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화 (4/458)

4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4)

‘도망쳐야 하나.’

고민했다.

확신이 없었다.

충분히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얼어붙어 있는 루비아는 말할 것도 없다. 녀석들이 원하는 것은 어차피 여자일 거다. 해골 같은 건 그냥 덤비면 부수는 정도.

아무래도 싸움은 무리.

석궁에 매겨진 살.

뾰족한 살은 단숨에 루비아의 심장을 꿰뚫을 만큼 날카롭다.

키 큰 남자가 든 거대한 망치.

높이서 내려치는 망치를 쉽사리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맨몸. 방패도 장검도 없다.

‘돌아오자마자 위기라니.’

이대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게까지 분할 건 없다.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사실 누군가 큰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 마왕들, 하다못해 유망한 마법사나 연금술사 같은 존재들이 다시 태어나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 같은 해골병사가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

20년을 살았다. 하지만 식견은 좁고 경험은 부족하다.

똑같이 과거로 돌아온다면, 내가 아니라 어디 다른 훌륭한 녀석이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거다.

패배주의와 자기 부정은 언제나 단맛이 난다. 그것들이 자주 곱씹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갈비뼈 안쪽 텅 빈 어둠으로 상념을 삼켰다. 가만히 몸을 굳혔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녀석들은 점점 더 거리를 좁혀 온다.

오들오들 떠는 루비아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 살락.

10미터.

- 사락.

7미터. 5미터. 바로 앞의 바위까지 놈들이 도달했다.

그 순간.

- 히히이이잉!

갑자기 사냥꾼들의 말이 울기 시작했다. 어딘가 아픈 걸까.

울음소리가 부자연스럽다.

사냥꾼들이 뒤를 돌아봤다. 서로 손짓을 교환했다.

놈들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묶어 놓은 말들을 향해 돌아선다.

‘말들이 걱정되는 건가.’

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구슬푸게 우는 말들을 바라봤다.

블루 마일로.

사냥꾼들이 타고 온 말의 종류다.

종종 보던 말이다.

저 작고 푸른 말들은 산을 잘 오르지만, 다른 말보다 체온 변화에 무척 민감하다.

이렇게 오래 비를 맞혀 놓으면 몸살로 죽을지도 모른다.

‘말 가격을 생각해라.’

놈들이 저 비싼 말의 가격을 생각하길 바랐다. 가 버리라고 기원했다.

- 푸슛! 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있었다. 석궁 살이 날아오는 모습이 언뜻 보였으니까. 하지만 막는 건 무리였다.

너무 빨랐다.

날아오는 소리와, 루비아에게 살이 박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끄혹!”

루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를 바라봤다. 살은 로브로 싸인 어깨에 반 이상 파고 들어가 있었다.

강철이 덧씌워진 석궁 살에 뼈까지 부러진 모양.

“아, 아흐웃!”

부러진 뼈가 신경을 마구 찌르는 걸까. 루비아가 비명을 지른다. 어깨에서 마구 피를 흘렸다.

진창 위를 데굴데굴 뒹굴었다.

진회색 로브가 전부 엉망이 된다.

그때 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욕망으로 번들거린다.

“호오? 어디로 가 버리셨나 했더니여기에 숨어 계셨나? 응?”

“시, 싫어! 싫어! 누, 누구야!”

루비아가 소리를 지른다.

싫다고 외친다. 뭐가 싫다고 그러는 건지는 알기 어렵다.

그저, 본능적으로 저 목소리에서 혐오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음침하게 깔린다.

“누구긴, 귀여운 예쁜이 잡아먹으러 온 저숭사자들이지. 영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거든? 하지만 곱게 모셔갈 필요는 없다고. 목만 가져가면 되니까.”

영주라면.

인간의 우두머리들이다. 영주가 왜 이런 여자 아이를 쫓는 거지?

“그자는 영주가 아니야. 내, 내가정당한 계승자(JA마이너IzA마이너Varisa)다!”

루비아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앗!”

손에 쥔 단검을 들고 기합을 넣는다. 그 모습을 석궁을 쏜 남자가 바라본다.

“킥 킥킥.

비웃음이 허공에 울린다.

