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2화 (12/458)

12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2)

“기억은 없소만. 당신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남자에 가깝지 않을까?”

“왜죠?”

“1인칭 단수가 나에겐 자연스럽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잠시 달그락거리며, 키득거리며 작게 웃었다.

“자신에 대해 어떤 게 궁금해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여자는 어쨌건 나를 무덤에서 일으킨 여자.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해 지기로 했다.

“시간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말이오. 이런 걸 어디 물어봐야 하나?”

“시간이. 반복된다고요?”

루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놀라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소. 죽고 나면 다시 무덤에서 일어났을 때로 돌아가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음, 그러면.

루비아가 가만히 고민했다.

‘안 놀라나?’

의외로 잠잠한 반응이 놀라웠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혹시 아쥬라의 탑을 아세요?”

“알지.”

“거기라도 가서 물어 보는 건 어떨까요? 너무 먼가?”

루비아가 제안을 했다.

“멀기는 확실히 멀지.”

“음,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라고?”

나는 귀를 기울였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라는 책이 있어요. 저자는 무기명으로 되어 있는 소설이었는데. 드래곤이 만든 시간 함정에 갇힌 마법사의 이야기였어요.”

맥이 탁 풀렸다.

“드래곤 같은 건 확실히 없으니 그건 그냥 소설이겠군.”

“어. 확실히 없나요?”

“확실히 없지.”

그랬다. 20년 후에도 드래곤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10년 후 16마왕이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처참하게 밟힌다.

마법사에게, 검주劍主들에게.

무엇보다 각지에서 나타나는 용사들에게.

“그런가요.

루비아는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래도, 아쥬라의 탑은 뭔가 알려주지 않을까요?”

“글쎄.

우리는 아쥬라의 탑에 대해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을 털어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자들.

아쥬라의 마법사.

눈보라가 치는 북방. 아쥬라의 탑.

그곳에 살기에 그들을 아쥬라의 마법사라고 한다.

보통 마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있다.

만다라, 시약, 스크롤, 트리거.

마법의 네 가지 요소.

정성껏 그린 만다라 위에서,

시약을 삼킨 마법사가 트리 거를 말하며-

스크롤을 찢는다.

그렇게 발동되는 게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 네 가지가 없어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아쥬라의 마법사들이다.

그들은 느긋하게 걸어 다니면서도 땅을 얼릴 수 있다. 불꽃을 일으키고 바람을 바꿀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아쥬라의 마법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마법사>라고 부른다.

‘아쥬라의 탑’이라는 용어도 쓰지 않는다.

대신<탑>이라는 용어를 쓴다.

<마법사>들은 그 네이멍이 거만하다는 인식조차 없다.

<탑>은 제국 영토 내에 있다.

그러나 제국 법을 적용할 수 없는 성역.

<탑>에 이름만 올린 자들까지 모두 합해도 그 숫자는 고작 이백 명에 불과하다.

“실제로 거주하는 자들은 많아야 쉰 명 정도라던데요?”

그렇다.

쉰 명으로, 평방 35.4킬로미터의 영토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개개인의 권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비와 기적에 관해서라면 그들을 배제하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멀어서요? 하긴 끝에서 끝이긴 하네요.”

“그거 말고도. 여기서 거기까지 아무 일 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해도 문제야.”

“혹시.

“그래. 아쥬라의 탑은 사령술과 흑마 법을 배척하지. 날 보면 단번에 소멸시켜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라던데. 정말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지.”

만에 하나.

루비아의 말대로, 내 상담을 몰래 받아 주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은 오히려 더 위험하다.

가장 독선적이고 미친 자들이니까.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자신의 호기심을 푸는 게 더 중요한 자들이다.

가서 상담 같은 걸 했다간.

눈을 빛내며 마법 감옥에 가둘 것이다. 아쥬라의 마법사가 만드는<스펠 홀드>.

그곳을 빠져 나가는 건 고위 마족도 어려운 일이다. 나 같은 해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영원히 감옥 안에서 달그락거리며,

벗어나지 못하는 실험 체가 될지도 모른다. 고개를 젓는 내게 루비아가 제안했다.

“일단. 옷부터 살까요?”

“옷이라니?”

“갑옷이요. 이 상태로 도시에는 못 들어갈 것 같아서요. 길을 가기도 좀 곤란할지 모르고.

루비아의 말에, 나는 경추를 달그락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다.

갑옷이 필요하다.

장갑과 투구까지 모두 갖춘 풀 플레이트를 입어야 한다.

방어용은 아니다.

은폐가 필요하다.

산속으로만 숨어 다닌다고 해도,

인간은 언제든 마주칠 수 있다. 나는 해골병사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간 무조건 공격을 받게 된다.

함부로 걸어 다닐 수조차 없다. 수풀 사이를 기어가기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동부 산맥이나 서부 사막이면 좀 덜하겠지만, 이곳은 제국 남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는 특히 더 드문 곳이다.

던전들 역시 꾸준히 약탈을 당하는 건 마찬가지.

얼마 안 되는 마물들은 던전 안에 박혀서, 인간의 방문을 두려움과 함께 기다린다.

나는 여자에게 제안했다.

“그럼 그라스미어로 갑시다.”

“그라 스미어요? 아.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라스미어를 아셨어요?”

“글쎄. 여기저기서 들었지.”

여기저기는 아니었다. 모두 서큐버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여기저기요?”

“누군가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책을 읽어 준다면, 해골병사도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겠지.”

“.네?”

