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5화 (265/269)

 솨아아아-

 미스텔의 하늘은 무척이나 울적했다. 그 한없이 짙은 검은 하늘 아래로 연무장이 적막하게 펼쳐져 있었다. 빗물에 쓸려가는 붉은 피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쿨럭…….”

 금발의 사내가 한 움큼 피를 쏟아냈다. 검붉은 피가 입에서 뿜어지자 어깨와 가슴은 가늘게 떨렸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검은 파르르 떨려왔다. 푸르스름하게 변한 사내는 천천히 머리를 들며 눈앞의 소년에게 말했다.

 “으으…… 져, 졌다.”

 풀썩!

 금발의 사내, 즉 라일은 패배를 시인하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기력이 쇄했고 내상이 악화되면서 나타난 증상이었다. 그의 신형이 차가운 웅덩이에 떨어지자 물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케실리온은 돌연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축축하고 시원한 느낌이 온몸을 뒤덮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른손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가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붉은 피를 흡혈마공(吸血魔功)으로 취한 케실리온은 격돌의 순간을 떠올렸다.

 부르르

 짜릿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검병을 느슨하게 쥐고 있던 케실리온은 자연스럽게 꽉 쥐며 긴장의 끈이 풀어졌던 몸을 다시 붙잡았다.

 석양이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붉은 색이던 하늘은 금세 은빛과 금빛으로 물들었다. 처음부터 그런 색이었다는 듯이 일정한 범위의 하늘은 서로 대치하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흘리며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쾅!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밀고 당기던 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니, 은빛의 기운이 밀리는가 싶더니 앞으로 치고나왔다. 팔꿈치 뒤로 칼날을 세운 케실리온이 금빛의 기운을 뚫고 라일의 진형으로 들어간 것이다.

 케실리온의 수법에 라일은 바짝 긴장했다. 롱 소드를 움켜쥔 손아귀에서 자시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기운을 뚫고 신형을 날리는 케실리온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강한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라일은 점점 거리를 좁히는 케실리온을 보며 검을 고쳐 쥐었다. 기운끼리의 대결에서 밀린 라일이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의 검을 쳐내며 역습을 가하는 방법과 먼서 선수를 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역습을 하는 것은 상대의 검을 막아냈을 때의 일이다. 상대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쾌검을 사용하기에 그 방법은 펼치기도 전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나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아. 이미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내가 아니던가? 정 안되면 골드 피니쉬를 사용할 테니…….’

 라일은 롱 소드에는 어떠한 기운도 어려 있지 않았다. 오직 주변을 장악하듯 기운을 넓게 퍼뜨렸다. 마치 물고기를 기다리는 낚시꾼 같았다. 라일은 나름대로 포석을 깔아 둔 것이다. 주변의 기운을 믿고 있는 눈치였다.

 라일은 케실리온이 주변으로 퍼뜨린 기운을 뚫고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다가선다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라일은 퍼뜨린 기운을 느끼는 것에 집중했다. 아직 골드 피니쉬가 완성되지 않았기에 기운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했다.

 팟!

 케실리온은 짧게 발을 구르며 신형을 앞으로 뽑아 올렸다. 시퍼렇게 살기어린 눈빛으로 라일을 노려본 케실리온은 주먹을 휘두르듯 검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쾌검이었다. 순간 라일의 눈이 커졌다.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였다. 하지만 첫 번째 수는 허초였던지 시야를 흐리게 만들며 공간을 가르며 하단에서 상단으로 베어왔다.

 “아래?!”

 케실리온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검을 움직였다. 기묘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마령검에서 시린 은색의 빛이 솟구쳤다.

 콰콰콰콰!

 오러 블레이드가 일렁이는 검이 일직선으로 라일을 쪼개갔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라일의 예측은 틀렸던 것이다. 횡으로 베었던 검은 위에서 머리 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헉!”

