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삶에서 깨어나는 것 (13)
갈 곳이 없었으므로, 그저 동굴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3년을 달그락거렸다.
‘그게 도움이 된 건가.’
생각해 보면, 들어가서 처음 출구를 찾는 데만도 1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어차피 갈 곳이 없었으니까. 먹을 필요도 햇빛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여 동굴 안에서 헤맨다는 느낌도 없이 지냈다.
천장의 미묘한 기울어짐, 종유석의 모양과 벽의 결들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하긴.,
그런 것들을 모두 알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 갈 것 같기는 하다.
이 동굴에는 동물들도 오지 않는다. 박쥐조차 없다. 여기 들어오면 죽는 걸 알고 있는 거다.
‘으음.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6(57)]
[체력-29 힘-26 민첩-22 지혜-9]
[잔여 포인트: 10]
‘이거 참.’
나는 ‘잔여 포인트 10’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괘, 괜찮으세요?”
루비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괜찮지.”
아주 괜찮다. 사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레벨 업을 하면 기본적으로 상당한 쾌감이 주어진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궜다가,
차갑게 식힌 냉탕에 몸을 담글 때와 같은 기분이다.
몸 전체에 톡 쏘는 상쾌한 향이 맴도는 듯한 기분.
지금은 한 번에 10이 올랐다. 뼈마디 구석구석으로 쾌락이 흐른다. 잠시 그 기분을 즐겼다.
가만히 서 있었다. 루비아의 시선이 느껴진다.
“잠깐만 기다려 줘.”
“아, 맵!”
루비아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새로 생긴 10포인트를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디 한군데 몰아 쓸까?
힘에 전부 투자할까. 민첩에?
체력이나 지혜는 아니다. 이미 체력은 꽤 높은 데다가, 지혜에는 써봤자 실용성이 떨어진다. 마법사가 될 것도 아니니까.
잠깐 고민하다 결국 민첩에 7, 힘에 3을 분배했다.
[힘이 올랐습니다.]
[힘이.]
[민첩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올랐습니다.]
[민첩이.]
세계가 점점 느리고 또렷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민첩 7의 효과는 굉장한 것 같다.
지금 당장 단검이라도 휘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이 옆에 있다.
허공에 칼질을 하는 모습은 좀 우스광스러울 거다.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없음]
[해골병사 Lv. 16(57)]
[체력-29 힘-30 민첩-32 지혜-9]
이제 체력, 힘, 민첩이 모두 29 이상으로 올랐다.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군.’
망치와 석궁을 처치하는 데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벌였다.
하지만 다시 마주치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민첩을 올리면 적의 공격은 피해내고, 내 공격은 명중시키기 쉬워 진다. 힘도 올렸다. 더 강하게 한 방한 방을 먹여 준다.
물론 생각만 그렇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사실 스킬이 문제일 거다.
순수한 힘이나 민첩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놈들이 가진<스킬>이 나와 전력의 차이를 만든다.
‘나도 스킬을 익혀야 할 텐데.’
상태창을 손으로 끌어 치워 버렸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루비아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말했다.
“가지.”
“그럴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흐어으. 흐이으어.
“일단 짐말부터 사야겠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지쳐서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간신히 한 발 한 발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얼굴을 들어 나를 보고 웃었다.
기운이 남아 있는 척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애잔했다. 그녀는 간밤에 나름대로 고초를 겪었다.
게다가, 동굴에서 두 시간이나 걸었다. 힘든 건 당연하다.
레벨 1의 인간 여자. 체력 따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수치만 봐도 나보다 네 배는 약하다.
그녀가 헉헉대며 걸어간다.
업고 가기라도 해야 할까. 짐은 이미 전부 내가 들고 있다.
좀 거추장스러운 여자다. 지금이라도 그냥 버리고 갈까?
늑대의 먹이가 되건, 설원 트롤에게 몸이 찢겨지건 그냥 나는 내 갈길을 가는 거다.
어차피 트롤이 나오면, 지켜 줄 수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라고 딱히 목적지가 있는건 아니다. 이 여자와 크게 처지가 다르지 않다.
여기서 루비아를 버리고 가고 싶지는 않다.