그녀가 보기에 나는 갓 무덤에서 일어난 해골이다. 벙벙한 기색이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공유하고 싶지 않다. 혼자서 잠기고 싶은 추억이다.

함께 나누며 통해 의미를 쌓아 가는 것도 많다.

하지만 서큐버스님과의 기억은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화제를 대장간의 도시로 돌렸다.

“그라스미어는 남부에서도 가장 뜨거운 도시라더군. 지정학적 이유는 아니지.”

“대장간들 때문이었죠?”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빼곡하게 늘어선 대장간들이 후끈한 열기를 뿜어 댄다고 한다.

“그렇지.”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성문을 열면 정말 대장간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을까요? 불편한 위치에 있지만, 상인들이 반드시 한 번은 들를 만큼 품질이 좋다던데.”

“우락부락한 대장장이들이 골목마다 늘어서 가게를 차리고 있으니,

별도로 치안 병력을 운영할 필요도 없다더군.”

“기왕 갑옷을 살 거면 역시 그런 곳에서 사는 게 좋겠죠!”

“그래 주면 고맙지. 어쨌던 그라스미어로 갑시다.”

나는 동굴을 걸어갔다. 루비아는 잠시 말없이 따라오다 물었다.

“갑옷을 구한 뒤엔 어디로 가실 생각인가요?”

“글쎄. 만날 사람이 있긴 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편이 알아듣기 쉬울 테니까.

“만날 사람이요?”

“하지만 만나려면 한참 남았지. 딱히 갈 만한 곳은 없소.”

“갈 만한 곳이 없다니, 그건 저랑 비슷하네요.

루비아가 푸념했다. 그 말에 동의해야 할지 조금 고민하면서, 그녀와 발을 맞춰 동굴을 걸었다.

종유석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나와 여자의 발소리가 동굴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서큐버스님을 다시 만난다면.

과거에는 없었던 선택지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분을 만날 때까지 투쟁해야 한다. 인간의 침해를 받지 않는, 내 영역을 구축할 정도가 되려면.

타자의 침해에서 자유로 우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걸까?

얼마나.

“어떻게 이렇게 잘 가세요? 여기가 거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은데 그녀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루비아가 곁에서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글쎄. 그냥?”

동굴은 아득한 세월로 빚어 졌다.

작은 것들의 인지와 시간을 아득히 초월해 있다.

“미로 같은데요. 아니, 이런 미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가?”

나는 별 대꾸 없이 계속 걸었다.

“넓고 촘촘해요. 동굴에 관한 책들도 꽤 읽어 봤는데,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거죠? 갈래길이 끝도 없네요.”

루비아는 옆에서 계속 조잘댄다.

“정말.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가시는 거예요? 우와. 신기해요.”

- 띠링!

[루비아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루비아는 당신이 길을 신기할 정도로 잘 찾는 대단한 해골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번트 시스템: 마스터에게 ‘길을 굉장히 잘 찾는다.’라고 생각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칭호: ‘패스파인더’를 획득합니다.]

[마스터와 함께 이동할 때 시야가10% 증가 합니다.]

‘또 이게 나오는군.’

동시에, 무언가 조금 멀리까지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번트 시스템이라는 것.

두 번째 등장이다.

‘서큐버스님과 함께일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잘 지켜 줄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건, 지금은 이 루비아라는 여자를 돌봐 줄 필요가 있다.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6 힘-5 민첩-6 지혜-12]

[호감도: 9]

- 루비아는 자신이 깨운 해골에게 약간의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활약을 보며 신뢰가 싹트고 있습니다.

[기본 스킬]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특전]

-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的히-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호감도가 6 올랐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호감도가 알아서 잘 오르는 여자였다. 물론 거기에 불만은 전혀 없다.

하지만 아직 기본 스킨과 특전, 칭호 등은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정말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가시는 거예요? 와.

루비아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거의 길이 나뉠 때마다, 내가 길을 선택할 때마다 감명을 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신기한가?”

“저는 길을 정말 못 찾거든요.”

그녀가 잘 쫓아오도록 간격을 유지해 주며 계속 걸었다.

“이런 동굴은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산 안에 이렇게 복잡하고 긴 동굴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가.”

중간 중간 재잘거리는 그녀에게 별대 답도 않고 걸어갔다.

두 시간 정도를 걷자 반대편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반대쪽 동굴 입구 역시 수풀에 가려져 있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위치 였다.

- 꾸꾸꾸 꾸꾸꾸.!

- 뀨뀨뀨뀨!

- 삐꾹! 삐꾹!

- 쀼. 쀼쀼! 쀼. 쀼쀼!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산새 소리가 요란했다.

‘날씨가 무색하게 울어 대는군.’

그 울음 사이로, 이젠 낯익은 효과음이 끼어들었다.

- 띠링!

하지만 그 아래로 펼쳐지는 글자들은 또 새로운 것이었다.

[C더블 플러스급 미로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Exp 플러스15,000]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미로를 클리어 했습니다.]

[경험치가 추가로 100% 더 주어집니다.]

[Exp 플러스15,000]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응?’

미로라고?

별생각 없이 갔다. 동굴을 한 번 지나가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다 아는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걷는다고 경험치를 주나.

‘하나, 둘, 셋. 아홉, 열.’

레벨이 10이나 오르다니.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곰곰이 처음 동굴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동굴 안에서 밤낮은 알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시간의 흐름은 느껴졌다. 이 동굴 안에서 3년 정도는 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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