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6)
노인은 내게, 거미굴로 향한 경비들을 죽여 달라고 했다. 삼 년 전,
영주가 데려온 흉악한 무리를.
좀 더 확인해야 한다.
“우두머리는 어떤 놈이지? 말하자면. 경비대장 같은 거 말이야.”
노인이 몸을 흠칫한다.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질문했다.
“어떻게 생겼지?”
“머리가 거의 다 벗어진 자일세.
몹시 다부진 체격이야.”
노인이 말을 이었다.
“눈빛을 보면 금방 알아볼 걸세,
그놈이 우두머리라는 걸 말이야.”
- 철컥.
온몸의 뼈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이겠지.’
루비아를 살해한 자들.
성문에서 수레를 끌고 나오던 놈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놈도 거미굴로 갔나?”
“그래. 부하들과 함께 움직인다네.
그놈과 함께 있으면. 다른 놈들은 아주 제대로 기합이 들어 있지.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반쯤 죽여 놓거든.”
이가 꽉 맞물렸다.
확실하다.
부하를 패던 대머리의 태도와 모조리 잡아먹을 듯 주위를 돌아보던 혐오스러운 시선이 떠오른다.
‘여기에 집중한다.’
굳이 의뢰를 받지 않아도, 어차피해야 할 복수다.
그냥, 일이 훨씬 쉬워진 거다.
거미굴에 모여 있다면, 몰아넣고태워 죽일 수 있다면 그보다 간단하고 편리한 방안은 없다.
‘지금은. 그게 최선인가.’
뿌리를 캐다 보면.
결국, 도시의 영주에게 닿을 거다.
더 커다란 것에 닿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경비병 놈들을 하나씩 잡아서, 산채로 천천히 고문할 만한 압도적인능력은 없다.
흑막을 캐더라도, 영주성에 걸어 들어가 모든 걸 뒤집어엎어 놓을 능력은 없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이건 이렇게 쓰는 걸세.”
노인은<불>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검은 철로 된 커다란 통은 매우 무거웠다.
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자체적으로 냉기를 띠고 있다. 온몸에 한기가 퍼져 나갔다.
‘차갑군.’
밖에는 잡고 돌리는 수동식 펌프가 장착되어 있다.
앞쪽에는 기다란 관이 있다. 끈적거리는<불>이 뿜어지는 구조였다.
“이건 어떻게 끄지?”
“조심하게. 끌 수 없네.”
“끌 수 없다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이라네.”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물을 부으면 안 되나?”
“물?”
노인이 클클대며 웃는다.
“한번 부어 보게. 단, 붓기 전에 꼭서른 걸음은 피해 있게나.”
“안 꺼진다는 거요?”
“이 불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도 타오른다네. 진흙이나 모래로도 끌 수가 없지.”
노인은 우리에게 한 포대의 가루를 건넸다.
“쓰기 전에 이걸 몸에 뿌리게.”
“이게 뭐죠?”
레나가 끼어들었다.
“불에서 몸을 보호하지. 이걸 끼얹으면 뜨겁지 않아.”
“신기하네요.”
“그래, 신기하지? 이것만 바르면 몸을 보호한다니까.”
우리는 <그라스미어의 불>대신 물을 담은 분사기로 몇 번이고 연습했다.
통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 푸슛!
물은 일직선으로 길고 강하게 쁨어졌다. 10미터 정도 앞까지 세차게 나아간다.
“장착된 펌프가 꽤 강하네요.”
떠나기 전, 노인은 우리에게 검은 철로 된 통을 하나 더 줬다.
“여기 들어 있는 건 1/20로 희석된 액체일세. 밖에서 감을 좀 잡고 가는 편이 좋을 거야.”
우리는 노인의 집을 떠났다.
“의뢰를 받으셨네요?”
도시를 나간 뒤, 레나가 내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
“놀랐어요. 꼭. 정말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셔서.”
“어차피 우리에게 좋은 일 아닌가?
재미있는 무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싫을 거 없지. 모험가나 경비대나 처리해야 할.
문득 말을 멈췄다.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하셨어요?”
말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나 보다.
마음속 깊은 곳을 찔린 것 같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데, 레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다.
“좋았어요. 그 할아버지 말을 승낙해서.”
“무슨 말이지?”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나?
망설임 없이, 남자들의 목을 즐겁게 긋는 모습이 기억난다. 그것과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저도 승낙하고 싶었거든요, 그 의뢰라는 거. 마음이 음직였어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직설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말씀하세요.”
“인간을 싫어하지 않나?”
“아하하하.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혐오해서, 그 반사 심리로 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대부분의 인간은 끈적거리면서, 저를 무작정 착취하려고만 하니까요.”
“기사님을 좋아했던 건, 맺고 끊는 게 확실해서? 주고받는 게 확실해서였어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혜 수치를 조금 올리면, 이런 여자의 마음 같은 걸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자기주의자면서도, 아닌 척하면서남까지 생각하는 해골이네요. 너무 좋은 거 같아.”
당황스럽게도, 레나가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런 표정을 언제 봤더라?
그 순간.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6 올랐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계속 떠올랐다.
[호감도 30을 돌파했습니다!]
[특전이 해제됩니다.]
[특전은 성장 가능합니다.]
[상대방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 띠링!
[이름: 레나]
[도적 Lv. 到[체력-13 힘-11 민첩-17 지혜-11]
[호감도: 3到- 레나는 당신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호감도가 방금<크게>오른 상태입니다.
- 분위기가 유지될 때, 호감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자극하세요. 평소보다 호감도가 큰 폭으로 올라갑니다.
