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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3화 (43/458)

사실을 털어놓는 것도 우습다.

그녀는 신뢰할 만하다. 나에게 높은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루비아의기억은 루비아의 것. 타자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가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우리는 산길 아래로 걸어갔다. 넓게 펼쳐진 밀밭이 한껏 여물어 있었다. 일렁이는 황금빛 사이로, 커다란 낫을 든 농부들이 오가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군요. 일주일정도 지나면 다 끝나겠는데요.”

좌우를 둘러보며 밀밭 사이를 걸었다. 앞을 바라본다. 회색 성벽이 제법 높다. 첨탑과 망루가 보였다.

루비아를 혼자 보낸 도시다. 이미 뒤늦은 후회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함께 들어간다.

- 짤그랑.

레나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손에 쥐었다. 도개교 안쪽에두 명의 경비가 보인다.

“어이, 정지!”

도개교 앞쪽에서 경비가 소리쳤다.

근무 태도가 매우 느슨한 녀석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살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나 때문인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커다란양손 검을 들고 있다.

이런 복장의 누군가가 성문으로 다가온다면, 하품을 하다가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들여보내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수로라도 뽑지 않으려 억눌렀다.

여기서 싸움을 벌일 생각은 없다.

의미도 없고, 나는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 죽으면 또 어떻게 될지 알 수없는 일이니까.

경비병이 이쪽을 보고 손짓했다.

“거기, 여자부터 건너오슈.”

레나가 도개교를 건넜다. 경비병이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리고 저 갑옷기사는 뭐고?”

“제 남편이에요.”

멀리서 대화를 들으며 침묵했다.

레나는 경비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찔러 넣어 줬다. 두 경비에게 모두마찬가지였다. 작게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경비병들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홈, 평범한 여행자들인 것 같군.

절대 안에서 소란은 피우지 마쇼.”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일어난 다른 경비병이 덧붙였다.

“조심하라고. 우리 대장에게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이도시의 경비대는 무척 무섭거든? 다른 곳을 생각하면 안 돼.”

몇 번의 잡담 끝에 커다란 성문이 열렸다.

- 끼이이익.

우리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네 남편이야?”

“그럼 뭐예요? 남편 맞잖아요?”

“.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깨만 들썩거렸다.

“남편이 뭐 별거라고. 좀 해 줘 봐요.”

- 철컥.

투구를 쓴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한다.”

레나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앞으로 걸어가며 내 손을 잡았다.

“손도 잡았다. 이제 남편 맞네. 그렇죠?”

그 상태로 놓아주지 않았다. 어쩐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둔 채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가슴속 어두운 곳에서, 조금씩 물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가을도 출 네요.”

레나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슬쩍 몸을 뺐지만, 레나가 나를 붙잡았다. 머리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거리에서 아편 냄새가 나요.”

“"?그런가.”

내 후각은 인간의 것만큼 예민하지 못하다. 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달달한 향이 곳곳에 배어 있어요.

제가 냄새에 좀 예민하거든요. 경비병도 눈동자가 풀려 있었고. 이거.

잘 봐이^겠는데요.”

“아편에 중독 되어 있다는 건가? 도시 전체가?”

“쉿. 누가 감시하고 있을 거예요.

우린 외부인이니까. 조심하세요.”

레나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편에 중독 되어 있던 여관 주인이 떠올랐다.

그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제대로 된 판단을 전혀 할 수 없었고,기분 전환이 병적으로 급격했다.

고문 때문에,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을 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중독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문에 서 있던 두 녀석은 제법 멀쩡해 보이던데.”

“양의 차이죠. 정해진 양을 조금씩 복용하거나 피우면, 생활은 가능해요. 중독 됐다는 사실만 잊으면. 그 녀석들, 몽롱해 보였잖아요?”

“그렇더군.”

“초기 증상이죠.”

길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크게 티 나는 자들은 없지만,

레나의 말을 들은 뒤라 그런지 모두중독자처럼 보였다.

- 깡! 깡! 깡! 탕탕! 탕탕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문 쪽 길가에 대장간이 있다. 대장간 앞에 나열된 갑옷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하게 생긴 갑옷들이 있었다.

“갑옷 보시네요?”

“신경 쓰지 마. 살 건 아니다.”

이미 있으니까. 그것도 같은 대장장이가 만든 작품이다.

나는 씁쓸해져서 발걸음을 뗐다.

뼈밖에 안 남은 노인이 골목에서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우리를 한차례 유심히 훌어봤다.

그러더니 하얀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은 뒤,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중독자인가?”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외양은 그래요. 아편 냄새도 짙고.

하지만 눈동자가 제법 또렷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우릴 왜 쳐다보지?”

“글쎄요.

자갈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는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길 양옆으로 다갈색의 목조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붕은 횐색이기도, 검은색이기도 했다.

푸르거나 붉기도 하다. 레나는 3층짜리 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기예요.”

“유일한 여관이지?”

“맞아요.”

루비아가 묵었던 여관이다.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옷을 사고, 처음 들어왔던 여관이다. 동선을 보면 딱 맞는다.

그녀가 죽어 나간 도시. 그녀가 머물렀던 여관. 적진 한복판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 삐그덕.

레나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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