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모니는 카르멘가의 시녀로 일하고 있다. 밝고 성실한 성품으로 많은 동료 시녀들에게 인기 있는 그녀는 크롬 공작의 직속시녀로 일하고 있는 높은 지위의 시녀였다. 그 직위를 이용해 남을 깔보는 짓은 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오만하지 않는 그녀가 얼마나 겸손한지 알 수 있었다. 일까지 열심히 하는 그녀였기에 시녀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오늘도 르모니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었다.
“르모니, 날도 저물었는데 쉬어야지. 힘들지 않아?”
“시녀장님도 참. 제 일인걸요. 힘들지 않아요.”
“보아하니. 내일할 빨랫감 같은데 슬슬 가야지.”
일이 대충 끝난 르모니는 시녀장을 향해 머리를 꾸벅 숙이며 빨랫감을 들고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보통 시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르모니는 직업의식이 투철했다.
12시가 지난 늦은 시각임에도 시녀로써의 일은 다 마치고서야 숙소로 향하는 르모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크롬 공작의 직속시녀의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든 일이 즐거웠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을 볼 때면 뿌듯함도 느끼는 르모니였다.
탁탁탁!
“휴- 너무 급히 뛰어왔나. 숨이 차네.”
카르멘가의 저택이 넓었기에 시녀가 머무는 장소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르모니였다. 매일 같이 오가는 길이었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밤이 되면 더욱 으스스한 곳이었기에 덜컥 겁도 났다.
시녀가 걸어 다니는 길에는 그 흔한 횃불도 없었기에 음침했다. 오늘 같은 밤하늘에는 달빛이라도 의지할 수 없었기에 르모니의 심정은 더욱 찹찹했다. 왠지 모를 오한에 덜덜 떨렸지만 따뜻한 숙소에 다왔다는 생각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사사삭!
“응?!”
숙소에 다 왔을 무렵 르모니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었기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누구 있어요?”
르모니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눈을 크게 뜨고 살펴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저택의 가로수나 잔디, 건물 같은 것도 보였지만 사람은 없었다.
이상함이 들었지만 르모니는 빨랫감을 추스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히 저택을 순찰하는 경비병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스럭!
“거기…… 누구야?”
멀리서 들리던 기척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급히 몸을 튼 르모니는 희미하게 보이는 움직임에 침을 꼴깍 삼키며 소리쳤다. 꿈틀 거리며 움직이는 생명체를 보며 르모니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섰다.
찍찍-
“휴…… 뭐야. 쥐잖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르모니는 스치듯 지나간 쥐를 보며 중얼거렸다. 긴장감이 풀린 르모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부스럭!
“헉!”
긴장을 풀고 있던 르모니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기척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등 뒤에서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더니 뭔가 차가운 느낌이 전신을 옥좌 했다.
“소리 지르면 죽는다.”
다른 말도 없었다. 소리 지르면 죽는 다는 말에 르모니는 비명이 세어 나오려던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의문의 존재는 여자였다. 하지만 가녀린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손톱을 보자 여자라는 사실을 싹 잊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르모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습격한 여인의 행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이러세요.”
“살고 싶나?”
르모니는 긴장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여인에게 물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전하고자하는 바는 뚜렷하게 전했다. 그녀의 말을 되받아친 여인은 다른 말도 없이 ‘살고 싶냐’는 말을 하고는 살기를 거두어드렸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묻는 말에 답한다면 편안해질 수 있을 거야.”
달콤한 말이었다. 두려움도 살기로 짓눌리는 고통도 벗어나고 싶었다. 여인의 목소리에 르모니의 눈동자는 몽롱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여인의 목소리와 체취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아…….”
“몇 가지 질문을 하지.”
“…….”
르모니를 습격한 여인의 몸에서는 인간이 풍길 수 없는 향기가 느껴졌다. 이성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담긴 체취였다. 감미롭게 들리는 목소리는 상대의 긴장감을 없애주는 역할을 했다. 같은 여자였지만 효과는 발휘됐다. 강한 위력은 아니었기에 르모니는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다.
“너의 이름은?”
“르, 르모니에요. 사, 살려주세요.”