 라일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신형을 급히 오른쪽으로 날렸다. 팔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얼굴을 찌푸린 라일은 검을 회수하며 피를 털어내는 케실리온을 쏘아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검의 빠르기가 차원이 달랐다. 

 일정한 검의 방향이 없었다.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이듯 베고 찔러오는 만검 무살의 수법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에 반해 라일은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하는 건가? 제대로 덤벼라.”

 “큭!”

 케실리온은 비웃듯 라일에게 외쳤다.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들어 올린 라일은 천천히 케실리온과의 거리를 좁히며 기회를 노렸다. 겨우 오보 안에서 움직이는 현란한 수법에 라일은 속수무책으로 막기에 바빴다. 

 범위에 접어든 순간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다른 장소에서 나타나는 케실리온의 빠르기에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일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상대에게 살을 내주며 뼈를 취하겠다는 심산으로 롱 소드에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사사사사!

 거칠게 바람을 흩뿌리며 생겨나는 금빛의 오러가 주위를 밝혔다. 라일은 검에 오러가 생겨나는 즉시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바꾸어 정면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가 볼 수 있도록 크게 휘두른 것이다. 

 케실리온은 당연하게도 상대의 틈을 보며 검을 베어왔다. 이대로 상대의 검과 함께 복부를 베어버릴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거친 파공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케실리온과 라일의 검은 서로 격돌했다. 몇 겹으로 응축되어 있는 케실리온의 검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라일의 검은 모래성 부서지듯 순식간에 잘려나가며 복부를 파고들었다.

 푹!

 복부를 파고드는 케실리온의 검을 본 순간 라일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며 주변에 맴도는 금빛의 기운을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끌어 모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며 기운을 극도로 오른손에 집중시켰다. 이미 반으로 잘린 검이었지만 살상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크아압!”

 라일은 비명을 터뜨리듯 골드 피니쉬를 전개했다. 손에서 떠나가듯 사라지는 롱 소드는 기운과 기운사리를 뚫고 케실리온을 향해 날아갔다. 눈으로 쫓기 힘든 빠르기다. 거리도 워낙 가까웠기에 케실리온은 반드시 라일의 공격에 적중당할 것이다.

 라일이 펼친 수법은 심검(心劍)이었다. 기운을 극도로 응축시켜 겨우 펼친 수법이 심검이다. 아직 깨달음이 부족한 라일이 펼치기에는 육체와 정신에 부담이 가는 기술이다. 그런대도 이 기술을 펼친 것은 케실리온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였다.

 챙!

 복부에 파고든 케실리온의 검의 감촉을 느낀 순간 라일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복부를 파고들었던 검은 자신이 펼친 골드 피니쉬처럼 빠르게 사라지며 케실리온에게 향했던 자신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심검?”

 주르륵-

 케실리온은 오른쪽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감촉에 손을 들어올렸다. 손바닥에는 라일의 롱 소드가 베고 지나간 자리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라일의 검 옆에는 케실리온의 검이 버티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라일의 검을 쳐낸 것이다. 

 라일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설마 심검을 펼칠 줄 몰랐던 케실리온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라일을 내려다봤다. 부러진 자신의 검을 쥐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일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심검을 펼친 순간 케실리온이 연이어 심검을 펼쳤기에 라일의 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당하는 쪽은 케실리온이었을 것이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그 위협은 엄청났다.

 “심검이라기보다 이기어검의 수법이군. 찰나의 순간 검이 사라졌기에 심검인줄 알았군.”

 케실리온은 심검치고는 위력이 약하다는 생각에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정정했다. 라일이 펼친 것은 확실히 이기어검의 수법이었다. 빠른 출수와 기운을 퍼뜨린 것을 봐서는 이기어검을 펼치기 위한 준비였던 모양이다. 

 “쿨럭!”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실리온에 비해서 라일은 기침을 해대며 피를 쏟고 있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을 보건데 내상이라고 당한 모양이다. 케실리온은 그 모습을 보며 냉소를 짓고는 마령검을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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