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0)
인간들은 기쁘게 달려와 나를 부술 것이다.
혼자였다면 지갑은 그냥 버렸을 거다. 그러나 여자, 루비아가 든 지갑에든 돈.
그건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칼을 살 수 있다.
장창을 살 수 있다.
방패를 살 수 있다.
몸을 숨길 집을 빌릴 수도 있다.
‘아예 무기술 교본을 사서 익혀 볼까.’
- 달그락.
나는 웃었다.
이 인간 여자는 내게 많은 일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필요하다.
“아. 알겠어요.”
루비아는 돈을 주웠다.
“돈이 좀. 너무. 많은데요? 장사꾼일 요?”
72로티가 상당한 돈이긴 하다.
“글쎄, 좀 더 뒤져 봐야지.”
그래야 알 것 같다. 나는 시체를 계속 뒤졌다.
“전위적이네요.”
“응?”
“시체를 뒤지는 해골이라니.
“기왕이면 실용적이라고 칭찬해 줬으면 하는데.”
적당히 대꾸한 순간, 망치의 품에서 수통을 발견했다.
- 찰랑.
빼낸 수통을 흔들었다. 물의 양을 가늠했다. 반쯤 차 있다.
- 끼리릭.
수통의 뚜껑을 열었다. 열린 수통을 바닥 한 켠에 놓아두었다. 빗물이 차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수통을 보며 루비아가 묻는다.
“해골도 물을 마시나요?”
“안 마시지. 당신이 마실 거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물을 받고 있으시네요.”
“물은 비가 올 때 받아야 하지 않겠소? 이제 내가 좀 물어 봅시다. 어쩌다 나를 일으킨 거요?”
루비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끼어들면 가장 좋은 부분을 놓치는 법이다.
루비아의 아버지.
그는 에라스트 영지의 전前 영주.
레이 백작이었다.
루비아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백작이 업무를 볼 동안 루비아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의 도서관에서 파묻혀 보냈다.
사령 술에 관한 책, 아니 원고를 발견한 건 우연.
성의 장서는 수천 권에 달했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영주의 장서 관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 그 가운데는 아무리 지루해도 읽지 않을 만한 책도 많았다.
루비아의 생각에는 그런 책이 백 권은 족히 넘었다.<세이론 1세로부터 현 황제까지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루비아는 묘한 집착이 있었다. 도서관 안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말겠다는 집착.
루비아는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어 내겠다는 우스꽝스러운 편 집중으로 그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그리곤 안에 숨겨진 사령술에 관한 원고를 발견해 버렸다.
사령술이 기록된 원고.
서간집까지 기록된 장서 목록에도 그 원고는 없었다. 루비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루비아가 있는 영지는 당연히 제국 소속이다. 제국은 흑마법과 사령 술을 철저히 금지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적으로는 느슨한 성격이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정직했다.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발견된 원고를 상부에 보고할 것이다. 절차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열아흡 살의 루비아는 생각했다.
‘이런 문서를 공식적으로 드러냈다간. 아버지가 곤란해질지도 몰라.’
사령술이라는 원고의 진위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물론 그녀 멋대로의 생각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이런 걸 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꼭 보고 싶그런 게 열아홉이라는 나이.
‘없었던 것처럼 가져가는 거야.’
루비아는 원고를 슬쩍 품에 숨겨놓았다. 누가 홈쳐 갈까 불안해서 품에 꿰매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죠. 그러던 어느 날, 새 황제가 즉위했어요.”
얌전히 듣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겠군.”
루비아가 화들짝 놀랐다.
축축히 젖어 있던 머리에서 빗물이 사방으로 흩뿌려 진다.
몸이 움찔한 탓.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 일 안 하는 것 같이 빈둥거리고 있어도, 사실 누가 통치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에게 굉장해 중요한 것 같더군.”
해골은 아는 척 이야기했다.
‘일반론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미 들은 이야기가 있다.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한다.
약 1년 후.
대륙에 벌어지는 전쟁.