“그래? 그럼 정당한 영주님 맛 좀볼까? 얼마나 우릴 즐겁게 해 줄지 기대되는 걸?”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는 관심도 없다.

‘못 알아보는 건가.’

마물, 해골병사가 바로 곁에 있다.

한데 놈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연도를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16명의 마왕들이 본격적으로 강림하기 전이다.

수천, 수만의 마족이 쏟아져 나와,

마계 魔界를 열기 전.

하지만.

패권을 쥔 인간에 의해 세계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기는 하더라도.

걸어 다니는 해골들을,

나와 같은 마물들을 찾는 건 지금도 어렵지 않다.

깊은 산과 사막. 지하 속에는 수많은 던전이 있기도 하고.

‘정말 끝까지 나를 몰라볼까.’

수풀 속.

사냥감인 여자의 옆에 누워 있는 하얀 해골.

그냥 뼈다귀가 엎어져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언제든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일어나야 한다. 지금 싸워야 한다.

하지만 늦었다.

루비아가 더 빨리 움직였다.

- 팟!

루비아는 진창에 발을 내디딘다.

석궁을 쏜 놈을 향해 무작정 돌진한다.

“으아 아앗!”

비명 같은 기합을 내지른다.

미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상대는 석궁을 들었다.

사출 무기를 든 상대를 향해 간격을 좁히는 일.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다.

- 픽!

“끄, 끄악! 끄아악!”

- 픽! 퍽! 퍽!

그 가벼운 일리는 폭력 앞에 휴지처럼 구겨진다. 석궁을 든 남자는 루비아의 단검을 가볍게 피했다.

한 손으로 루비아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한다.

- 픽!

“뭐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달려들 드시나? 응?”

“끄, 끄히헛!”

- 퍽!

발을 쭉 뻗어 루비아의 아랫배를 세차게 가격했다.

- 퍼걱!

“우우 읍!”

“아까는 기세 좋게 달려들더니, 내장 좀 내려앉은 것 가지고 왜 이래?

그래서 계승자가 되겠어?”

가격이 계속된다.

- 달그락.

나는 수풀에서 일어났다.

무덤에서 일으켜 준 네크로멘서에 대한 친근감일까. 여기서 혼자 도망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꽉.

작은 돌을 잡았다.

‘타깃은 둘.’

당장 루비아를 때리는 놈.

뒤쪽에서 해머를 들고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을 놈.

어느 쪽도 만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을 노린다.

- 철퍽!

루비아를 잡고 주먹질을 하는 녀석을 밀쳤다.

머리를 겨누고 돌을 내리찍었다.

사위가 어둡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퍼적!

“아악!”

놈의 낮은 비명이 들린다.

맞기는 했나.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비명 소리도 작다. 다시 내리친다.

- 챙!

이런.

이번에는 타격감이 좋지 않다.

징이 박힌 부위를 맞은 것 같다.

놈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 덤석.

놈의 손을 잡았다. 새카만 암흑 속에서 두 손이 얽힌다.

피와 살이 붙은 손.

하얀 뼈로 된 손.

뼈로 손가락을 얽어 짓눌렀다.

- 우드득!

힘은 내가 살짝 더 우위.

억지로 꺾어 누른 녀석의 손을 노린다. 돌로 내리찍었다.

- 퍽!

“아악! 이런 씨발!”

번개가 친다. 녀석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다. 허리춤에 걸린 곤봉.

‘잡기 전에.’

먼저 찍어야 한다.

돌을 꽉 잡고 머리를 노린다.

놈의 두개골을 깨기 위해 돌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 파가 앗!

시원하게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의식이 흐려진다.

세계가 부서진다.

깨진 것은 내 두개골이었다.

“난데없이 사령 술이냐?”

- 파가!

- 파가앗!

- 과지 직!

거대한 해머가 내 뼈를 아작하며 박살내는 게 느껴졌다. 두개골을,

팔을, 다리를, 척추를 박살낸다.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당한. 건가.’

졌다. 죽었다. 짓밟혔다.

또 다시 지키지 못했다.

“뜻. 잘 부서지지도 않네.”

석궁의 목소리는 아니다. 더 낮고 굵은, 폭력적인 목소리다.

‘해머를 들었던.,

- 우르릉! 광!

번개가 칠 때.

석궁을 든 놈을 노렸다.