“좋아. 르모니……. 밤늦게 뭘 했지?”
희미하게 느껴지는 두려움에 르모니는 살려달라는 말을 연발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묻는 말에만 대답해! 큰 소리를 내도 죽는다.”
“……딸꾹!”
살기가 느껴지자 르모니는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입에서는 신음과 울음이 세어 나오려 했지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입술을 닫았다.
“좋아. 질문에 답만 잘한다면 편해질 거야. 첫 번째 질문. 넌 어디소속의 시녀지?”
“크, 크롬 공작각하의 직속시녀.”
“잘했어. 이런 식으로만 하는 거야. 날 화나게 하지 마.”
르모니를 제압한 여인은 능숙했다. 겁먹은 르모니를 달래며 칭찬까지 하고 있었다. 그 능숙함에 르모니는 알게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에 따라 의문의 여인은 꽉 쥐고 있던 손을 풀며 다음 질문을 준비했다.
“두 번째 질문. 크롬 공작의 특별한 행동을 말해봐.”
“……제, 제발. 직속시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죽고 싶어? 진지하게 떠올려봐.”
르모니는 다급하게 말했다. 정말로 직속시녀가 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칫 거짓말이라고 들릴 수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흐, 흑…… 정말, 정말 몰라요.”
“쓸모없는 그만 죽…….”
“새, 생각났어요. 제발.”
상대가 죽인다는 말을 하자 르모니는 있는 생각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없어도 지어내야 할 판이었기에 르모니는 다급하게 말했다.
“자, 말해봐. 쓸모없는 말이라도 상관없다.”
“평소 즐기시지 않던 허브티를 드셨어요. 그리고 새롭게 발탁된 가신들과 대면하시고…… 흑. 더, 더 이상은…….”
“죽고 싶지?”
“흑…… 시녀! 시녀들의 배치를 바꿨어요. 때문에 제가 직속 시녀로 발탁됐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르모니의 다급함과 절실함이 통했을 까?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여인은 살며시 힘을 풀며 르모니를 앞으로 떠밀었다.
“좋아. 아주 좋아. 봐 생각만 하면 아무 일도 없잖아.”
“감사합니다. 정말이에요.”
풀려난 르모니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이대로 가도될 것 같았다.
“가, 가도 되죠?”
“어딜?”
“야, 약속 하셨잖아요. 풀어주신다고…….”
“아! 편안하게 해준다고 했지. 죽음이 편안하지.”
스팟-
“약속이 다르잖아…….”
“약속? 살려준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여인은 르모니를 낚아채며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왼손으로 르모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목덜미를 향해 하얀 이를 세웠다. 날카로운 송곳니였다. 평소 숨겨놓은 송곳니가 거칠게 르모니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한 방울의 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랑말랑한 혀를 이용해 르모니의 피를 끌어 모았다.
추릅!
“미안하지만 너의 모습도 빌려야겠다. 케실리온님을 위해서 말이야.”
거칠게 반항하던 르모니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축 늘어졌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볼을 지나 차가운 잔디밭으로 떨어져 내렸다. 몽롱하게 풀린 르모니의 눈동자에는 파란색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이 달빛을 받으며 스산하게 피를 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 한 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르모니는 점점 말라비틀어졌고 마지막에는 가루로 흩날리며 파란색 머리카락의 여인에게 모든 것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오직 사라진 육체를 대신해 시녀가 입는 옷이 바람에 흔들리며 파란색 머리카락 여인의 팔에 매달려 있었다.
‘이것으로 크롬을 감시하는 것은 더욱 쉬워진다.’
르모니의 피를 빤 것은 알파였다. 알파는 한줌의 가루로 사라져 버린 르모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케실리온이 만들어준 아티팩트의 능력이다. 폴리모프(Polymorph)마법이 내장되어 있기에 르모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쉬웠다.
아무튼, 모든 것을 빼앗은 알파는 르모니의 시녀 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주위를 살핀 알파는 바닥에 떨어진 빨랫감을 챙겨들며 시녀들이 머무는 숙소로 스며들었다. 본격적인 정보 수집은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제국의 수도(3) - 약속(Prom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