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269)

 “결투를 신청한다.”

 챙!

 케실리온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하얀색 장갑을 낚아채고는 힐끔 내려다봤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롱 소드(Long sword)를 뽑아든 상대를 지긋이 노려봤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었다.

 약간 투박해 보이는 입술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가부타할 대화도 없었다. 그저 검을 뽑아들며 상대의 승낙을 기다리는 진정한 검사였다. 그의 가슴에 그려져 있는 엠블럼은 둥근 원안에 물결무늬가 있는 마크였다.

 마치, 음과 양을 상징하듯 붉고, 파란색을 나타내는 색이 칠해져 있었다. 검을 뽑아들며 숨을 고르고 있는 존재의 이름은 라일이라는 이름을 지닌 기사였다.

 “주군과 공녀님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또한, 레이디 페이린의 눈물 값을 톡톡히 치룰 것이다.”

 라일은 케실리온의 언행에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솔직히 결투를 신청할 것은 없었지만 과거를 잊고, 과거의 은혜를 무시하는 케실리온의 처사에 분노하며 결투를 신청했다.

 “허…… 즐거워야할 연회에서 결투라니.”

 “죄송합니다. 폐하! 이건 중요한 문제이옵니다.”

 에반 황제는 결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결투가 벌어질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교단과의 마찰은 피하고 싶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황제는 황제대로 황당해졌다. 하지만, 코리안 공작가의 공녀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페이린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봤으니 황제는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어찌할꼬.”

 황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통탄한 표정으로 성녀를 쳐다봤다. 성녀가 중재에 나서는 것으로 무마할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성녀는 머리를 저으며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황제는 내심 실망한 표정으로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망할 뿐이었다.

 “결투? 웃기는 군. 그게 목숨 걸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나?”

 케실리온은 결투를 신청하는 행동을 비웃으며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장갑을 내팽개쳤다. 그 모습에 많은 귀족들은 분노했다. 기사 중의 기사이며 검의 중의 검인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결투를 비웃으며 농락했기 때문이다.

 신성한 결투를 뭐 같이 보고 있는 케실리온의 행동에 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미 수습 불가에 이른 상황에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난처한 상황이었고, 성녀는 성녀대로 난처해졌다. 

 황제의 위엄을 보이자니 교단의 마찰이 마음에 걸렸으며, 삼자의 입장에서 보자니 케실리온의 행동이 부당했기에 벌을 내려도 마땅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황제는 입도 열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추기경이면 이래도 되는 것이오!? 신성한 결투에 그런 행동이라니!”

 “옳소!”

 황제의 관망에 앞으로 나선 것은 귀족들이었다. 대부분 검을 숭상하는 기사 계의 귀족들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존경하며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앞 다투어 케실리온을 질책하자 자연스럽게 매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중히 사과하라!”

 “사과하라!”

 그들의 행태에 케실리온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귀족이랍시고 날뛰는 녀석들의 목을 따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결투가 무엇이며, 분노가 무엇이란 말인가? 케실리온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군. 역한 똥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귀족의 명분주의와 우월주의에 슬슬 질려가는 케실리온이었다. 그들의 낯짝을 보면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더니 명분이 생기자 들고 일어나는 꼴에 케실리온은 꿈틀거리는 미간을 좁히며 10분도 지나지 않은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케실리온!”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색 눈이 조화를 이루는 여인이었다. 은발의 소년, 즉 케실리온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미녀였다. 그 뒤로 11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뒤를 따랐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페이린이었으며, 흑발의 소녀는 루시아였다. 일찍이 케실리온과 안면이 있는 둘은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표했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두 명의 여자를 쳐다볼 뿐이다.

 “아카데미 일을 제하고는 처음 만나는 거지?”

 “…….”

 페이린의 물음에 케실리온은 말을 아꼈다. 그날 이후 코리안 공작가와는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그 끈이 카논 공작과 기사 라일에게 이어져 있었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고작 경지를 상승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케실리온은 냉정하게 대처했다. 일체의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두 여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반갑지 않아?” 

 “크크크…… 반갑다고? 범인으로 지목당해 감옥에서 몸이 녹아내릴 때 난 이미 인연의 사슬을 끊었다. 검이 나를 향할 때 코리안 공작가와의 인연은 끝난 것이다. 또한, 제국을 떠날 때 그곳은 나와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그럼 왜!?”

 케실리온의 뚜렷한 목소리에 귀족들은 다시 한 번 침묵에 휩싸였다. 이미 악기 연주는 끊어진지 오래였다. 제국 수도의 모든 존재는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은빛의 섬광이 내려지던 날! 마족의 습격이 벌어졌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비록 피해는 없었지만 무시무시한 살기가 몰아치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지금 난 추기경으로써 이곳에 온 것이다. 페이린 후작 그리고 코리안 공작가의 공녀! 인연의 고리를 끊은 것은 그대들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너희들은 날 우롱했으며 바보 취급했다. 나의 인내를 시험하지마라.”

 케실리온은 살짝 살기를 머금은 얼굴을 하며 등을 휙 돌렸다. 모든 귀족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추기경이라는 직책이 있다고는 하나, 제국의 귀족을 저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보통 귀족인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가 바로 페이린 후작이다. 대마법사라는 직책답지 않게 해학적인 면도 없지 않았지만 일국의 대소사를 가늠하는 귀족이었다. 그리고 3개 공작의 공녀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연회장은 두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페이린 후작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공녀인 루시아는 흐느끼며 연회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침묵이 감돌던 연회장에 싸늘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투를 신청한다!”

 케실리온은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위의 분위기와 칼까지 뽑아든 라일을 보며 케실리온은 표정 없는 눈으로 지긋이 쳐다봤다. 잠시 말을 아끼던 케실리온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얀색 장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파팟!

 손에서 뿜어진 잠력이 쏟아지자 장갑은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 모습에 많은 귀족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존재들도 있었다.

 “크래센트(Crescent)경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는 군요. 설마 결투를 신청할 줄이야. 이 기회에 12 추기경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죠.”

 크래센트, 즉 레딕은 제 10 추기경이며, 자신의 수하인 침묵(沈默)의 비트레이(betray)를 보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만큼 케실리온의 무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멍청한 제 6 추기경이 일을 벌려 놓았으니 교섭은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애초에 마룡을 수하로, 혹은 동업자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레딕도 알고 있었다. 잠시 눈을 빛내던 레딕은 수많은 귀족들 틈사이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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