[기본 스킬]
- 단검 투척 Lv.3- 함정 제작 Lv.3- 모략 Lv.2- 목 긋기 Lv.2- 흔적 추적 Lv.l-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특전]
- 재능(B)
<충분히 탁월한 재능>
이 특전의 소유자는 범인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과 성장력을 가졌습니다.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이 플러스2 보정됩니다.
-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상세효과는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칭호- 호감도를 올리면 개방됩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게 뭐지?’
갑자기, 엉뚱하게 확 상승해 버린호감도도 호감도지만.
일단, 레나의 상태창이 압도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레벨 업 때마다 스탯이 2가올라간다. 그것만 해도 나의 2배.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스탯 차이까지 생각하면, 레벨 20의 해골병사가레벨 10의 인간보다 약하다.
하지만, 이 여자의 성장력은 다시인간의 두 배다. 한 번 레벨이 오를 때마다 스탯이 4 올라간다. 성장력이 나의 4배인 셈.
게다가 전투 감각이라는 특전.
‘같은 스탯인데, 뛰어난 전투력?’
무시무시한 성장력에다, 그 성장력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니.
이 여자는 괴물이다. 인간 중에서도 매우 드문, 뛰어난 재능의 개체로 보인다. 지금은 약하다. 하지만 제대로 키운다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답은 나온다.
‘좀 무서운데.’
레벨이 20만 되더라도, 지금의 나를 간단히 때려눕힐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약한 그녀가 좋을지도, 하는 생각마저 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레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고개를 돌렸다. 레나의 예쁘장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여자를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웃기는 생각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다.”
레나는 나를 인적 없는 강가로 데려갔다.
“여기에서 한번 실험해 봐요!<그라스미어의 불>을 뿜어 보는 거예요. 어때요?”
“어디로?”
레나가 손으로 강을 가리켰다. 바위 사이사이로 청명한 소리를 내며 강물이 흐르고 있다.
“수면 위로요.”
희석된 액체를 담은 통을 잡았다.
앞으로 고정하고, 펌프를 돌렸다.
- 휘이이이이익!
기이한 소리가 나며 불길이 앞으로화르르륵 뿜어졌다.
열 걸음 앞까지는 액체처럼 일직선으로 분사되고, 그 뒤로는 불길이 부풀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불길이 강 위에 솟은 바위에 닿자바위가 새까맣게 그을린다. 화르록타오르는 불길 위에서 검은 연기가 춤을 춘다.
“와아. 말만 들었지 저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이런 거였구나.”
“맞고 살아남기는 어렵겠군.”
“안에 든 것도 평범한 공기가 아니네요. 분사력이 대단해요.”
“나도 놀랐다.”
1/20이 저 정도라면, 희석을 안 한 원액은 어떨까.
- 툭.
“엇.!”
“내가 갖고 있지.”
레나가 가지고 있던 검은 통을 빼앗아 들었다. 재능은 재능이고, 지금의 그녀는 연약하다.
1/20로 희석되었는데도.
경악스러운<불>의 위력을 목격했다. 아예 레나가 그 통을 들고 있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 기예요!”
레나는 지도와 길을 번갈아 본다.
앞장서서 나를 인도한다.
“잘 찾는군.”
“수십 명이 걸어간 흔적인데요. 목적지도 정해져 있고. 놓치기가 더어렵죠.”
흔적이 뚜렷하긴 하다.
“노인의 말대로인가.”
“경비가 열다섯. 사형시킬 인간이열 명이라고 했죠? 대충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계속 걷는다.
나는 갑옷을 입고, 진홍색 로브를 뒤에 걸치고 있다.
“그것참, 볼수록 마음에 드네요. 정말 잘 사서 입혔다니까?”
레나가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내 모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듯하다.
망토는 별로 거추장스럽지 않다.
무게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저렇게 좋아한다면, 입어 주는 게크게 어렵지는 않다.
어느새.
레나를 따라 멍하니 걷다 보니,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나무들이 죽어 있네요.”
말라 죽은 나무들이 늘어난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잎 하나 매달려 있지 않다.
- 투각.
레나는 칼을 꺼내 나무껍질을 조금 벗겨 냈다. 몇 번 만지작거리며 살펴보더니 말했다.
“수액이 다 빨려 있어요.”
조금 더 걸어갔다.
“저기.”
레나가 손으로 앞을 가리킨다.
‘던전인가.’
구불구불한 계단 끝에 멀찍이 거대한 동공이 보인다. 그 주위의 나무들은 모두 새까맣다.
“나무들이 왜 다 저렇지?”
“거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나무뿌리에서 수액을 다 빨아 먹어서 그래요.”
“거미가 수액을 빨아 먹는다고?”
“보통 거미들은 안 그렇겠죠. 하지만 이것들은 마법사가 만든 키메라예요. 뭘 해도 이상하지 않죠.”
“그런가.”
“네. 인공 던전은 처음이네요.”
자연스럽게 해골들이 모여들어 형성된<망령의 납골당>같은 것과달리, 어떤 던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 골 렘이 지키는 던전들이 대표적이다.
D급 던전<파멸된 거미의 볼트>
역시 그렇다. 마법사가 쓰다 버린 키메라로 가득 찬 던전이다.
레나는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배낭에서 이것저것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동공 근처로 접근했다.
“일단 들어간 건 확실하네요. 노인이 말한 그 무리.”
“따라가면 되나?”
“잠시만요.
레나가 긴 막대에 칭칭 감긴 와이어를 천천히 푼다.
굵은 나무들을 중심으로 와이어를 연결한다. 삽으로 땅을 판다.
곳곳에 덫을 놓는다. 칼날에 독을 발라 함정을 만든다.
“덫을 짜는 건가?”
“네. 안에서 다 못 죽일 거 같으면,밖으로 나와서도 상대해야죠.”
대꾸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참 뒤,“좋아!”
“된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긴, 이제 우리 구역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