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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1화 (41/458)

42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⑵

“이거 한번 입어 보세요!”

“뭐?”

나는 그녀가 꺼내 든 걸 바라봤다.

진홍색 로브처럼 보인다.

“갑옷 뒤에 걸치면 분위기가 확 살것 같아서 사 왔어요. 가만히 계셔보세요.”

- 피리릭.

레나가 손에 든 로브를 펼쳤다.

머리를 감싸는 부분이 있어 로브인줄 알았는데, 펼친 걸 보니 그냥 진홍색 망토였다.

“자, 가만히 계세요.

그녀가 내 뒤로 다가왔다.

- 철컥. 철컥.

레나는 멋대로 내 갑옷의 연결 부위를 몇 군데 해제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자기가 사온 진홍의 망토를 집어넣는다.

몸에 하나를 더 입는다.

무언가를 걸치고 있다는 건 역시그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저번 생에서, 그녀는 나 때문에 죽었다. 확인은 하지 못했어도 살아나갈 상황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를 거절하기는 어렵다.

“으음.

“와, 그림 괜찮네요.”

레나가 즐거워했다. 나는 마지막반항처럼 살짝 투덜거렸다.

“왜 이런 걸 샀지? 망토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누가 기사님이 필요하대요? 내가보려고 샀죠. 나 보기 좋으려고.”

레나가 쿡쿡거리며 갑옷과 망토를더 깊숙이 연결한다. 나는 망토 의좋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색깔이 이러면. 피 좀 뒤집어쓴다고 티는 안 나겠군.”

“하아, 살벌하기도 하셔라.”

그녀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옆에 바짝 붙어 망토를 입혀 주는 중이다. 숨이 어깨뼈에 닿았다.

“그렇게 고른 거 아닌가?”

“누가 옷 살 때 그런 생각을 하고 골라요? 그런데 말이에요.”

레나가 화제를 돌렸다.

“얘기해.”

“강에서, 그런 일이 생길지는 어떻게 아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번과 비슷한 일이. 나는 태연한척 대꾸했다.

“쉬운 추측이었다. 너희 인간들이 원래 그렇지 않나?”

내 대답에 그녀가 쿡쿡대며 웃었다. 과장된 웃음은 아니었다. 살짝살짝 새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실은, 제법 고민했어요. 이대로도 망갈까 싶었죠. 하지만 결심했어요. 이렇게 남을 잘 믿는 해골이라면, 옆에 있어 줘야겠다고 말이죠.”

나는 레나를 바라봤다.

상태창이 떴다.

다른 건 그대로였다. 그런데 호감도가 21로 올라 있었다.

무언가, 혼자 여관에 있을 때 마음이 움직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20이 넘었군.’

처음 넘겨보는 수치였다.

그리고,

[이름: 레나]

[도적 Lv.5]

[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21]

- 레나는 당신에게 동질감과, 친근함과, 유용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 그녀는 당신과 더욱 친해지고 싶어 합니다. 호감도가 계속 올라가는 중입니다.

[기본 스킬]

- 단검 투척 Lv.3- 함정 제작 Lv.3- 모략 Lv.2- 목 긋기 Lv.2- 흔적 추적 Lv.l-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과 칭호는, 여전히 개방되지 않은 상태. 루비아의 호감도를 20으로 올렸을 때와 비슷한 창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짐이 처리되는 대로 다른 곳으로 가지.”

“여기 좀 더 있어도 괜찮기는 할 텐데. 적극적이셔서 좋네요.”

“던전을 빨리 돌아보고 싶군.”

내 말에, 레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메마른 지하 묘지>부터 가는 거괜찮으세요? 일단 E급 던전이에요.

D급 못지않다고 플러스가 두 개 붙기는 했지만, 일단 제일 가까워요.”

“해골들이 나오는 곳 아닌가?”

“맞아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동족을 처리하는 건가? 하지만망설일 생각은 없다.

“그래. 거기로 가지.”

“저는 지도를 구해 올게요.”

사흘이 지났다. 레나는 금세 짐을다 처리했다. 짐을 처분한 돈으로 자세한 던전 지도와, 이런저런 물품들을 구해 왔다.

