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7화 (47/458)

48화 부역자와 불타는 자 (8)

처음 나타날 때는 흐릿하다가.

점차 명확한 글자가 되어 나타나는 문장.

[.각색완우(角色抗偶)의 아나픽시아(an쇼pxia)를 시작합니다.]

머리가 아픈 것도 같고, 머리가 사라진 것도 같다.

시야가 대책 없이 출렁거린다.

침침해지다 또렷해지고, 곧 다시 거칠게 흔들린다.

의식에 장막이 내려진다.

아니다.

이미 내려진 장막을 의식한다. 그불투명한 장막이 조금씩 찢어진다.

‘각색. 뭐라고?’

두 번째다.

이런 조합의 메시지가 뜨는 건. 어딘가 흐릿하고, 빠지고 비뜰어진 글귀들이 기괴한 긴장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때마다<동화율>이 큰 폭으로 내려갔다.

*90.14%:

현재의<동화울>이다.

동화율이란 단어는 이제 슬슬 익숙해지고 있다. 의식의 한구석을 분명하게 점령하고 있다.

시나리오, 튜토리얼, 동화울.

축축한 의구심이, 발목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들어차고 있다.

‘90% 아래로 내려가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지?’

어쩌면 그 일은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나를, 세계를 잡아먹는 중인지도 모른다.

동화율을 모르던 세계와 동화율90.14%의 나.

뭐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무언가 달라진 세계가 느껴진다.

무언가가 솟아 나온다. 스며든다.

서늘한 칼날을 들이민다. 무너진다.

껍질을 벗긴다.

의식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 토토?I ?I ?

- 톡톡.

“"?기사님?”

“.기사님, 괜찮으세요?”

한 여자가 내게 노크를 한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납골당에 쳐들어왔던 여자. 그녀가이번에, 내 의식에 쳐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

“레벨.”

“네?”

“너, 레벨이 올랐어.”

“맞아요. 방금 허공에 매달린 거미들을 잡아서 레벨이 올랐어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이상한 일이라도 있냐는 듯한 말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얘기를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앞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

이 던전에는.

내가 죽여야 할 무리가 있다. 일단은 거기 집중한다.

“아니야. 아무 생각 안 해. 가자.”

우리는 협곡 아래로 내려갔다.

협곡 아래에는 불타 죽은 거미들과 깨진 화염병 조각들이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죽었군.’

협곡 아래로 걸어간다. 죽은 거미들이 전부 살아 있었다면, 처리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만큼 깨진 화염병 조각도, 죽어있는 거미의 숫자도 많았다.

협곡 안쪽에는 사원이 있다. 동굴 안에 사원을 만들어 낸 건, 옛 마법사의 취향인 걸까. 무너진 사원 곳곳에는 거미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아직 형체들이 생생하네요. 조각들 말이에요.”

“살아 음직이게 될까?”

“하하, 아무래도 그건 무리죠. 그런 마법이 유지된다면, 저 사원도 훨씬 잘 보존되었을 테니까.”

사원은 낡고 헤졌다. 대리석 기둥들은 이가 빠져 있다. 부스러기가 땅 곳곳에 뒹굴고 있다. 무딘 단면이 이미 오래전에 떨어져 나갔음을 말해 준다. 거미줄은 조각과 조각 사이를 잇는다.

나는 언제든<불>을 뿜을 준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거미들은 살해당해 널려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 철로 된 문을 연다. 문은 거미줄로 꽁꽁 봉해져 있다.

- 투둑!

억지로 연다. 거미줄이 뜯어진다.

안쪽에 통로 따위는 없다.

‘뭐 하는 곳이지?,

문 안쪽에는, 언뜻 의미를 알 수없는 작은 공간이 있다.

공간의 문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고 잠글 수 있는 듯하다.

‘임시 대피소 같은 건가?’

한 명이 들어가면 끝일 것 같은 크기다.

‘여기 집어넣고 가 버릴까.’

그편이 레나에게 안전할지도.

레나는 그 사이에도 여기저기 놓여있는 상자를 체크한다.

내가 이 던전에 온 목표는 사냥과 복수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만의 목표가 있다. 아이템 수집이라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텅 비어 있네요.”

