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57/269)

 장엄하지만 늘어지는 분위기였다. 화려하게 들려오는 연주소리도 무감각해진지 오래였다. 수많은 귀족들이 찬양하며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페이린은 살짝 물리치며 연회장의 벽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행동은 그 누구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하! 페이린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연회를 즐기지 않고.”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눈이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졌다. 페이린의 눈에 비친 자는 검은 머리카락에 잘 차려진 정장을 입고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11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와 귀부인 한 명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기사 정복을 입고 있는 자가 보였다.

 “뭐야, 카논 공작님 아니신가요?”

 “설마 그 일로 화가 덜 풀린 건가?”

 “흥!”

 페이린은 벽 쪽으로 이동하기 전 가져왔던 붉은 색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일을 떠올리니 왈칵 짜증이 치솟은 것이다.

 “하아…… 설마 케실리온이 그렇게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나. 뭐 가신을 파견해 동행하게 한 것도 어려운 일이었네. 자네가 갈수 있는 일이 아니었잖아.”

 “그러시겠지. 공작각하 그러시겠지요.”

 카논 공작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좀처럼 페이린의 화가 풀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확실히 케실리온이 사라지고 프린을 파견한 것은 사실이었다. 케실리온의 행보를 주시한 것이다.

 의문투성이였던 케실리온이다. 그런데 갑자기 성격이 바뀌질 않나. 처음 보는 기술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펼친 케실리온이다. 뭔가 의심이 가는 것도 있고 주목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으니 프린을 파견한 것이다.

 “자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어. 프린은 케실리온과 함께한 급우였어.”

 “난 그와 같은 하프 드래곤이었어!”

 “그 문제가 아니지 않나. 자네는 황궁 마법사이며 후작이지 않나.”

 “…….”

 카논의 설명에 페이린은 살짝 눈을 흘기며 침묵을 지켰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프린은 특별한 작위도 없었고 움직이기 편한 아이였다. 또한, 케실리온과 같은 급우였다고 하니 의심도 적을 것이다.

 “알았어. 말 건 이유가 뭐야. 루시아와 언니까지 대동하고, 거기다 라일까지.”

 페이린은 익히 알고 있는 흑발의 꼬마와 언니사이로 지내는 공작부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카논의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라일경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것 같았다.

 “중요한 이야기라…… 중요한 이야기지.”

 “보는 눈이 많은데?”

 “하하하! 신경 쓰인다면 뭐.”

 카논 공작은 루시아와 부인에게 눈짓을 했다. 잠깐 떨어져 있어 라는 뜻이었다. 딱히 가족에게 숨길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조용히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모녀끼리 이야기를 하며 물러나자 카논과 페이린은 발코니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를 따르는 라일은 두 사람이 발코니 속으로 들어가자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 누구도 접근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카논 공작과 라일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차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제 이야기 해봐.”

 “자잘한 이야기는 생략할게. 우리 공작가로 와라.”

 “푸훗! 뭐? 지금 네 공작가로 들어오라고?”

 “장난하는 거 아니다.”

 카논은 굳은 표정으로 페이린을 쳐다봤다. 잠시 두 눈을 응시하던 페이린은 웃던 얼굴을 지우고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야.”

 “크롬 공작, 카이룬 공작의 움직임이 이상해. 중립을 지키던 카이룬 공작이 크롬과 척을 지고 있다.”

 “하하! 그럼 너희 측만 좋은 게 아니야? 뭐가 걱정이야.”

 “확실히 구조상으로 그렇지. 지금 두 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 측이다.”

 카논 공작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고는 다시 페이린에게 말했다.

 “크롬의 이상행동이 신경 쓰이지 않나? 피아트의 일도 그렇고 자신의 세력권의 일을 방관하고 있다. 요즘 들어 제국의 영토에 마물과 마왕이 출현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견제와 무슨 상관이야.”

 “아카데미에 마물이 출현했다. 그 뒤로 줄줄이 대륙 곳곳에 출현하고 있지. 뭔가 이상하지 않나?”

 “확실히……. 하지만 그것과 세력의 관계는 무관할 텐데. 설마!”

 카논의 말을 듣고 있던 페이린은 갑작스럽게 경악한 얼굴을 하며 카논을 쳐다봤다. 페이린의 표정에 카논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로를 한참 쳐다보던 둘은 발코니 안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크롬이 이상해 진 것이 흑마법의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연회장에서도 봤겠지? 크롬의 주위에는 처음 보는 자들이 모여 있다. 그들을 유심히 관찰해봐. 뭔가 이상한점이 없는지. 이것이 너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다. 나의 세력으로 들어와라.”

 “확실히……. 좋아! 황실 마탑의 힘이 필요하다 이거지?”

 “되도록 교단의 힘도 끌어들여야 할지도 모르지. 프린의 설명과 경험으로 케실리온은 나를 능가한다.”

 “으음…… 확실히 아카데미에서의 일도 있었으니. 뭐 중요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듣는 귀도 많으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이 싸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졌기에 카논과 페이린은 발코니에서 연회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 그 둘은 보았다. 은발과 은안을 지니고서 정확히 페이린과 카논의 눈을 직시하는 케실리온의 모습을…….

