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
나는 죽어가고 있다.
당신은 이 문장이 역설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두 눈이 텅 빈 새하얀 해골.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하얗게 풍화된 해골.
해골은 죽음 자체를 의미한다.
영구적인 정지. 끝난 것. 종착.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무의미.
- 딱딱.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도 부딪힐 수 있다.
완전히 멈춰 버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날짜도 셸 수 있다. 기억도 또렷하다.
아마 당신보다 좋을지 모른다.
천둥이 치는 날.
20년 전 얼치기 사령술사의 의식으로 인해 깨어났던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은 머릿속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해골병사로 살아온 20년.
나는 무생물이 아니었다.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었다.
다 끝난 것.
멈춘 것.
딱딱거리고 달그락거리는 것.
죽은 것처럼 보여도.
나에겐 분명히 삶이 있었다.
- 달그락.
왼팔을 흔들어 본다.
움직이는 건 이렇게 확실하다.
볼 수도 있다. 들을 수도 있다.
감각은. 조금 무디다. 그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히 고통을 느끼고 있다.
살해당하는 던전의 주인.
서큐버스님을 보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어떤가.
이제 더 이상 첫 문장에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나는 죽어가고 있다.’
- 서거!
서큐버스님의 배에 깊숙이 칼이 박힌다.
비틀리며 성감이 빼내어 진다.
다음번은 심장일 터.
내 마음이 아플까 봐서일까?
그분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는데.’
마음이 영 좋지 않다. 내가 지켜 주었어야 하는데.
죽어가고 있는 나는, 이 작은 던전을 지키는 해골병사다.
하지만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
토벌 당했다.
용사. 각인을 새긴 자들. 저들이 어디서 나온 자들인지는 모른다. 인간들 사이의 오랜 전쟁에서 나왔는지.
마왕의 강림 이후에 등장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 달그락.
‘지켜야 해.’
나는 던전을 지키는 자.
마스터를 지키는 자.
임무를 다해야 한다.
부서진 몸을 움직였다.
이미 많은 뼈가 빠지거나 조각났다. 팔은 하나만 남았다. 두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 덥석.
바닥에 떨어진 정강이뼈.
부러진 반쪽짜리 뼈를 잡는다.
억지로 왼팔을 움직인다.
잡은 뼈를 세차게 던진다.
- 휘리릭!
뼈는 기세 좋게 날아갔다.
- 툭.
용사의 팔을 쳤다.
물론-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내 최후의 일격이란 건 고작 이런 수준이다.
근육질의 용사는 나를 비웃는 표정으로 흘끗 본다.
입 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간다.
“이런 쓰레기가!”
용사도 아닌 시종이 나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시종조차도.
온몸에 미스릴로 된 풀 플레이트아머를 걸친 상태.
키는 2미터에 달하고 몸은 걸어 다니는 전차처럼 보인다.
- 번쩍!
시종은 온갖 마법이 중첩된 그테이터 실드를 위로 든다.
- 콰직!
두껍고 거대한 실드 아랫부분으로 나를 찍어 버린다.
- 빠각!
- 빠가각!
뼈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사실 그레이터 쉴드가 아니라-
녀석이 발로 밟고 힘을 주어도 나는 부서진다.
- 털썩.
피를 홀리며 쓰러진,
서큐버스님과 눈이 마주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콰직!
- 우득!
- 빠각!
그 와중에도 내 몸은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다 부서지고 있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완전한 소멸에 가까워진다.
- 데구르르.
몸은 다 부서졌다.
머리만 남아.
던전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개 해골병사.
작은 던전에서 평화롭게 숨어 지내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부서졌다.
용사도 아닌, 그 시종의 발에 짓밟혀 이렇게 부서져 간다.
서큐버스님의 눈동자가 비어 간다.
피와 함께 생명이 빠져나간다.
마음이 불편하다.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난다.
- 데구르르르!
나는 머리를 굴렸다.
두개골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온힘을 다해 바닥에 굴렀다.
- 데구르르!
“어, 어엇!”
시종이 소리친다.