커다란 배낭을 멘 데다가, 주머니마다 뭔가가 잔뜩 이다.

‘독이나 폭탄, 투척 무기겠지.’

- 끼이이익.

우리는 던전 문을 열고 나갔다.

‘.드디어 나오는군.’

저번 생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던전 안에 계속 박혀 있었다.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레나와의 계획을 무시했다. 이유도 없이 거절했다. 나를 다그치며 기다리다 그녀마저 죽었다.

던전 안에 박혀 있는 일은 익숙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계속 머물러 있자 정신이 흐려져 버렸다. 자기 결정권마저 잃고 허우적거렸다.

내면으로 파고드는 집중과는 다른 감각. 오히려 산만하고 흐릿한 몽상에 불과했다.

- 저벅저벅.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여기에 푸른 갑옷이 서 있었지.’

그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지 궁금했다. 회청색 머리칼의 남자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니 근위대니 하는 이야기를 했어.’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뒤나를 부숴 버렸다.

고작 나 때문에 왔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인간.

16마왕과 인간의 전장에서조차 구경하지 못했던, 기괴한 느낌의 인간이었다.

계속 다시 살아난다면, 그 인간을 다시 보게 될 날도 있을까.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 달그락.

레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나를 흘끗 바라보며,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앞에 펼쳐진 산길을 함께 걸었다.

“어제는, 비가 내렸어요. 가을비도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하루 늦게 왔어요. 안에 계셔서 몰랐죠?”

“그래.”

“나오니까 어때요, 좋아요?”

“좋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곤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가을비가 한차례 내린 듯, 흙에는 빗방울 무늬가 이리저리 찍혀 있었다.

‘가을이 한창이군.’

루비아를 묻은 건 지난겨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게 느껴졌다. 납골당에 들어오기 전에도 초가을의 산을 걸었다.

초입과 한창은 달랐다.

밤의 가을과 낮의 가을도,

혼자 걷는 가을과 둘이 걷는 가을도 달랐다.

- 저벅저벅.

어떤 단풍은 심장에서 솟는 피처럼 붉었다.

마냥 새빨간 단풍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잎 모양은 비슷해 보이되어떤 연유인지 아직 곳곳이 초록인 나무도 많았다.

어떤 나무는 반은 물들어 가는 연적색으로, 반은 아직 물들지 않은 연초록으로 남겨 두었다.

- 투두둑!

“어! 오소리다!”

작은 오소리 한 마리가 앞으로 지나갔다. 단풍이 빼곡히 깔린 산을 부스럭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도망가는 걸까?”

“그냥 갈 길 가는 거겠죠? 해칠 건지 안 해칠 건지 동물들은 다 알아요.”

“그래?”

“네, 정말이에요.”

동물들을 바라보는 레나의 눈빛은 편안하고 따듯해 보였다.

“귀여워.

남자들을 유혹해 던전으로 데리고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사정없이 목을 그어 대던데.

‘으흠.’

인간 제외 박애주의자라도 되나?

레나는 지도를 몇 번 다시 들여다보며 걸었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질 때쯤.

- 쏴아아아.

수십 개의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보였다.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작은 호수에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물방울이 잔뜩 튀어 오르는 폭포 아래로 레나가 나를 인도했다.

“이쪽이에요!”

물줄기가 흐르는 암벽 안쪽.

커다란 동공이 있다. 그 아래로는 계속 갈 수 있는 계단이 펼쳐진다.

‘여긴가.’

- 철컥!

넓고 가파른 돌계단을 한 걸음, 한걸음 내려갔다.

“홋!”

레나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온다.

“폭포에서 물이 좀 튀네요.

양손을 들어, 살짝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내면서도 날렵하게 계단을 디뎌 내려온다.

‘혼자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여기는 E급 던전.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지만, 그녀에겐 아직 위험하지 않을까?

내가 막는다고 해도, 어떤 변수가 그녀를 해칠지 모른다.

‘못 들어가게 막아야겠군.’

문 앞까지 따라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 쿵!

갑옷을 입은 채로 마지막 계단을 뛰어내렸다.

- 우우우웅.

