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7화 (17/458)

17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4)

“초대 황제 본인은 그 조치를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그럴 지도요. 뭐, 그래도 동상은 남지만 말이에요.”

세이론의 동상은 제국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영웅들은 쉽게 그런 비극에 처한다.

나는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지만 황제 본인도. 어디서 하나 떼서 클레멘스의 달이라고 붙여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달을 하나빼서, 현 황제의 달이라고 아예 하나 따로 정하는 게 평화로울지도 모르겠군. 이번에는 클레멘스, 다음에는 애슈턴.?”

내 말에 루비아는 킥킥 웃었다. 별로 우습다고 생각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 퍽!

웃던 그녀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갑작스런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 줬다.

‘달라졌군.’

예전에는 이때 넘어지지 않았다.

처음 그녀가 넘어졌던 때는 동굴 밖으로 나가서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런 대화를 그녀가 시도하지도 않았다.

칙령과 세이론에 대한 대화를.

몸도 마음도 경계가 상당히 풀린 게 확실했다. 뭔가 말하려고 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부러 넘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소.”

아마 밖에서 처음 넘어졌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루비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운지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화제를 돌렸다.

“전 사실 엠버 (Ember)에 가보고 싶었어요. 갑옷을 사고 나면, 같이 거기로 가 보지 않을래요?”

- 달그락.

새로운 화제였다.

루비아의 말에 나는 약간 동요했다. 경추를 덜컥거렸다.

엠버. 엠버메어. 왜 거기를 잊고 있었을까.

“왜 그렇게 놀라세요.? 뭐든 아시니까 그 도시도 잘 아시겠죠?”

루비아가 가볍게 물어 왔다.

‘‘아.!”

나는 잠깐 감탄했다. 중립도시 엠버메어 (Embermere). 거기에는 전설적인 네크로멘서가 있다.

‘그녀가, 올해 죽던가.’

물론 전해들은 이야기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라는 이름의 네크로멘서. 전설로 남은 그 네크로멘서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복 회귀.

이 현상의 해결에 대해.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루비아가 유쾌한 어조로 물어 온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네요. 으으음, 무정부주의자신가? 해골에겐 국가가 없으니 정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엠버로 가시는 게.”

그녀의 말대로다.

엠버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시.

<수천 개의 자치령>

그 별명이 엠버를 대표한다.

엠버는 아나키스트들의 도시다.

엠버의 인간들은 어떤 강제도 거부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다스린다. 한명 한 명의 인간, 개개인이 걸어 다니는 자치령이 된다.

나는 엠버에 가 본 적이 있다. 정상적인 출입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니다. 한 고위 마족의 군단병으로서사역당하며, 그곳을 침략했다.

그러나 그 엠버는 이미 죽어 있던 엠버였다. 젓더미와 시체밖에 남지 않은 도시.

하나하나의 ‘자치령’은 모두 숨이 끊어진 뒤였다. 나는 그 광경을 떠올리곤 쓸쓸해졌다.

루비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황제도 의회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신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었어요. 어떻게 두 세력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지.”

제국과 자유 연합은,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으로 연결된다. 중간 지점에서 배를 타고 올라가면 작은 섬이 나온다.

그곳이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시. 정치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엠버는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

“공화주의자들이 암암리에 엠버를 지원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소만.”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 버려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세요?”

나는 일개 해골병사.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그런 것까지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꽤 귀담아 듣는 편이었다.

의식이 있었으니까. 반쯤 불탄 책을 주워 읽기도 했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인간들.

그 깃발이 어느 것인지 알아볼 의식은 있었다. 전쟁터의 수많은 비명과 고함 속에는 지식이라 부를 만한 것도 종종 섞여 있었다.

“그냥 알지.”

“그냥이라구요? 혹시 세이론 1세의 유골 같은 건 아니겠죠?”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달그락거리며 대답했다.

“그런가? 아까 그 묘지, 제국 0묘역치고는 너무 관리가 안 되어 있던거 같은데.”

“뭐예요, 그 이상한 농담!”

“농담은 당신이 먼저 시작했지. 엠버에 가고 싶다는 게 사실이오?”

“네.”

“조사는 해 봤고?”

“글쎄요. 거기는 규칙이 하나밖에 없다던데요.<침해하지 않는다.>”

“맞소.”

루비아가 그 규칙을 비평했다.

“하지만 침해하지 말자, 해서 그런 게 될까요? 인간의 본성을 그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거리와 골목, 우물과 회벽 안쪽마다 시체가 즐비하지 않을까요?”

그리 새롭지는 않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견해였다.

엠버에 대한 비평은 그런 관점이 주류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견해가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엠버에 관해 내가 본 것은 멸망후의 잿더미뿐.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곳을 변호하고 싶어졌다.

“꼭 그럴까? 의외로 평화로운 도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가 본 것은 잿더미밖에 없다.

무너져 내려앉기 전에 무엇이었는지는 마음껏 추측할 수 있다.

그게 잿더미의 아름다운 점이다.

“이상주의자시네요. 가기 전에 내기라도 해 볼까요?”

“굳이 내기를 할 정도로 확신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갈비뼈?”

“아하하하.

루비아는 잠깐 쾌활하게 웃었다.

긴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엠버라면 좀 멀긴 하군.”

“멀어서. 가고 싶었어요”

굳이 따지자면 위험하다느니, 법도없는 곳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느니 하는 말을 해 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제 삼촌이란 자에게 추격당하는 신세다.