을해 즉위한 제국 황제.
그는 자유 연합에 대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9년.’
그리고, 무려 9년에 걸친 처절한 전쟁이 벌어진다.
해골은 확인차 물었다.
“지금 황제는 전쟁 파인가?”
“와.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세요?”
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놀라는 기색이 느껴진다.
‘너무 다 아는 티를 냈나.’
루비아가 크게 놀란다.
“마, 맞아요. 확실히 짚고 계시네요. 어떻게 그런 걸.
- 띠링!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루비아는 당신이 특별한 해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칭호: ‘특별한 서 번트’를 획득합니다.]
[마스터를 위해 싸울 때 전투력이20% 증가합니다.]
서번 트라고?
이런 게 있었나 싶다.
‘이 여자가 내 마스터라니.
괜히 서큐버스님에게 죄송해 진다.
하지만 지금 나를 깨운 것은 그녀.
그렇게 인식되어도 할 말은 없다.
전투력 20% 증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그녀의 활용도는 꽤 커질 것이다. 어떻게든,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여자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루비아는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예요.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요. 계속 안 좋은 일을 일으켰죠. 징집과 군사 훈련이 대폭 늘어났어요. 호전적인 자들에게 작위를 부여하기 시작했구요.”
설명이 이어졌다.
작위에는 많은 경우, 그에 걸맞은 영지가 따라 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작위만 가진 그들은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위를 갖게 되면 영지를 탐내는 게 인간이고, 언제든 다른 사람이 가진 영지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으니까.
각지의 영주들은 물론 반발했다.
루비아의 아버지, 레이 백작도 마찬가지 였다.
제국령 내의 세력들은 같은 화폐단위를 쓰지만, 사실 지방 자치에 가깝다.
황제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황제의 행동은 얼핏 무모해 보였다. 정작 황실이 쓸 수 있는 군사력은 많지 않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부터, 황제의 뜻에 반하는 영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자신의 성에 던져졌다. 루비아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였다.
칼로 난자된 레이 백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루비아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영주의 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원인은 몰라요. 검주劍主들이 움직였다느니, 아쥬라의 마법사들 이움직였다느니 소문만 많죠.”
그리고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긴 뒤,
루비아는 이곳에 와 있다.
“작위는 삼촌이 차지했어요. 인신매매 혐의로, 10년 형을 받아 구금되어 있던 최악의 남자죠.”
- 툭.
그때. 나는 망치잡이의 품에서 두 개의 중서를 발견했다.
루비아가 물었다.
“그건 뭔가요?”
“용병 신분증 같은데. 커다랗군.”
일단 앞면을 확인했다.
<벤슨 프레쳐>
클래스: 근접발급: 1143. 7.
랭크: D파이론 용병 조합.
신분증은 이렇게 간단히만 쓰여 있었다. 뒷면은 백지.
루비아에게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1147년 1월 20일이에요.”
4년 전 발행이라.’
용병 조합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확인하고 챙겼다. 망치의 품에는 또한 장의 신분증이 있다.
그 신분증은. 뭔가 달랐다.
‘정밀 초상화라.’
붉은색 신분증.
그곳에는 망치 잡이 밴슨 프레쳐의 정밀한 초상이 그려 져 있다.
‘이름은 없고.’
프레쳐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다.
신분증 아래에는 [네크론 신 사회]
라고 적혀 있었다.
‘신사회라고?’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신사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다.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일단 두 장을 모두 품에 넣었다.
그 순간.
- 띠링!
[퀘스트 - 네크론 신사회의 정체를 알아내십시오.]
[퀘스트 - 파이론 용병 단에 찾아가 보십시오.]
망치잡이의 신분증을 품에 넣는 순간 허공에 뜨는 창.
그리고.
결코 흘려 넘기기 어려운 단어.
‘퀘스트라고?’
퀘스트. 익숙한 단어다.
익숙한 만큼이나-
두렵고 끔찍한 단어.
‘용사들에게 자주 들었지.’