동공 가운데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 아무런 무늬 없는 철문을 아치형 돌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앞쪽에 섰다.

“금방 왔군.”

“그렇네요. 반나절 거리예요.”

<메마른 지하 묘지>는<망령의 납골당>과 정말 가까웠다.

아침부터 빠르게 달려오긴 했지만,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던전들보다 훨씬 가깝죠. 성격이 비슷해서 그럴까요?”

레나의 말대로다.

비슷한 성격의 던전.

둘 다 해골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물론, 망령의 납골당보다 이쪽의 레벨이 훨씬 높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간다.”

나는 단정하듯 중얼거렸다.

레나가 눈꼬리를 샐쭉 올리고는 툴툴거렸다.

“뭐예요. 그 진부한 대사는?”

“따라오겠다는 건가?”

“설마 혼자 두고 갈 생각이세요?

그 사이에, 웬 불한당이 와서 절 납치해 가면 어쩌죠?”

“???뭐라고?”

“어느 놈한테 팔려 갈 줄 알고 두고 간다는 거예요? 절단 애호가라도 만나면.

“제가 위험하다구요, 제가.”

레나는 자기가 장착한 내 망토를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짜 놓고 가실 거예요? 솔직히E급 정도는 할 만하다구요. 다음 던전은 안 낄게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체크부터 해 보자고.”

- 저벅저벅.

커다란 철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섰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기다리시는 거라도 있어요?”

“???그냥.”

‘납골당 때는 분명히 떴는데.’

납골당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렸다.

던전의 이름과, 랭크. 그리고 적정레벨과 클리어 인원이 떴다.

하지만, 이번에는 던전 이름도, 적정 레벨도 뜨지 않았다. 창 자체 가없었다. 이상했지만 레나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들어가 봐야겠군.’

철문을 그대로 밀었다.

- 쿠구구궁.!

철문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그대로 열렸다.

- 철컥.

던전은 조용했다.

‘아무도 없어?’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에서도 반응이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싹 비었네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러게요. 모험가들이 왔다 간 걸까요? 이렇게 흔적마저 없는 건 이상한데.

레나는 던전 지도와 눈앞을 번갈아 바라봤다.

통로는 비어 있었다. 요격 나온다는 왼쪽의 공터도, 물 고인 오른쪽작은방도 텅 비어 있었다.

“정말, 다들 어디 간 거죠?”

‘갔다.’

레나의 말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지하묘 안에 있던 마물들은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럴 수 있는 걸까?’

세계는 인간의 것이고, 마물들이달리 갈 곳 따위는 없다.

보통, 마물들은 던전에 박혀서 토벌되기를 기다리는 처지인 것이다.

마물 서열 최하위에 자리 잡은 해골 병사 역시 그렇다.

내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엉뚱하게 인간들의 전쟁에 휩쓸려납골당이 다 파헤쳐지기 전까지, 나 역시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짓밟으면, 짓밟는 대로.

불평 한마디 없이 계속 부서졌다.

물론 내가 있던 작은 납골당과, 제법 거대한 이 지하 묘지를 일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일단은 던전 거주자의 수준 차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의식을 가지고 던전을 벗어나는 해골들이, 이<메마른 지하 묘지>에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런 단체 이주는 이상하다.

의구심에 휩싸여 터덜터덜 텅 빈 복도를 걸어갔다.

천연 동굴 같은 망령의 납골당에비해, 이곳은 바닥에 빠짐없이 타일이 깔려 있다. 벽도 벽돌로 잘 정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함정까지 없어요.

다 사라졌어. 이건 진짜 이상하네.”

황량했다.

더 크고 강하고 다양한 해골들이있고, 함정이 있고, 뼈다귀가 굴러다니고 있어야 하는 던전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철창도 다 열려 있어요!”

구역과 구역을 분리하는 철창은 하나같이 전부 열려 있었다.

이 던전은 곳곳이 철창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철창들은 전부 다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곳곳의 선반에는 녹아내린 커다란 양초들이 있었다.

음산하게 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양초들은 전부 다 불이 꺼져 있다.

천장에 매달린 것들도, 선반에 있는 양초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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