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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8화 (18/458)

18화 누구를 책망할 것인가 (5)

“무슨 뜻이지?”

“갑옷을 빨리 살수록, 좀 더 안심하고 같이 움직일 수 있잖아요. 같이 도시로 들어갈 수도 있고.”

나는 그녀를 도시에서 재우고 싶어하고, 해골을 들여보내 줄 도시는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갑옷으로 가려도, 정체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 들여보내 주지 않을 도시도 많지 않을까.”

“둘러댈 거야 많죠. 심각한 화상이 있어 투구를 벗지 않는다든가. 경비병들이야 어차피 뇌물에 약하잖아요? 여행기에 나오는 상식이라고요.”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부딪쳐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서도 문제가 되겠군.”

“뭐, 항상 갑옷을 걸치고 투구를 쓴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하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이상한사람으로 남아 있으면 되니까.”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녀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겨울 산을 걸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걸음마다 울려 퍼졌다.

내가 앞장섰다. 한참을 걷다가, 손가락뼈로 수풀 너머를 가리켰다.

눈 덮인 겨울나무 사이, 저 아래를 가리켰다.

낯선 도시의 회색 성벽이 보였다.

“저기 있군.”

루비아가 묵을 도시, 유블람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루비아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무언가 묘해서 그 뒤를 살펴보니,

내 발자국을 루비아가 다시 디디며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딛는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졌다.

그녀를 죽게 만든 시간 선을 생각했다. 죄책감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긴 했다.

여자의 입에서 뿜어지는 하얀 김을 가만히 바라봤다. 살아서 따듯한 숨을 내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달그락거리는 건 나로 충분하다.

“거의 다 왔네요! 다음 도시부터는 같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산길 아래를 걸어갔다. 성 앞에 넓게 펼쳐진 눈 덮인 밀밭이 보인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재에 가까운 회색. 그리 높지는 않다. 세월의 퇴적을 탓하지 않더라도 저 도시의 성벽은 원래 잿빛이었을 거다.

시간이 표면을 한층 부드럽게 연마하기는 했겠지만. 잿빛 성은 오늘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밤새 내려 동틀 즈음에 그친 눈.

하얀 눈은 첨탑과 망루, 성벽 위낮게 쌓은 담의 오목한 자리마다 제법 쌓여 있었다.

“예쁘다.”

“.낯선 곳이니 조심하시오.”

뻔한 말밖에 할 수 없다.

실제로 도움을 줄 수는 없으니.

낯선 도시를 방문하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

높은 성벽 안쪽이라도 위험은 도처에 깔려 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위협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라면 더욱 그렇다.

거금을 소지하고, 여기저기 돈 쓰는 모습까지 보인다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녀를 보낸다. 겨울의산이라고 덜 위험하지 않다.

트롤 같은 마물들이 있다.

몰려다니는 사냥꾼들이 있다.

사냥꾼이라고 해도, 산을 혼자 다니는 여자를 보면 어떤 본성을 드러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해골과 함께 다니는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마녀를, 네크로멘서를 사냥한다는 아주 좋은 명분이 주어진다.

그들로부터 하나하나 지켜 줄 자신은 역시 없었다.

날렵한 독사들도 있다.

그들은 손가락삐 사이로 쉽게 빠져나가 루비아의 목을 간단히 물어뜯을 거다. 그녀는 도시로 들어가는 편이 옳다.

- 달그락.

나는 해골이며, 밤새 눈 속에 묻혀있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루비아는 다르다.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참혹하게 살해당했던 이 여자는,

따듯하게 데워진 목욕물과 푹신한 침대가 있는 깨끗한 여관에서 잘 필요가 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좋은 스류를 대접받을 필요가 있다.

질 좋은 소고기와 토마토가 잔뜩들어가고, 달콤한 양파와 타몬 잎이 버터에 잘 볶아 들어간.

그런 스튜를 떠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식사를 마친 뒤, 예쁜 찻잔에 홍차라도 한잔한다면 좋겠지만.

잿빛 성벽의 저 도시에 그런 찻집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산을 거의 다 벗어났다. 성으로 향하는 길이 펼쳐졌다.

무성한 수풀 아래로 슬쩍 몸을 숨기며 말했다.

“숨어 있을 테니, 가서 푹 쉬다 오시오. 이틀 정도는 여유롭게 기다려줄 테니까.”

“에이, 늦어도 저녁까지는 올게요.

경비병 뇌물은 1로티 정도가 적당하루비아는 몇 마디를 혼자 중얼거린다.

“진심이니, 도시가 마음에 들면 하루 정도는 쉬다 오시오. 정말 지쳤을 테니.”

“하핫. 금방 다녀올게요!”

루비아가 웃었다.

- 달그락.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수풀에 몸을 숨겼다. 멀리두 명의 경비가 보인다. 도개교 안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다.

- 끼룩. 끼르륵.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

석궁에 살을 장전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 터벅. 터벅.

루비아가 대로로 걸어 나간다. 나는 수풀 속에 엎드린 채 조심스럽게 석궁을 들었다. 가만히 경비병의 얼굴을 조준했다.

석궁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쏜 건 전부 가까운 거리였다.

경비와 나 사이는 무척 먼 거리.

오십 걸음은 된다. 열에 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확률이 높다.

살을 날린다면 루비아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건 그냥 이 정도다.

도개교 건너의 커다란 성문.

문 좌우의 두 경비병이 보인다. 근무 태도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몸을 슬쩍 벽에 기댄다. 짝다리를 짚는다. 창도 놓은 채 하품을 한다.

모두 느슨한 표정.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분위기.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이 지나가기만 바라는 인상의 남자들.