딱히 도의적인 차원은 아니다.
이 여자는 이용 가치가 넘쳐난다.
일단 나에게 갑옷을 사 줘야 한다.
그 밖에도 인간에게 돈을 획득하게 된다면, 무언가를 구매해 줄자가 필요 하다.
해골이 거래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 세계는 인간의 것이고, 나는 그들과의 고리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꼭 이 여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스탯과 스킬 아래.
거기에<서번트 시스템>이라는 항목이 새로 생겼다.
[서번트 시스템]
[명명命名: ‘패스파인더’]
[마스터와 함께 이동할 때 시야가10% 증가합니다.]
[사념 思念: ‘특별한 서번트.’]
[마스터를 위해 싸울 때 전투력이20% 증가 합니다.]
서큐버스님과 함께했을 때도 나오지 않던 것들이다.
처음 보는 것들이다.
부여되는 효과는 놀라울 정도.
여기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 루비아라는 여자와 함께할 필요가 있다.
나를 무덤에서 일으킨 자에게만 적용되는 걸까?
앞을 바라본다.
시야 10% 증가.
그 효과는 제법 컸다. 멀리까지 보일 뿐 아니라, 시야가 자체가 넓어진 신기한 느낌이었다.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발을 내디디며 걷는다.
- 뽀드득.
세상을 다 쓸어버릴 것처럼 비가 내렸는데, 동굴을 나오니 완전히 그쳐 있었다.
지금은 눈발이 날린다. 헛헛하게 마른 겨울 나뭇가지 위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성긴 눈발은 가늘었다. 하지만 비가 그친 뒤 밤새 쌓였는지, 벌써 바닥이 뽀득거릴 정도다.
눈은 싫어하지 않는다. 눈은 가볍다. 부드럽다. 날리는 눈발을 보며 가만히 걷는다.
눈바람에 실려 꽃향기가 났다.
‘어디서 오는 걸까.’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문득 뒤까지 돌아본다.
남겨 지는 발자국이 보인다. 눈이 반갑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음.’
- 삐뀨뀨뀨!
- 과끅! 과곡!
“겨, 겨울에도. 산새들이 우네요. 듣기 좋다.
루비아가 옆에서 말한다. 겨울에 산새가 울던가? 사실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적당히 대꾸했다.
“밖으로 잘 안 다니는 성격인가?”
“책 읽는 게 제일 재미. 우읍!”
고개를 끄덕이던 루비아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뭐가 나오진 않는다. 하지만 땅을 짚고 괴로워한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지나친 강행군이지 싶다.
“잠깐 쉬지.”
“하, 하아.
- 털썩.
루비아가 나무 아래에 주저앉는다.
나도 근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1월 20일은 정말 신비로운 날이에요.”
루비아가 엉뚱한 말을 뱉어 냈다.
1월 20일은 어제다. 그녀가 어제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왜 그렇소?”
“그날 13시에서 18시 사이에 꺾은사르디아는 특별한 효능을 발휘한대요.<우연한 효능>을요.”
사르디아가 꽃이라는 사실은 알고있다. 겨울에 눈을 뚫고 혼자 붉게 피는 꽃이던가.
루비아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시약으로 쓰면, 마지막까지 무슨 효과가 나을지 모르는 거죠. 써 보고 나서도 잘 모를 때가 있대요. 그리고 그날 밤, 침실에서 효과를 알아차린다든가.
-딱딱.
나는 가볍게 이를 부딪쳤다. 이건 인간의 헛기침과 비슷한 행위다.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네? 뭘 상상하신 거예요? 좋은 꿈을 꾸는 효과를 말한 건데.”
- 딱.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해골을 놀릴 줄도 아는 여자로군.
“게다가, 1월 20일은 날씨가 항상 전날과 달라요. 그 다음 날과도 다르죠. 혼자 돋보여요.”
“날씨가 다르다고?”
“맑다가 눈이 오고, 눈이 오다가 맑고, 비가 오다가 눈이 오죠.”
“올해는 비가 왔으니. 전날에는 눈이 왔나?”
“맞아요. 눈이에요. 폭우가 쏟아졌죠? 1월 20일이 지난 후에는 다시 밤새 눈이 왔고요.”
