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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3화 (33/458)

33화 동굴에서 날개가 퇴화하는 이유 (1)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던 녀석의 짐을 뒤졌다.

새로 마련한 듯한 바스타드 소드를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던 모습이 조금도 어울리지 않던 녀석.

그의 짐에서 커다란 나무 곽을 발견했다.

뭔가 싶었다.

‘도시락인가?’

뚜껑을 열었다. 종류별로 과일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커다란 포도가 눈길을 끌었다. 알이 크다.

싱싱해 보였다.

한 알씩 떼었다.

좋은 품질의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붉은 껍질을 손끝으로 찢어천천히 벗겨 냈다.

안은 촉촉하다. 과육이 꽉 들어차있다. 씨도 없다.

포도를 익게 만든 비옥한 토지와 뜨거운 태양이 느껴졌다.

몇 번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찢어지지 않도록 가볍게 힘을 줘 껍질을 벗겼다.

- 스르륵.

공들여 껍질을 까고 있다.

하지만 이 달콤한 과육을 내가 먹을 건 아니다.

씹는 건 가능하지만, 내게는 과육을 맛볼 혀도 소화할 내장도 없다.

내 갈비뼈 사이에는 텅 빈 어둠과 바람밖에 없다.

- 달그락.

거미줄에 매달린 여자를 바라봤다.

인간은 연약하다. 물만 안 마셔도 죽는다. 저대로 놓아두면 금방 한계가 올 거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입에 뭐라도 넣어 줄 때가 됐다.

‘다른 인질은 없지.’

방금, 던전에 들어온 셋을 죽였다.

목을 쳤다. 가슴에 칼을 박았다.

다른 쓸 만한 녀석은 없다.

저 여자를 살려야 한다.

물을 게 많다.

- 터벅터벅.

거미줄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가입을 연다.

하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간청이나 애원이 아니었다.

의외의 말이다.

“.협상할 마음이 드셨나요?”

홈칫 놀랐다.

경추를 타고 올라오는 의아함에,

순간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이 여자는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렇게 사흘을 졸졸 굶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목소리에도 영 힘이 없다.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 처지에서 협상을 운운한다.

‘우스운데.’

껍질을 깐 포도. 하얀 과육을 바라봤다. 건네주지 않았다.

내 입에 넣고 깨물었다.

이 사이로 홀러내리는 물큰한 액체가 느껴진다.

- 주르륵.

혀가 있다면 진한 포도 향과 달고 신 감칠맛을 즐기고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질깃질깃한 감각을 느낄 수는 없다.

이건 그냥 약 올리는 거다.

“하아.

여자가 탄식한다.

아깝겠지. 촉촉한 과육을 몇 번 씹고 그만뒀다.

텅 빈 갈비뼈를 통해, 바닥에 씹다만 과육이 떨어진다.

하지만.

약은 내가 올라야 했다.

“그거, 맛있나요?”

나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여자는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피부가 있다면 얼굴이 붉어졌겠지.

여자를 바라봤다. 어리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여자에게 유치한 짓을 했다.

- 달그락!

나는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쳤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어색한 침묵이 깨어졌다. 다행이다.

“협상이라는 말에. 마음이 상하셨나요?”

사실이다.

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

- 딱딱.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 말이 웃기긴 하지. 네가 그 정도 가치가 있을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것들보다야 훨씬 있지 않겠어요? 저들은 바로 죽였지만 저는 살려 두셨잖아요?”

여자는 죽어 자빠진 남자들을 본다. 나도 그들을 바라봤다.

옳은 말이다. 널브러진 남자들과,

거미줄에 매달려서도 할 말을 하는 여자가 대비된다.

여자는 처음에 애원을 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내가 칼을 접고 테이블에 앉자 밀리지 않으려 한다. 제 카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F급 던전에서.

이만큼 가치 있고, 협조적인 모험가는 드물다.

여기서 만날 수 있는 놈들은 대부분 전혀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저기 널브러진 세 남자.

그들보다 조금 낫거나 심지어 조금 더 한심한 수준이겠지.

아는 건 책 한 권 분량의 지식.

조악한 단면으로밖에 세상을 볼 수없는 자들일 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줘도.

나를 그저 마땅히 부서져야 할, 해골병사로밖에 볼 수 없는 자들이나잔뜩 오겠지.

‘으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여자를 써먹어야 된다.

- 스르륵.

다시 한 알을 깠다. 이번엔 넣어줄 거라고 눈치를 챈 걸까.

“아.

여자는 바짝 마른 입술을 벌린다.

어린 새처럼 벌린 입으로, 포도를밀어 넣었다.

“하으.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까지 뱉는다. 꼭꼭 씹는다. 무척 맛있게 먹는다. 몸까지 떨린다. 저렇게 먹을거면서, 협상을 운운한 건가?

“자제력이 대단하군.”

“헤햇.

매달린 여자가 눈웃음을 짓는다.

새의 입에 먹이를 넣어 주는 느낌이다. 한 알 한 알을 더 까서 먹여 주었다. 다른 음식들도 조금씩 넣어줬다.

“우읍. 으읍.

천천히 먹게 내버려 두었다. 어느 정도 포만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랬지?”

추궁이 아니다. 순수한 질문이다.

정말 궁금했다. 왜 그랬을까? 내질 문에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는 이야기가 혹들 어온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짐작하는 표정이다.

어떤 질문을 하는지 알고 있다.

“무슨 의미이신가요?”

하지만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뜸을 들인다.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습관인가?

인간 수컷에게라면 제법 통할 만한웃음이다. 재차 질문했다.

