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1)
눈은 차가웠다.
길은 험하고 좁았다.
곳곳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부리들이 많다. 발끝에 걸리는 몇 개의 돌부리를 확인하며 말했다.
“발밑을 조심하시오.”
- 퍽!
그 말을 하자마자, 루비아가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 달그락!
나는 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 줬다. 조금 더 일찍 말해야 했나?
갑작스레 넘어지는 모습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괜찮소?”
“아아.
탄식을 뱉은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 월 하는 걸까요? 웃기려고 한 짓은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 그런 거 싫어해요. 누가 웃기려고 작정하면 저부터 안 웃는단 말이에요“알고 있소. 천천히 물도 좀 마시면서 걷지.”
나는 수통을 건넸다.
약한 숨을 내쉬며, 그녀가 작은 입에 물을 담는다.
벌어지는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꿀꺽, 하고 그녀가 입안 가득 머금었던 물을 삼켰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낮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조금씩 어둡게 채색되며 온도를 낮출 것이다. 조금만 더 걷고 쉴곳을 찾아야 한다.
“험할 거요.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을 피하려고 택한 길이니까.”
“괜찮아요. 다 들어 주시고, 계속 부축해 주시잖아요. 갈 만한데요?”
우리는 높은 곳을 통해서 그라스미어를 향해 가고 있다. 인간들을 조우하지 않기 위해서다.
추가 추격자를 염려한 내 제안이었고 루비아는 승낙했다.
고도가 높다. 험하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
“갈까요?”
“충분히 쉬고 갑시다.”
그때 였다.
- 크르릉.
앞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몸을 긴장했다.
늑대 울음소리다. 바로 그쪽을 바라봤다. 거기엔 작은 새끼 늑대 한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새하얗군.’
눈처럼 새하얀 털의 늑대였다. 눈과 비슷한 색의 털 때문에, 무심코지나친다면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늑대는 한쪽 앞발을 쭉 뻗은 채 눈 위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 발끝을 따라가 보니, 거기엔 시커먼 덫이 닫혀 있었다.
작은 늑대가 가파르게 숨을 쉰다.
허파 부분이 빠르게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한다. 늑대는 제 발목을 향해 제대로 나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 발목을 깨물려는 건가?’
- 달그락.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늑대가 나를 바라봤다. 늑대는 몹시 아름다웠다.
궁금했다. 저 늑대는 제 발목을 결국 끊어 낼까. 그럴 수 있을까.
“엇, 새끼 늑대네요.!”
루비아가 뒤늦게 늑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신경 쓰이나?”
“신경. 쓰여요.”
“구해 줄까?”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걱정스러운 둣이 말했다.
“위험할 텐데. 나무판 같은 걸 찾아볼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그런 건 필요 없다. 저런 늑대는 나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초조한 표정의 루비아를 가만히 있으라고 해 둔 뒤, 조심스럽게 녀석에게 다가갔다.
“크르르!”
해치러 온 줄 아는 걸까.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한쪽발이 D자로 된 덫에 걸린 터라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덫은 바닥에 쇠말뚝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새끼 늑대는 뒷발을 세워 보고, 다른 쪽 앞발로 땅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크앙! 크아앙!”
세 발로 땅을 디딘 채 몸을 뒤로 당겼다. 고개까지 젖힌 채 덫에 걸린 앞발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애쓰는군.’
몸을 꺾어도 보고, 꼬리까지 힘을 줘 가며 하얀 새끼 늑대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덫이 달그락거리지만, 땅에 단단히 고정된 쇠말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 획!
나는 녀석에게 육포를 던져 줬다.
하지만 녀석은 받아먹지 않았다.
‘자존심인가?’
경계를 늦추라는 뜻이었는데 쉽지는 않다. 덫을 해체하러 내가 코앞까지 다가가자, 녀석은 이빨을 세우곤 내게 덤비기 시작했다.