동시에.

해머를 든 녀석이 뒤에서 내 머리를 조준했다. 제대로 한 방 날린 거다. 상황이 정리된다.

- 콰직!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말을 해서 좀 놀라게 할 걸 그랬나? 20년 전, 그때는 어떤 식으로 살아남았던 거지? 가만히 움직이다가 몇 대 맞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던 것 같은데.

- 과직!

지금은 두개골이 빠개져 버렸군.

전보다 더 안 좋은 결말인가.

“병신같이 계집이나 패다가 해골한테 습격을 당하나. 한심한 놈.”

“이, 씨발. 해골이 뭐 이리 힘 이세? 진짜 죽을 뻔했잖아!! 무슨 리치가 소환한 해골인 줄 알겠네. 이런 년이 네크로멘시를 해 봤자 흐물흐물한 해골 아니야?”

“음. 타격감이 좀 이상하긴 해.

아무래도 이년 수준에서 일으킨 해골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산의 몬스터인가? 제대로 얘기를 안 해 준 여관 주인을 족쳐야겠어. 위험할 뻔했다.”

“젠장. 이년 때문에 어깨뼈가 빠졌잖아!”

- 퍽! 퍽! 퍽!

“히, 힉, 끄, 끄흐! 읍, 으힘, 끼헉!”

“야, 그만 때려. 상품 가치 떨어트리지 마라.”

“죽여서 데려 가도 1세이론이야.”

“그래? 뭐, 시식은 나부터 하지.”

눈앞이 까맣게 변한다. 의식이 완전히 빠져 나갔다.

여자의 절규 섞인 신음도, 놈들의 뒷말도 멀어져 간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망 기록을 추가하시겠습니까?

Y/N]

- 번쩍! 번쩍!

벼락이 연거푸 친다.

- 우르릉! 쾅! 콰광!

천둥이 굉음을 낸다. 벼락이 커다랬던 만큼 천둥소리도 크다. 폭우가 내리는 한밤이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바람은 땅을 다 파헤치고 뒤집어놓을 정도로 요란하다.

나뭇가지들이 뜯겨 져 허공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 달그락!

몸을 다시 움직여 본다.

‘죽은 게 아니었나?’

분명히 망치에 두개골이 몇 번이나 박살났다.

두개골을 만져 본다.

손을 들어서.

팔과 손 없이는 무엇을 만질 수 없다. 되돌아왔다.

조각난 몸이 다시 그대로다. 터무니없는 현실이 강제된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보이지 않았다. 꽉 막힌 관. 나는 그 속에 누워 있다. 뚜껑이 열려 있어 하늘이 보일 뿐이다.

파헤쳐진 무덤. 그 속의 관.

거기에 누워 있는 해골이.

- 띠랑!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l(36)]

[체력-29 힘-23 민첩-18 지혜-9]

[계승된 이후 첫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사망 기념관’이 열렸습니다!]

[사망기념관]

1. 사령술사를 위하여.

최후의 순간, 당신은 한 사령술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령술사와의 관계에서 기본 호감도 20을 얻고 시작합니다.

2. 둔기는 위험해.

둔기에 머리가 부서져서 죽었습니다. 모든 둔기에 대한 물리 저항이40 오른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회자에 적용할 특전을 선택해 주십시오.]

1. 모든 사령술사와의 호감도 플러스20.

2. 둔기 류 물리 저항 플러스40

또다시 낯선 글자들이 나타난다.

나를 희롱하는 듯한 메시지들.

내게 이 폭우와 자세는 익숙하다.

오래된 것도 아니다.

한 시간 전에 취하고 있던 자세.

한 시간 전의 폭우 그대로다.

- 우르르릉! 쾅!

천둥이 울렸다. 천둥과 함께,

“마, 망자亡者여!”

진회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파헤쳐진 무덤 근처에 서서 소리친다.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내 말 들리시나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목소리. 내려다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 달그닥.

움찔했다.

천둥소리가 아니라, 여자의 존재에 움찔한다.

‘루비아.’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다. 해골병사로 살아온 이십 년. 나는 세상의 삼류 조연이었다.

놀라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항상 놀라고 휩쓸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한 적은 없었다.

일어서는 것조차 잊고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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