성문을 지나는 여행자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 돈을 뜯겠다거나, 험상궂은 범죄자로부터 반드시 도시를 지켜 내야겠다는 각오 같은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슨함은 전염되기 쉽다.

'괜한 걱정인가.’

루비아는 성문을 향해 터벅터벅 계속 걸어갔다.

도개교 앞의 루비아.

그녀를 보고도 경비들은 그저 하품만. 눈빛에는 ‘오, 예쁜 여자다.’라는 일반적인 감상 외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몇 가지 문답이 교환되는 것 같았다. 루비아는 신분증을 제출했다. 커다란 성문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 끼이익루비아는 아무런 문제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들은 뇌물조차 받지 않는다.

‘인간끼리는 저렇게 쉽게 열어 주나.’

- 털썩.

나는 석궁을 든 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잠시나마 긴장이 풀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없는 일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짹짹.I 짹짹짹.

새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아침이 지났다.

경추와 갈비뼈 사이사이로 겨울 햇살을 쬐었다. 수풀을 뚫고 들어오는 약간의 햇볕을 느낀다.

겨울 태양은 어딘가 좀 지친 것 같다. 충분히 따듯하지 않다. 루비아와함께 있을 때에는 동굴에서도 온기를 느꼈는데.

거기에 적응해 버린 것일까. 나는 벌써부터 조금씩 초조해졌다.

- 달그락.

손가락뼈로 손가락뼈를 더듬는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했다.

초조함을 잊기 위해 억지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엠버라. 나쁘지 않겠지.’

그곳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다.

굳이 학자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개인들이 놀랄 만큼 많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엠버는 아나키스트의 도시.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있는 자들은 구조화된 권위를 거부하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전설적인 네크로멘서도 있다.

왜 계속 무덤에서 일어나는 시점으로 되돌아가는가?

나에게 일어나는 기현상.

기스-제-라이라는 네크로멘서가,

나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른다.

물론 아쥬라의 탑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였다. 시간은 쉽게 가지 않았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갔다.

긴 기다림.

하늘 높이 뜬 해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끝내.

석양이 졌다.

쓸쓸함이 텅 빈 몸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낯설고 화끈거렸다.

나는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 찌르르. 찌르르 밤벌레 울음소리가 뼈를 타고 전해진다.

별도 없이 캄캄한 밤이다. 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다.

느슨한 경비들은 또 다른 느슨한 경비들로 교체된다.

도개교 앞 거치대에 횃불을 건 경비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 털썩.

살이 풀어진 석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열 시간이 훌쩍 넘는 동안 나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석궁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혼자 맞이하는 밤은 쓸쓸했기에 스스로 우스웠다.

잘 들어갔을 것이다.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새 신발과 의복을 사고, 필요한 것들을 샀을 거다. 어쩌면 저 도시에서 정착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내가 무슨필요가 있을까?

말을 할 줄 안다는 것 외에 나는 별로 특별한 해골이 아니다.

그녀가 나와 여행을 함께 할 이유는 없다.

엠버 같은 아나키스트의 도시가 아니더라도.

세계 어디서도 그녀를 받아 주고,

도와줄 도시는 많을 것이다.

루비아는-

누구에게나 호의를 받을 만한 인간이니까.

- 찌르르. 찌르르.

반면.

나는 17년 동안 차가운 적의와,

경멸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해골병사.

내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와 그녀에게 전혀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일 테니까.

웃으며 보내 주자.

- 달그락.

나는 혼자서, 내 길을 걸어가자.

이틀이 더 지났다.

아직도 수풀 속에 엎드려 있다.

나는 떠나지 못했다.

- 찌르르. 찌르르.

세 번째 밤이 찾아왔다.

눈도 비도 없는 맑은 밤이었다.

밤벌레는 어김없이 울었다.

나는 쓰레기처럼 버려진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후련했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가장 좋은 경우다. 마음이 깔끔해진다.

그녀는 그녀, 나는 나. 각자의 길을 가면 된다.

혹은 잠시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 기다리면 돌아올지도.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기다릴 수밖에 없는 밤은 악동과 닮아 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을까.

갈비뼈 사이로 길게 자란 갈색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긴 잎사귀가 뼈 안쪽의 어둠을 쓸어 댔다. 그러나 불안은 쓸리지 않고 계속 남았다.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다.

높은 호감도를 확립해 놓은 점이 오히려 꺼림칙했다.

그게 아니라면 날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속에서 무언가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라도 들어가 볼까.’

석궁을 들어 횃불을 켠 보초들을 겨눴다. 햇불이 바람에 흔들려 스산한 그림자를 만든다.

끔뻑끔뻑 졸고 있는 두 보초를 죽이는 건 쉬워 보인다.

그러나 잠입은 곧 자살.

몰려나올 도시의 경비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게다가.

몰래 진입한다고 하더라도.

움직이는 해골이 도시의 골목에 숨어들 수는 없다.

그때 였다.

- 끼이익.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한밤중에 성문이 열리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레 주의가 쏠렸다.

- 터벅. 터벅. 달그르르.

안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부리부리안 인상이다. 머리는 옆에만 몇 가닥 남고 위는 훤하다.

키는 중간 정도.

체격이 몹시 다부지다. 철제 흉갑위에 망토를 받치고 있다.

대머리가 터벅터벅 걸어오자, 느슨하게 서 있던 두 경비병은 남자를 알아채곤 깜짝 놀랐다. 몸을 바짝 붙이며 똑바로 섰다.

걸어 나온 대머리 남자는 서 있던 두 경비병에게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느슨하게 서 있던 경비병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지시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불길하다.

대머리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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