“크르르! 크롱!”
눈 위를 뛰어 나를 세차게 깨물려 한다.
하지만 녀석의 몸은 작다. 입은 더욱 작고, 이빨이 아직 제대로 날카롭지 않은 늑대였다.
녀석이 내 몸 여기저기를 깨물어 온다. 물려 봤자 어차피 아프지도 않았다. 깨물 만한 살도 없다.
덫에 걸린 녀석이 움직이는 게 훨씬 더 아플 거다.
“크으응.
한참 내 몸 여기저기를 누르고 물다가, 지친 녀석이 결국 엎드린다.
앉아서 덫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꽉 물린 덫을 위로 확 젖혔다.
- 투둑!
덫이 풀렸다. 쭉 내밀고 있어야 했던 한쪽 발을 당긴다. 녀석이 순간적으로 몸을 세차게 웅크린다.
경련하듯 몸을 파르르 뒤튼다.
일어나 몸을 돌리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파앗 하고 뛰쳐나간다.
녀석이 눈 내린 산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이건 안 가져가나.”
나는 육포를 흔들고, 녀석이 사라진 숲 속을 향해 던졌다.
툭, 하고 육포가 떨어지는 소리는 났지만 거기 그대로였다.
“바라 파 울프네요. 새하얀 털에 저런 새파란 눈. 던진 먹이는 안 먹을 거예요. 자존심이 강해서.”
“그런 것도 다 책에서 읽은 건가?”
내 말에 루비아는 약간 부끄러워했다.
“그, 그래요! 하지만 정말 안 먹고 있잖아요?”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새끼 늑대의 호감도가 7 올랐습니다.]
숲 쪽을 돌아봤다. 바닥에 던진 육포가 사라져 있었다.
“먹는 것 같은데?”
“어, 먹네요! 잘됐다.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머릿속에 또 다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 왔기 때문이다.
[루비아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20을 넘었습니다. 상대의 간단한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루비아의 현재 심리를 읽으시겠습니까? Y/N]
‘언제 또 20을 넘었지?’
9까지는 확인했는데, 함께 걸어오면서 꾸준히 호감도가 오른 것 같았다.
보아하니 호감도 20은 제법 높은 수치인 둣.
그러나 나는 N을 선택했다.
동료의 마음을 멋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색한 상황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크릉! 크르롱!”
갑자기, 아까 구해 줬던 새끼 늑대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응? 이 아이가 왜 이러죠?”
“글쎄. 육포를 더 달라고 그러나.”
- 툭!
나는 육포를 하나 더 꺼내서 녀석 앞에 던져 주었다.
하지만 녀석은 육포는 본 척도 하지 않는다. 길 앞을 막고 크르릉, 크르릉 울부짖었다.
“왜 이러지. 어디 아픈 걸까요?”
루비아가 녀석에게 다가가 가만히 쓰다듬었다. 조금 놀랐지만, 녀석은 루비아를 깨물지 않았다.
다만 길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빨리 쉴 곳을 찾아야 해. 가자고.”
나는 계속 울부짖는 녀석을 억지로 떼어 놓고 길을 갔다.
잠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육포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으음. 앞에 뭐가 있나?’
새끼 늑대가, 우리에게 무언가 경고를 해 준 건지도 모른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와.”
주의 깊게 앞을 살피며 걸어갔다.
긴 나뭇가지를 하나 주웠다. 눈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넓게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걸었다.
“왜 그렇게 짖었을까요?”
“알기 전까지는 조심하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몇 그루와 연결된 덫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덫은 아주 컸다.
늑대나 여우처럼 작은 짐승을 위한 덫이 아니었다. 그런 하중은 무시하도록 설계된 것 같았다.
사람이나, 커다란 곰도 한 번에 낚아챌 수 있을 만큼 무척 강하게 설계된 덫이었다.
이 길을 지나가면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
“정지.”
손을 들었다.