“왜 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지?”

방금 전 내가 죽인 셋.

그들에게 왜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사실, 아직 묻지 않은 중요한질문도 많다.

주변의 던전에 대해서라든가. 그쪽이 실용적인 화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단 그걸 묻고 싶었다.

그러자, 여자가 갸웃하며 대답했다.

“에이,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구해주나요?”

답변은 지체되지 않았다. 어조는 의아스러웠다.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다. 당황했다.

“너희는. 동족이지 않나?”

“아하 하하하.

여자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던전에 아하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몇 번씩 메아리친다. 힘도 없을 텐데 온몸을 울리며 웃는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걸까?

“왜 웃지?”

“하핫. 제가 그들과 동족이라고요? 그만큼 동족에서 멀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심지어 제가 원하더라도, ”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그들부터 절대로 저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제 생각 같은 건알 바 없이, 옷 찢어 눕힐 생각만 하는데 그게 동족인가요? 하, 그거참 대- 단한 동족이네.”

문득 루비아가 당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허공에 매달린 여자의 말이,

약간은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침묵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동족이라면, 차라리 기사님과 제가 동족에 가깝겠죠. 훨씬 더.”

“같은 적을 가져서?”

“구조가 비슷해요.”

“구조?”

“<저들>을 보세요. 기사님을 보면달려들어서, 대가리 깨고 탈탈 털어갈 생각밖에 안 하잖아요? 어머, 내입 좀 봐.”

여자는 눈치를 살짝 살폈다.

“우린, 처지가 비슷하다니까요.”

말하고 싶은 바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여기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대답을 듣는 건, 그녀와 정신적 관계를 갖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루비아가 당한 일이 생각나서 조금 괴로워지기도 했다. 나는 이야기를 전환했다.

“레나라고 했지?”

“네! 맞아요.”

“기사님은 이름이 없나요?”

“없어.”

“으응, 제가 지어 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혹 들어온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죄송해요. 무례했네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널 한번 이용해 볼 생각이다. 인간들의 유품을 모아 주겠다. 너는 그걸 팔아라. 네 길드에서 성장하고,

정보를 가져와.”

“좋아요! 제가 원하던 거예요.”

레나는 싱긋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이용이라니,  기왕이면 믿어 주시는 게 어때요?”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여자가 저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아니, 의도된 농담 같았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행위에 오히려 터무니없이 거리를 두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이었다.

- 달그락.

경추를 조금 움직였다. 이게 웃는다는 표시인 걸 알아줄까?

나는 전부 거미줄을 끊어 냈다.

동굴 바닥에 적당히 모포를 깔아주고 여자를 앉혔다.

- 털썩.

레나가 그 위에 주저앉는다.

“으으으.”

온몸이 다 결리는 둣 몸을 몇 번뒤틀다가, 곧 얌전해졌다. 그녀에게 물었다.

“근처의 던전에 대해서 아는 대로말해 봐.”

“음,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목적이. 모험자 사냥인가요, 던전 공략인가요?”

“둘 다.”

“오호.

레나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나는 던전에 꼬이는 모험가들만 처리할 생각은 아니다. 8개월 동안 아무 조건 없이 검만 휘둘러서, 검술레벨 5를 달성했다.

인간 사냥으로 얻은 스킬이 아니다.

던전 공략으로 얻은 검술 재능Lv.l 덕분. 납골당의 우두머리를 처치하고 이런 보상을 얻었다.

다른 던전 보스들에게도 그 보상을 청구해 볼 생각이다.

F급 던전이나 지켜야 할 일개 해골병사가 밖으로 나와, 다른 던전을 돌아다니며 보스들을 사냥해도 되는가?

그 질문은 원천적으로 잘못됐다.

그건 시답지 않은 소리다. 논쟁거리도 되지 못한다.

요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일개 해골병사가 다른 던전들을 돌면서 보스를 사냥하는 건 단연 후자에 속한다.

누가 누구의 편이기에 앞서, 결코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에는 가치판단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할 생각이다.

여자가 나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며 말했다.

“모두가 적이 되겠네요.”

콜록, 하고 기침을 작게 하고 말을 잇는다.

“묘급 던전 하나, D급 던전 하나,

C급 던전 둘이 있어요.”

“네 개가 고작인가?”

“네.”

“일주일 거리 안에서 제가 아는 건그 정도예요. E급은<메마른 지하묘지>, D급은<파멸된 거미의 볼트>, C급은<비틀린 안개 지역>과<야비한 정글>.”

“일주일 거리라면 도보로 말인가?”

“네, 걸어서요. 어라. 별로 없는 건가요? 이 정도면 많은 거 같은데.

고개를 가웃한다.

하긴 이 시기는 그랬었나 싶다. 아직 마계가 열리기 전이다.

장소도 장소고.

“이 근처에는 몬스터가 별로 없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부는 중부 다음으로 던전이드물다구요. 서부 사막이나 동부 산맥으로 가면 아직 좀 많죠. 아실지모르겠지만, 부락도 꽤 여럿 있구요.”

그렇다.

마물들은 서부 사막과 동부 산맥에 산다.

물론 모래가 좋아서, 산이 좋아서거기에서 사는 마물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다수파는 아니다.

절반 이상은 밀려나서 그곳에 사는 것뿐이다.

작렬하는 태양과 건조한 공기가,

고산의 추위와 험한 지세가.

그저 인간보다는 덜 끔찍하기에 그곳에 산다.

인간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서, 마물들은 인간에게 없는 것처럼 취급당하기 위해 그런 곳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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