나는 그냥 부서져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다. 의지를 갖고 두개골이 굴러 간다는 걸 알아챘다.
- 광!
녀석이 실드로 던전 바닥을 친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성공이다.’
성공했다. 서큐버스님을 살해하는,
용사의 발치에 다가가는 데.
타격을 줄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분했다.
이렇게 무시당해 온 삶이.
숨어 지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이.
마지막 소중한 것조차 눈앞에서 비참하게 빼앗기는 삶이.
그들에게는 삶으로조차 보이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하루하루의 소소한 기쁨이 있었다.
텅 빈 내 가슴에 온기를 지펴 주던 서큐버스님과의 소소한 삶이.
- 데구르르르!
뒤를 돌아보는 용사.
하지만 나는 이미 녀석의 아래에 있었다.
- 콱!
용사의 발뒤꿈치를 있는 힘을 다해 깨물었다.
최후의 발버둥은 내 마지막 권리.
一 과득!
빛나는 용사.
모든 것을 받은 용사.
선택된 용사에게는 아무 의미 없이 부서질 조형물로,
칼질 한 번에 쓰러져 약간의 경험치가 될 조형물로 보이겠지만.
나와 같은 해골에게도 마지막까지 발악할 권리가 있다.
- 콱!
- 아드득!
두개골에 박힌 이빨 몇 개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아아아 아아악!”
용사가 비명을 지른다.
뒤꿈치에서 새빨간 피가 흐른다.
- 좌르르!
두개골에 붉은 피가 끼얹어진다.
축축하고 붉은 피가 세차게.
- 주르르.
끼얹어진 피가 흐른다.
‘뭔가 이상한데?’
기묘한 위화감.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용사는.
던전의 온갖 트랩.
칼날 괴물들의 돌격.
서큐버스님의 최후 마법.
그것들 모두를 킥킥거리며 맨몸으로 받던 녀석이다.
‘더 해 봐, 더 없어?’라며 비웃음을 홀리던 녀석인데.
고작 나 따위가 깨물었다고 피를 흘릴 리가 없다.
“이게!”
- 과직!
- 콰직!
흥분한 용사가 발로 나를 마구 짓밟는다. 두개골밖에 남지 않은 몸이 부서진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간다.
- 우드득!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끝.
- 콰작! 콰작! 콰작!
아웃사이더 성향의 서큐버스가 오순도순 운영하는 던전.
이름 없는 해골병사는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던전 돌바닥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플레이어를 변경합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97.3%->94.8%]
‘서큐버스님.!’
- 우르릉! 광!
시끄럽다. 머리가 울린다.
부서졌다.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장소에 가게 되리라고는.
두개골이 부서질 때, 의식에 깜깜한 막이 내렸다.
모든 게 까맣게 되었다. 이제 조용할 거라고 상상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 우르르 롱!
하늘에서 진동이 울린다.
없던 두통이 오는 것 같다.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양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매끈한 두개골이 만져진다. 딱딱한 손뼈와 두개골이 서로 부딪친다.
- 톡! 톡!
소리가 들린다. 다시 부딪쳐 본다.
- 톡! 톡!
다시 한 번.
- 톡! 톡!
이상하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나는 손을 들었다. 올려다봤다. 손가락뼈 다섯 개가 그대로다.
구부려 본다. 다시 펴 본다. 모두 이상 없이 움직인다. 주먹도 쥐어진다.
- 탁. 탁.
손가락뼈를 서로 맞대어 본다. 새하얀 뼈가 서로 닿아 소리를 낸다.
- 달그락!
손으로 어깨를 만진다.
탈구됐던 왼 팔을 움직였다.
하나는 날아가고 하나는 탈구됐던 양팔이 제자리에 붙어 있다.
부러졌던 양쪽 다리를 들어 보았다. 부러진 흔적이 사라졌다. 발가락 다섯 개가 전부 움직이고 있다.
몸 전체에 힘을 주어 움직였다.
골반. 허벅지. 척추.
- 달그락! 달그락!
몸 전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초라하고 조잡한 몸이다.