마왕을 처치하고, 던전을 유린하는 용사들.
그들은 퀘스트라는 단어를 종종 쓰곤 했다.
‘퀘스트 성공’이라거나.
‘퀘스트 실패’같은 단어들.
‘해골병사 다섯 명 처리라니, 너무 쉬운 퀘스트잖아?’
‘서큐버스 따먹는 퀘스트만 계속하고 싶은데.’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용사들 전용의 임무라는 뜻으로 추정 된다.
‘그런데 나한테 퀘스트를 하라고?’
나는 지금까지 퀘스트의 주체가 되어 본 적이 없다.
항상 퀘스트의 대상만 되어 왔을 뿐이다.
부서지고, 밟히고, 치워졌다.
여러모로 초유의 상황.
퀘스트 운운하는 것 외에도,
알 수 없는 창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있다.
가만히 짐작해 보던 나는 두 가지결론 중 하나를 택하기로 했다.
‘하나는 내가 미쳤다는 거겠지.’
그리고 다른 하나의 가능성.
용사에게 적용되어야 할 무언가가 엉뚱하게도, 해골병사인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
일단 퀘스트 운운하는 창을 아래로 치워 두었다.
- 깜빡.
창은 오른쪽 아래에서 잠시 점멸하다 꺼져 버렸다.
‘무시해도 되는 건가 보군.’
네크론 신사회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든, 파이론 용병 조합에 찾아가는 것이든,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으음.’
시체를 더 뒤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신분증을 마지막으로, 이 벤슨 프레쳐라는 놈에게 얻어 낼 수 있는건 대충 다 얻어 낸 것 같다.
이런 저런 짐을 프레쳐가 걸치고 있던 겉옷에 감쌌다.
들고 움직이려 하니 루비아가 말을 걸었다.
“제가 챙길게요!”
“괜찮은데.
“들고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루비아는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그러면 뭐.”
짐을 건넸다.
이어 석궁에게 가서 시체를 뒤졌다.
석궁 역시 파이론 용병단원.
E급 용병이었다. 망치보다 한 랭크가 낮다.
석궁의 시체.
거기에서도, 네크론 신사회에서 발행한 카드가 나왔다. 카드는 은은한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법?’
“그 카드, 뭘까요?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네요.”
옆으로 다가온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붉은빛이 눈에 띈 모양이다.
“내 생각도 그렇소. 일단 알아봐야겠지.”
“그렇죠.
석궁잡이의 시체를 계속 뒤졌다.
‘이건 뭐지?’
놈의 품에서 두꺼운 수첩을 발견했다.
‘빽빽한데.’
열어 본 수첩.
그곳엔 페이지마다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페이지마다 왼쪽 상단에는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옆에는 A, B 같은 등급과 함께 가격이 적혀 있었다.
‘레나, A등급, 10세이론.
옆에는 이름/등급/가격이 기본으로 적혀 있다.
아래에는 뭘 했느니, 뭘 했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중간 중간 적혀 있었다. 어디를 개발했다느니, 어떻게 조교했다느니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인간의 풍속에 대해서 알고 있다. 전화가 휩쓴 인간의 마을도 많이 다녀 보았다.
인간 수컷이 암컷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싶어 하는지는 익숙하다.
무슨 의미로 그런 단어를 쓰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첩을 바라보며 소리친다.
“노예 장부잖아요!”
“그렇겠지. 잡혔다면 당신도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겠지.”
혹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고문당하다가 그대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루비아를 올려다봤다.
안색이 변하지 않는다.
몸을 더 떨지도 않는다.
이미 추위로 얼굴은 더없이 새파래진 데다, 비를 맞아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나치게 무신경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다.
배려가 필요하다.
“어쨌건 비부터 피합시다. 아는 동굴이 있으니 따라오시오.”
“노예 상인들이 왜 저를 쫓아왔을까요?”
“왜는 쉽지 않소. 왜가 아니라 어떻게 따라왔는지 알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