‘그럴듯한데.’
1월 20일이 그런 날이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서큐버스님이나, 다른 인간에게도 들은 기억은 없는 듯하다.
“그걸 관측한 지 얼마나 됐는데?”
15년 전부터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오늘은 말하는 해골이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잖아요!”
루비아가 내 팔뼈를 꼭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전해 졌다.
닿았을 때 내가 느끼는 따듯함. 그만큼 여자에겐 차가움이 전해질 것이다.
따듯한 피가 흐르는 자들은, 추우면 서로에게 다가간다.
거리를 좁힌다. 손을 잡고 안는다.
그렇게 서로 추위를 이겨 낸다.
그러나 나는 피도 온기도 없다. 상대의 온기만 빼앗아 가는 해골에 불과하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내 팔에서 떼어 냈다. 그녀가 가진 온기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흐응. 매정하네요.”
루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으로 조금 걸어가더니 눈 속에 푹 얼굴을 묻는다.
“어라.”
작은 감탄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엔 붉은 꽃이 있었다.
루비아가 방금 이야기했던 1월의사르디아다. 그녀가 천천히 그 주위에 손을 가져간다.
‘꺾으려나.’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1월 21일이다.
20일은 이미 지났다.
시약으로 쓰기 위해 꺾는다면 아쉽게 하루를 지나친 셈.
- 달그락.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다.
루비아를 방치하고 나뭇등걸에 몸을 기댔다.
멍하니 있자니 루비아가 슬그머니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텅 빈 눈구멍에.
“압 r뭉친 눈을 던져 넣었다.
- 적!
가볍게 뭉쳐진 눈 덩어리가 후두골 안쪽에 맞았다.
경추 사이사이로 새하얀 눈이 가루가 되어 흩졌다.
하지만 아직도 두개골 안쪽에 눈 덩어리가 제법 남아 있었다.
‘헤헤. 차가워요? 내가 이겼죠?”
나는 고개를 돌려 루비아를 무시했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다 쉬었으면 일어납시다.”
“으.”
매몰차게 굴 생각은 없다.
그저 걱정이 될 뿐.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산길. 치워지지 않은 눈 위에 적나라하게 발자국이 찍힌다.
동굴의 두 출입구.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은 서로 전혀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흔적이 너무 적나라하게 남고 있다.
석궁과 망치는 죽였다.
무덤에 던져 주고 관으로 덮었다.
하지만 추격이 여기서 끝나리라는 가정은 너무 낙관적이다.
동료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루비아의 삼촌. 새 영주 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처음 보낸 두 놈이 루비아의 시체를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두 녀석이 시체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영주는 훨씬 많은, 혹은 더 위험한 녀석을 보낼‘필요하다면 그렇겠지.’
솔직히 그저 전 영주의 딸에 불과한 이 여자에게 무슨 구체적인 가치가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인간의 권력 싸움이다. 내가 모를 이런저런 사정이 얽혀 있을 거다.
루비아라는 이 여자가,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캐어물을 생각은 없다. 관심도 없다.
‘어쨌건 서둘러야겠지.’
루비아가 내게 말한다.
“으. 기분 상했으면 미안해요.”
“어“뭐가?”
“그, 눈을 던진 거요.”
발자국 생각을 하느라 그건 이미 잊고 있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건 아니오. 피곤이 안 풀렸으면 좀 더 쉬어도 좋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을 던진 손에는 꽃이 남아 있었다.
“이젠 꽃이 쓸모가 없는 건가?”
“아니요! 쓸모없는 꽃은 없어요.
이렇게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여자가 가까이 다가온다.
내 머리에 손을 댄다.
힘으로 공격하려는 건가 싶었을 때, 그녀가 두개골의 작은 틈에 붉은 꽃을 꽂는다.
- 툭툭.
그리고 눈으로 덮어 단단히 고정시킨다.
“좋은데요? 해 보길 잘했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낙인 같은 건가?”
“네?”
그녀가 크게 웃었다. 웃는 의미를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도 웃었다.
뭔가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걸 따라해 보면 혹시 그 의미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모험은 성공했다. 조금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