녀와 똑같은 은발과 가슴을 가리고 있는 갑옷과 등 뒤로 흩날리는 망토를 보는 순간 오금이 저려왔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저마다 얼어붙어 있었다. 그 아이들 하나는 케실리온의 미약한 기세도 받아넘기지 못하고 오줌을 지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잠시 마차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훗. 웃겨 정말. 심각한 줄 알았지만, 이정도 피해라니.”
시온의 목소리였다. 3일간 피아트로 향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신성순례의 일행들이었다. 막 피아트로 도착하자마자, 만난 것이 강도라니 웃음이 나왔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정도로 민심이 뒤숭숭할 때 도착했다는 한스러움에 성녀는 짧게 한숨을 터뜨렸다.
“휴- 괜찮니?”
성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과 겁에 질린 소년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건넸다. 잘못한 아이들이어지만, 마물의 침입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성녀는 회복계 신성마법을 펼쳤다.
“힐(Heal)!”
솨아아!
짧게 몰아치는 신성력에 아이들은 몸에서 이는 충만감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마음에서부터 따뜻해지는 기운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지금껏 이정도의 따뜻함은 느껴보지 못했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어요.”
아까의 무례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성녀는 찌푸려져 있던 얼굴을 풀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하이 프리스트 하이덴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하이덴은 빵을 가지고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물러나자, 맞고 있던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주겠니? 우리는 교단에서 나왔단다. 피아트의 불행을 쫒아 줄지도 모르지.”
성녀를 대신해 하이덴이 금발의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