하지만 분명 익숙한 몸. 20년 동안 함께해 왔던 달그락거리는 몸.
- 달그락!
‘분명 부서졌는데.’
두개골이 가루가 될 정도로 밟혀 부서졌다. 서큐버스님을 지키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졌던 몸.
그 몸이 다시 느껴진다.
어느 것 하나 잘난 것 없던 뼈다귀 몸이다. 골격도 크지 않다. 그리 튼튼한 뼈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다. 그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하늘을 바라봤다.
나에게 너무 집중했다. 하지만 주변 상황도 심상치 않다.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새까만 하늘이 밝아진다.
푸른 벼락이 나무라도 갈랐는지,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린다.
- 우르릉! 광! 콰광!
천둥이 연달아 커다란 소리를 낸다. 벼락이 커다랬던 만큼 천둥도 시끄럽다.
몸이 울릴 정도다.
^ xz xz rz XZ VZ iI I I I I I-.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바람이 요란하다. 땅을 다 파헤친다. 나뭇가지를 뜯어낸다.
파헤치고 뜯겨진 것들이 캄캄한 허공을 날아다닌다.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몸이 다시 돌아온 것은 확인했다.
- 달그락.
이제 주위를 더듬는다.
- 탁. 타닥.
하늘은 뚫려 있다. 그러나 양옆이 좁다.
- 탁.
누워 있는 상태다. 머리를 위로 부딪쳐 보았다.
- 쿵!
두개골이 단단한 나무에 부딪힌다.
발도, 머리도 힘껏 뻗자 부딪힐 정도다.
세로로도 몸에 딱 맞춰져 있다. 나는 좁은 상자 안에 누워 있다.
관.
깨닫는다. 여기는 관이다. 나는 관속에 누워 있다. 뚜껑이 열려 있어 하늘이 보일 뿐이다.
파헤쳐진 무덤. 그 속의 관. 거기에 누워 있는 해골이 나다.
- 우르릉! 쾅!
- 쏴아.!
관을 덮어야 할 봉분은 거칠게 파헤쳐져 있었다. 사람의 손이라기 보다, 무언가. 자연적인 것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이런 폭우라면 그럴 만하지.’
그 순간.
- 띠링!
주위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소리가 느닷없이 머릿속에 울렸다. 두개골 속에서 거대한 종을 치듯 울린다.
정말 신경 쓰이는 소리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뭔가가 떴다.
새카만 밤이지만 또렷이 보인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없음]
[해골병사 Lv.l(36)]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이게 뭐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시 살아났다.
허공에 상태창이 뜬다. 상태 창은 자기 자신의 정보를 표현해 준다.
일단 다른 건 그대로다.
체력. 힘. 민첩. 지혜.
20년 동안 쌓아 온 능력치.
그런데<레벨>이 이상하다.
죽기 전에 나는 Lv.36 해골병사였다. 능력치는 보다시피 간신히 20대를 넘는 수준.
별로 대단한 능력치는 아니었다.
해골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약하다. Lv.36 해골병사라고 해도, 허약하기 그지없다. 낮은 레벨의 인간 모험가에게도 비참하게 진다.
그러나.
상태 창에 따르면 나는 지금 Lv.l해골병사.
원래대로라면.
고블린 어린이에게도 질 한 자리의 능력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능력치는, 죽기 전의 것 그대로.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 달그락!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지?’
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가 날 때면 자동으로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스킬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예]
스킬을 확인하겠냐는 질문.
‘그래야지.’
나는 허공에 손을 가져갔다.
오른쪽에 있는 ‘예’라는 글자를 건드렸다.
- 띠링!
그러자 허공에 글자들이 떴다.
새카만 허공 속에서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이는 글자들이.
- 되는 대로 휘두르기 Lv.8- 부실하게 막기 Lv.6- 어설프게 찌르기 Lv.4- 적당히 구덩이 파기 Lv.5-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들기 Lv.4-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기 Lv.6- 두개골 굴리기 Lv.Knew!)
스킬 목록이다. 스킬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말한다.
할 수 있어도 스킬로 표기되지 않는 일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