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뜨거운 빛줄기를 한줌도 남기지 않은 채 평원 너머로 사라졌다. 스멀스멀 땅거미가 기어오듯 세상은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오직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세상을 향해 한줌의 희망을 선사하는 쥬얼(Jewel)과 스칼렛(Scarlet)이 밤하늘에 떠 있었다.
그마저도 두터운 구름에 가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고요한 황성에 잔디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가벼운 몸놀림으로 황성 중에서도 별궁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약간의 기척을 남긴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그 존재는 파란색 달인 쥬얼의 빛으로 약간 존재감을 드러냈다. 등 뒤에는 검은 날개를, 갸름한 턱선 사이에 붉은 입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쥬얼 만큼이나 파란 머리카락이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별궁에 자리한 방의 창가로 스며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어둠에 잠겨 있는 방에서 들려왔다.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등진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의발의 존재 앞에서 만큼은 따뜻함을 간직한 여인이었다.
“약속으로 시작되었지만 맹약으로 끝을 맺은 것. 그것을 시작하려한다.”
“그 말씀은…….”
파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만큼이나 무심(無心)에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은발의 존재, 케실리온은 등 뒤의 날개를 감추는 알파를 향해 천천히 몸을 틀었다. 달빛을 등진 채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케실리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물거리듯 입술을 움직이며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있는 알파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데스 스쿼드에서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케실리온이 직접 움직이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도움이라 생각지 않으나. 도움이라 받았으니 갚아야할 것이 아닌가.”
케실리온은 달빛을 받으며 안광을 터뜨렸다.
“……아가씨와 같이 부르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파는 조심스럽게 시온을 들먹였다. 시간을 두며 부른 것이 약간 이상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라면 같이 불러서 말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시온을 끌어들일 정도의 일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알겠습니다.”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는 군소리 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잠시 달빛을 쬐며 기척을 느꼈다. 별궁 내에 많은 시녀, 시종이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목을 조심해야했다. 방의 불도 잠자고 있다고 생각되기 위해 꺼놓은 상태다.
뜸을 들이듯 주위를 살핀 케실리온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일반적으로 육성으로 말하고 있지만 희미하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알파는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결투가 끝 난지 3일. 암살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도 3일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 선에서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케실리온은 알파의 대꾸에 살짝 얼굴을 구겼다. 워낙 낮게 표정을 일그러트렸기에 알파는 볼 수 없었다.
“주시해야할 자는 바로 레딕과 카이룬이다.”
“레딕!”
알파는 낮게 살기를 띄웠다. 잠시 흥분한 알파는 목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케실리온 앞에서 흥분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됐다. 아무튼, 레딕과 카이룬을 주시해야한다.”
“그럼 제가 할 일이.”
“그래.”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는 눈을 빛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레딕에게 감정 있는 자는 알파였기 때문이다. 동족에게 버림받고 레딕의 손에 길러진 알파였다. 하지만 그마저 순탄치 않았다. 레딕이 뱀파이어로써 완벽해지기 위해 수백 년간 알파의 피를 취해왔다. 그렇기에 알파는 그를 증오하고 있다.
“물론, 주시해야할 자는 버그 프리드킨과 크롬 폰 카르멘이다.”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알파의 반문에 침묵을 지킨 케실리온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레딕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수하, 혹은 꼭두각시인 카르멘이 움직일 것이다. 카이룬 역시 측근을 움직일 것이다. 그게 바로 말 한자다.”
케실리온의 말이 끝나자 알파는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이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손짓에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버그 프리드킨은 내가 맡겠다.”
“알겠습니다.”
팟!
알파는 케실리온의 말을 듣고 몸을 날렸다. 일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적막감에 케실리온은 무상(無想)한 표정으로 구름에 걸쳐있듯 걸려 있는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와.”
케실리온은 달에서 시선을 떼며 슬며시 문을 열며 들어오는 시온을 쳐다봤다. 알파가 나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왔기에 시온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시온은 자신의 애검을 살짝 건드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다 처리했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습격하다니. 어떤 녀석이야?”
“글쎄…….”
살짝 미소를 머금은 케실리온은 말끝을 흐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온의 가슴정도 밖에 오지 않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전부 마법적으로 육체를 변화시킨 덕분이다.
“우선 네가 할 일은 단순히 연극하는 정도랄까.”
“연극?”
케실리온은 말하면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연극은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면 충분하다. 평소와 같이 수련하는 모습만 보이면 되.”
“혹시 뭔가 꾸미고 있는 거야?”
“글쎄…….”
케실리온은 다시 말끝을 흐리며 수인을 완성시켰다. 허공에 은빛의 실선이 그려지며 빛을 뿜어댔다.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일루전(Illusion)이라는 마법이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다.”
“설마 이 가짜랑 연극하라는?”
“그래. 평소와 같이 수련하는 척만 하면 될 거다.”
케실리온은 그 말을 남기고 알파가 사라진 방향과 정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알파가 향한 곳은 황성 밖에 있는 카르멘의 저택으로 향한 것이고 케실리온이 갈 곳은 귀족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제국의 수도(3) - 약속(Prom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