나는 ‘저번’을 생각했다.

첫날조차 루비아를 지켜 주지 못했던 때를 생각했다.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만, 추격자들은 그녀를 고문한다. 살해하거나,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어딘가로 팔아넘길 것이다.

어디가 위험하니 같은 말은 의미 가없었다. 여기에 멈춰 있는 게 그녀에겐 가장 위험하다.

“한 달 정도 걸리겠군.”

동굴을 걸어갔다.

루비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클레멘스 2세.

엠버메어.

호감도가 오르기 전의 루비아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서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였을 뿐.

호감도가 20이 되자 그녀는 황제의 지령을 품평했다.

엠버라는 도시에 가 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호감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꽤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내가 동굴을 헤쳐 나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좀더 격의 없이 감탄했다.

“마치 와 본 길 같아요!”

“와 본 길이오. 사실 나는 이 동굴반대편에 살던 사람이니까. 동굴을 걸어와서 묻혔다오.”

“어, 재미없는 농담이다!”

루비아는 해골을 앞에 두고 겁나지도 않는지 쿡쿡 웃고 있었다.

“동굴 진짜 복잡하다. 박쥐도 하나 없네요. 그런데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기하네요.”

그야 옳은 길로 가고 있으니까. 감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적당한 공터에서 멈춰 섰다. 사방이 비교적 트인 장소였다.

누울 자리를 깔았고,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고 잤다. 안심한 듯 잠드는 그녀를 바라봤다.

저번보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특전으로 호감도를 올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에서 나가자 눈이 내렸고, 산새가 울었다.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동굴을 나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미로 클리어.

C더블 플러스급 미로를 클리어 했다면서, 요란하게 울리던 말들.

한 번에 10씩 올라가던 레벨.

나도 모르게 그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망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한 번 지나간 건 안 주는 건가?’

솔직히 약간 아쉽기도 했다. 그만큼 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 별거 아니오.”

“뭔가 아쉬운 표정이신데.

눈치가 빠른 여자라고 생각했다.

호감도가 올라가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갑시다.”

태양력 1147년.

한 남자가 옛 사도들에 의해 고문용 장난감으로 사육 당하던 인간을 해방하고, 시공의 수정을 파괴해 유계와 현계의 연결 고리를 끊은 지천 년이 훌쩍 넘은 시기.

세이론이 죽은 승천의 달(11 월),

반反 제국 공화정이 세워진 자유의달(12월)을 넘어, 한겨울에 눈을 뚫고 오직 홀로 붉게 피는 꽃, 사르디아의 달 1월도 삼분의 일을 넘어21일 아침이 되었을 때.

한 해골과 초보 사령술사가 산길을 걸어갔다.

중립도시 엠버메어를 향해.

물론 엠버메어는 이곳에서 아직 한참.

농담으로라도 곧바로 엠버로 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도시에 들를 계획이다.

인간과 접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그라스미어는 안 가는 거예요?”

“갑옷은 거기서 사는 게 좋겠지.

하지만 당신은 중간에 여관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

루비아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눈 덮인 산을 걸어갔다.

사르디를 발견했고, 그녀는 이번에도 나에게 눈을 뭉쳐 던졌고,

나는 가볍게 피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축 쳐졌다. 허무하게 피해버리는 걸 슬퍼했다.

쳐져 있는 모습을 우습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저런.’

그녀의 포인트를 올리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잔여 포인트가 있었지.

루비아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레이 루비아]

[사령술사 Lv.l]

[체력-7 힘-5 민첩-6 지혜-1幻[호감도: 20]

[잔여 포인트: 9]

- 배분해 주세요!

체력을 1 올리고, 그 이후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바보 같았군.’

체력 옆의 작은 플러스자를 눌렀다.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 했습니다.]

[7 -> 8]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 했습니다.]

[8 -> 9]

[사령술사 ‘루비아’의 체력이 증가했습니다.]

[9 -> 10]

“홋!”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다.

그리고 날 쳐다보며 말한다.

“몸이 이상해요.”

“아픈 건가?”

모르는 척 말한다.

“아니요. 엄청 건강해진 거 같은데. 막 힘이 나고.

효과가 괜찮은 것 같다.

우울해하거나 쳐질 때마다 한 번씩 눌러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딘가요?”

“유블람. 거의 다 왔지.”

“작은 도시네요. 그래도 괜찮은 여관은 있겠죠?”

“좋은 곳으로 가. 돈을 아낄 필요는 없어.”

“갑옷 살 돈은 남겨 놓을게요.”

“여기, 90로티.”

석궁과 망치는 각각 72, 18로티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넘치는데요? 그냥 여기서 사도 될 것 같네요.”

“그런가?”

“네.”

“가격에서 손해를 보지 않을까?”

“그라스미어에 가는 건 가격보다 품질 때문이죠, 뭐.”

그녀는 갑옷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가격 같은 건 알고 있나?”

“양산 형은 60로티, 잘 관리되지 않은 중고라면 25로티까지도 흥정이가능하다고 읽었어요. 나귀까지 한마리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대장간에서 흥정깨나 해 본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귀 가격에는 자신이 없는 듯하다.

“사흘거리인 그라스미어를 두고굳이 여기서 갑옷을 살 필요는 없지 않나?”

“.글쎄요. 하루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