“직접 뜯어내면 되는 거 아닌가?

경비대 녀석들에게.”

레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놈들에게 받아 내야겠죠.”

새까닿게 타 버린 거미줄과 시체들 사이를 저벅저벅 걷는다.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 위를 걷는다.

- 티디디딕!

- 티디디디딕!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아직살아남아 나를 덮치는 거미도 종종 있다.

곡도曲刀 같은 여덟 개의 다리가 연달아 바위를 디디는 소리가 제법 섬뜩하다.

“피해라.”

레나에게 낮게 소리친 뒤 거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취익!

처음 마주한 녀석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독액을 뿜어 댄다.

나는 대각선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른다. 검이 허공에 좌르륵 뿜어진 독액을 베고, 독액을 뿜은 녀석의 몸을 입부터 베어 버렸다.

- 치이익!

검으로 양단된 독액이 갑옷에 그대로 쏟아진다. 표면부가 제법 요란한소리를 내며 부식된다.

하지만.

내가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다.

- 팟!

허공에 뛰어올라 다시 바스타드 소드를 내려친다.

- 퍼걱!

독액을 몸으로 받아 내며 거미들을 하나하나 반으로 쪼개 버린다. 어차피 경비대가 지나갈 때 도망쳤던 잔당에 불과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마리를 잡자 금세 레벨이 3이나 올랐다.

크게 어려운 것은 없다.

경비대를 죽이러 가는 마당에, 이런 것들에게 먹이가 되어 줄 생각은조금도 없다.

레벨이 올라서인지, 레나는 아까보다 움직임과 판단력이 더 좋다.

거미들과 내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미리 몸을 빼놓고 있다.

몇 분을 더 걸었다. 레나가 내게 속삭인다.

“쉬잇. 이제부터 조심히.

- 광!

- 화르르!

- 끄아아아아아!

“.갈 필요도 없겠네요.”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타오르는 소리, 되풀이되는 외마디 절규와 위태로운 울음소리가 거듭 울린다.

소리가 풍경을 전하고 있다.

“한창인 것 같은데요.”

레나가 지도를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말을 잇는다.

“우두머리 사냥이.”

나는 레나를 돌아봤다. 이 앞은 아무래도 혼자 갈 수밖에 없다. 그녀를 지켜 줄 자신은 없다.

“넌 여기 있어.”

“싫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같이 가야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엇.

- 퍽!

레나의 목덜미를 살짝 쳐서 기절시켰다. 그녀는 내 공격을 막 알아채려던 참이었다. 조금만 더 경계하고 있었으면 실패할 뻔했다.

‘정말 대단하군.’

나의 민첩은 그녀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바로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피할 뻔한 것이다. 놀라운 센스였다.

하지만 저 앞의 지옥도에 동참시킬 수는 없었다.

지나오면서 보아 왔던,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크기의 ‘대피소’에 그녀를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안에서도 문을 열고 잠글 수 있는 구조다. 내가 죽더라도, 그녀가 살아남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다시 길을 돌아, 요란한 소리가 나는 방으로 뛰어갔다. 노인이 준 ‘가루’를 전신에 끼얹었다. 몸 곳곳에 비비고, 갑옷과 망토 위에도 잔뜩 뿌렸다.

‘이제 끝이군.’

레나의 허리둘레만 한 검은색 철통을 잡았다.

<그라스미어의 불>의 원액이다.

기다란 관을 앞으로 조준하고, 수동식 펌프 손잡이를 꽉 쥐었다.

- 터벅.

나는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원을 벗어나, 부서지고 불타는 절규의 장소로 향한다.

[보스의 인식 범위에 들어갑니다.]

[우두머리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사이드 판정: 마물魔物]

[특전이 주어집니다]

[던전 보스, 열두 발의 거미 (진명眞名: 웹슬링거Webslinger)를 적대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 웹슬링거 Webslinger 를 도와줄 경우, 0.051%의 확률로 그녀가 당신에게 매혹됩니다.

- 0.049%의 확률로 그녀가 당신을 방관합니다.