제국의 수도(1) - 과거의 인연

    

 경쾌하던 연회장에는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교단에서 파견되어 온 자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쉽사리 다가설 수 없는 위압감에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위축됐다.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케실리온은 금세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이 뛰어난 기운을 품고 있는 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차례 연회장을 둘러보던 케실리온은 구석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케실리온의 은색 눈이 막 발코니에서 돌아오는 남녀에게 머물렀다. 연회장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흑발과 적발이었다.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던 케실리온의 눈은 밝은 빛을 터뜨리듯 안광이 뿜어졌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하자 타오르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살짝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 아닌 기쁨의 떨림인 것 같았다. 짜증스럽게 느껴졌던 눈은 반달 모양으로 주름 잡혔고 케실리온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여자 알아?”

 케실리온의 옆에 있던 시온은 드레스를 살짝 잡으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케실리온을 향해 물었다. 딱 보기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매도 육감적이었기 때문에 시온은 괜히 드레스를 살짝 꾸기며 물어보았던 것이다.

 “……뭐, 알긴하지.”

 “뭐?”

 케실리온의 대답에 시온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붉은 머리의 여성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알파는 다른 의미로써 한숨을 내쉬고는 케실리온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양 사이드를 차지한 시온과 알파는 주위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케실리온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향해 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때문에 감히 누구도 케실리온의 곁에 다가 설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온과 알파의 기세를 견디며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걸음이 약간 어색했지만 둘의 기운을 견디며 다가오는 자를 보며 케실리온은 흥미를 나타냈다. 발코니 쪽으로 향해 있던 시선은 조금씩 다가서는 자에게 돌아갔다.

 “안녕하십니까. 벌민(Vermin)입니다.”

 케실리온은 그의 이름을 듣고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의 변화였기 때문에 당황스러워 하거나 긴장하는 자들은 없었다. 다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작은 파문이 일었다.

 벌민이라는 자는 서부에 있는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카르멘 공작가의 가신이었던 벌민이 돌연 류드릭 가문에 투신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기에 내심 긴장한 것이다.

 지금 제국의 정세는 3개의 파벌로 나뉘고 있다. 서쪽의 대영주이며 귀족파의 수장인 카르멘가와 남쪽의 대영주이며 중립파의 수장인 류드릭 가문 그리고 동쪽의 대영주이며 황제파의 수장인 코리안가문이 대표적인 3대 파벌이다.

 그 파벌 중 그 소속을 알 수 없는 벌민이 나섰기에 파문이 컸던 것이다. 자칫 자신들의 파벌에 누가 되는 일이 생길까 모두 조바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반갑군. ……제 6 추기경이라고 해야 하나?”

 케실리온은 벌민 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너무 작은 목소리였기에 귀족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들었지만 케실리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건 비밀이니까요. 이렇게 만났는데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벌민은 카이룬 폰 류드릭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그 의미가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행동이 직, 간접적으로 중립파라는 것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모두 중립파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몇몇의 인물은 안도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코리안 공작가의 카논 공작과 카르멘 공작가의 크롬 공작이 얼굴을 살짝 찌푸려야 했다. 또한, 크롬 공작의 좌우를 차지하고 있는 두 명의 사내가 슬금슬금 움직이며 케실리온의 근처로 이동했다.

 “이야기라…….”

 “예, 조용히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대도록 좋은 방향으로 말이죠.”

 “…….”

 벌민의 말에 케실리온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얼마나 냉소적인지 벌민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옆에 있는 시온과 알파만이 느낄 정도의 미소였다.

 툭-

 케실리온은 웃으며 벌민의 어깨를 잡았다. 친근함을 표시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얼굴을 살짝 굳혔다. 하지만 벌민은 웃을 수 없었다. 왼쪽 귀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돌연 몸을 떨어야했다. 벌민의 모습은 마치 기쁨에 몸을 떠는 것 같았다.

 “충고하나 해 줄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대화법도 달라져야할 것이다. 그 존재가 나라면 더더욱…….”

 덜덜덜-

 몸을 떠는 벌민의 어깨를 다시 세게 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다. 이제 대화할 마음에 생기나?”

 “예, 예. 물론입니다.”

 케실리온의 싸늘한 말투에 벌민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케실리온의 기분에 맞추며 말을 이어가는 것 밖에 없었다.

 “꺼져. 대화를 하고 싶다면 주인에게 직접오라고 해라. 성녀의 눈은 속여도 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케실리온은 아직도 떨고 있는 벌민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벌민을 제외한 3명의 추기경에게 다시 전달됐다. 추기경 특유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곳에 있는 추기경은 총 4명이었다. 물론, 케실리온을 제외한 숫자였다.

 “후회할거요.”

 벌민은 일말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케실리온을 향해 그 말을 내뱉고는 카이룬의 곁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얼마나 치졸하게 느껴졌던지 시온과 알파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귀족들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시끌벅적한 특유의 소리에 케실리온은 카르멘 공작의 곁에서 떨어져 나온 두 명의 사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두 명의 사내는 카이룬과는 반대되는 추기경이었다. 케실리온이 느끼기에는 확실히 적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두 명 중 가장 낯익은 자도 끼어있었기에 확실할 것이다.

 ‘제 1 추기경 신월(新月)의 크래센트(Crescent) 레딕!’

 케실리온은 레딕의 눈동자를 지나가듯 쳐다보고는 천천히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에게는 반가워해야할 이유도 즐거워해야할 이유도 없었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만 줄 뿐이었다.

제국의 수도(1) - 과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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