루비아를 멈추게 했다. 나무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보이지 않게 설치된 철사를 전부 다 끊고 풀어냈다.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덫이 무력화됐다.
‘걸리면 꼼짝없이 당했겠군.’
늑대가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덫이다.
커다란 나무 몇 그루에 고정되어있는 데다가, 몸이 위로 튕겨져 그물에 매이도록 되어 있다.
힘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세다고 해도 빠져 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해 준 값은 단단히 한 늑대라고 생각했다.
이제 됐어, 라고 루비아에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직 가지 않은 길 쪽에서, 여러 인간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라 웅성대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피하자.”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풀에 숨어 인간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마주쳐서 좋을 일은 전혀 없다.
웅성대는 목소리는 금세 커졌다.
여섯 명의 인간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섯이라. 숨기를 잘했군.’
징 박힌 가죽 갑옷을 입은 녀석이 둘, 나머지는 크게 방어력이 없을 것 같은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세 놈은 방패와 한 손 무기, 세 놈은 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독특한 점이 있었다.
여섯 놈이 하나같이 여벌 무기로 창을 가지고 있다.
긴 장창이 아니라 모두 투창이었다. 던질 수 있는 투창을 등에 몇 자루 더 메고 있었다.
‘까다로운 적이군.’
싸운다고 해도, 루비아까지 지키기는 어려워 보였다. 활도 활이고, 놈들이 가진 투창을 던지면 어쩔 수없이 맞아서 죽어 버릴 테니까.
‘무슨 산적들이 투창을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거지.’
살이 메겨진 석궁을 조심스럽게 놈들에게 겨눴다.
숨기 전 발자국을 약간 흩트려 놓긴 했다. 하지만 숨어 있는 우리를 찾는 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기습으로 세 놈 정도는 먼저 처리하더라도, 녀석들이 루비아를 해치면 막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길도 일부러 인간을 피해서 조금 험한 길을 택한 거다.
‘인간은 정말 어디에나 있군.’
- 뽀득. 뽀드득.
남자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걸음이 제법 날렵하다. 산을 많이 타 본 녀석 같다.
‘싸워야 하나.’
발자국 정도는 금방 추적할 것 같았다. 혹시 추적자들이 벌써 따라붙은 걸까? 불안해하며 단검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경악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덫이, 덫이 망가졌어!”
“뭐야, 덫이 왜 이렇게 되어 있어?
어떤 놈이야?”
잔뜩 홍분한 목소리였다.
덫을 망가뜨린 자를 발견하면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거, 난데.’
인간들의 분노에는 묘한 감정이 하나 더 섞여 있었다.
공포였다.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어떤 미친놈이 여기까지 와서 덫을 망가뜨려 놓은 거야?”
“여기, 발자국이 있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망가진 덫을 보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능숙하게 발자국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나는 좀 이상한데?”
“쭉 이쪽으로 걸어왔나 보군. 이 근처에서 흩트리기를 했는데.
땅을 보고 중얼거린다.
왼손에 메이스를 들고, 오른손에 나무 방패를 든 녀석이 수풀 쪽으로 몸을 숙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공격해야 하나?’
아슬아슬하다. 곧 발각될 거다. 이한 놈을 죽이고, 투창을 뺏어서 던진다면.
‘아무래도 무리.’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답이 영 나오지 않았다.
“다들 여기로 와 봐.”
손에 메이스를 든 녀석이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동료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끝장이군.’
그때 였다.
- 크오오오오!
저 멀리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크오 오오!
울음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 쿵! 쿵! 쿵! 쿵!
무언가 지축을 울리며 뛰어온다.
무겁지만 빠르고, 날렵한 느낌의 울림이었다.
- 쿵! 쿵! 쿵!
“준비해!”
남자들은 일제히 등에 멘 투창을 꺼내 잡았다.
나름대로 자세가 숙련되어 있다.
자루 끝 창날이 날카로웠다.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