99.9%의 확률로 날 공격한다는 소리다. 물론, 도와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높은 곳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길이가 4미터쯤 되는 거대한 거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리는 여덟 개가 아니다.

‘네 개가 더 많군.’

열둘. 그러나 움직임은 몇 배나 빠르다.

거미는 불의 고리에 갇혀 있다.

이리저리 날뛰며, 인간들이 던지는 화염병을 필사적으로 피한다.

거미의 발치.

그곳에는, 씹다 남은 인간의 시체들이 즐비하다. 무장하지 않은 인간들이다.

‘알 만하군.’

상황이 한눈에 파악됐다.

열두 발의 웹슬링거.

그녀가 경비들이 던져 준 인간들을 아작아작 씹어 먹는 사이.

경비들은 화염병을 투척했다.

그녀를 가두는 불의 고리를 만든 것이다.

- 펑!

- 화?르르!

- 쨍그랑!

- 화르르록!

던져지는 화염병은 끝이 없다.

고리의 직경은 20미터 정도.

그 불의 고리 안에서, 수십 개의 눈을 가진 그녀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고리는 점점 더 좁혀진다.

이미 몸에 불길에 번졌다.

- 키갸아아아아아악!

타들어 가며 그녀가 지르는 비명을 경비병들은 빙 둘러서서 즐기고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를 훌어본다.

팔짱을 낀 대머리가 보인다.

- 달그락.

<불>을 두 손에 쥔다. 아비규환의 와중에서도, 대머리는 작은 소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단단하게 생긴 녀석의 얼굴에 얼핏 당황하는 표정이 스쳤다.

저 남자가 어떻게 태어나,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 있다.

“저, 저기!”

놈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나는 녀석을, 경비들을 겨냥한 채온 힘을 다해 파밧, 펌프를 돌렸다.

- 파■아다아■아다아■악?!

<새하얀>불길이 터져 나가며 십여 미터 앞에서 모든 걸 터트렸다.

구덩이 근처에 붙어 있던 불길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순간에 뭉게뭉게 용솟음치며 던전으로 폭발했다.

공기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불길의중심에 있던 ‘웹슬링거’는 순식간에 하얀 재가 되었다.

온몸에 불이 붙은 경비들도 몇 초를 넘기지 못하고 까맣게 타서 즉사했다.

“끄, 구와아아아악!”

몸이 반쯤 허물어진 경비대장이 불길 속에서 발버둥쳤다.

혼자서만 방염防炎제를 몸과 옷에 잔뜩 뿌리고 있었는지, 기이할 정도로 오래 살아남고 있다.

녀석도 곧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길 속에서도.

‘뜨겁지 않아.’

나는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보스존 바깥까지 뭉게뭉게 휩쓴 화염에도, 조금의 뜨거움도 느끼지 않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 띠링! 띠링!

하는 소리가 울린다. 온갖 현란한상태창이 계속 뜨고 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 메시지만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뒤덮는다. 계속 메시지가 올^온다.

- 띠링!

[클리 어!]

[던전 우두머리를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D플러스]

[난이도 판정: 절망]

[난이도 판정으로 용사 포인트가200% 가산됩니다.]

- 띠링!

[D플러스 랭크 클리어: 54포인트]

[난이도 가산: 108포인트]

[162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띠링!

[상점 이용 권한을 산출합니다.]

[상점 이용 등급: Novice]

- 다음 등급까지: 214/256[권한이 부족합니다.]

[용사 상점을 직접 이용할 수 없습니다.]

- 등급이 올라갈수록 상점 이용권한이 풀립니다. 이 제한은 초보용사들의 포인트 낭비 방지를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동으로 최적의 특전을 구매합니다. 환경 스캔 중.]

[플레이어 스캔 중.]

[특전 부여 불가.]

‘불가라고? 왜?’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 투둑.

- 투두둑.

그런데 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전혀 뜨겁지 않은데.

이렇게 시원한데.

왜 일까?

나는 고개를 내렸다.

- 툭.

그 순간.

두개골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 파삭.

부서져 먼지가 된다.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불길에 양초처럼 녹아내리는 내 몸이었다.

‘어째서.?’

녹아내린 내 몸.

막 의문을 품는 순간.

의식이 완전히 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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