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⑴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검주劍主라고?”
“네. 새하얀 검집은 백조라고 불리는 세라핌Seraphim. 외양을 들으면.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겠네요.”
“.강한가? 그자는.”
이미 눈앞에서 그 남자에게 반으로 쪼개진 터. 그저 확인일 뿐이다.
“레안드로 후작이요?”
“그래.”
“푸른 사자 기사단 출신 최연소 마스터. 마법사를 제외하면 열 손가락에, 마법사들을 포함해도 서른 명안에는 넉넉히 들죠.”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 보신 거 맞아요? 푸른 사자들은, 마廣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린다던데.”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미 베어진 것 맞다.
“그런데 왜 물으세요? 우리랑 아무상관도 없을 텐데.”
바로 내가 묻고 싶은 말.
‘제국 4 검주劍主 중 하나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존재가 대체 왜 이런 장소에 온단 말인가?
제국 남부 끝자락에.
이 구석진 F급 던전에 왜. 결국 나는 레나를 웃길 수밖에 없었다.
“모험가 좀 죽었다고, 그런 녀석이 여기로 쳐들어온다면.
잠깐 머뭇거리다 말을 끝맺었다.
“.그거 역시 이상하겠지?”
“아하하하.
레나가 크게 웃기만 한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국은 넓고검주劍主는 넷밖에 없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인간 따위는 사람 취급도 안할걸요? 모험가가 죽었다고 여기로 와요? 그럴 리가요.”
바로 그 녀석에게, 우리 모두 죽었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이라.
푸른 사자 기사단, 검주劍主.
머릿속에 그 존재를 적어 놓았다.
언젠가 이유를 알게 될 날이 을 것이다. 그놈이 이 던전에 쳐들어왔던 이유를.
- 달그락.
나는 머리에서 잡념을 떨쳐 냈다.
“.일단 유블람에 가자.”
“벌써요?”
“응.”
“<메마른 지하 묘지>부터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곳이 여기서 제일 가까운데요?”
“아니. 거기로 갈 필요는 없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던전을 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가장 적절한 곳이.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이건 날 믿어.”
“네.”
단호한 내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한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가 수련하기 위해 던전을 도는 것이다.
내 입장에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
나는 다음 일정을 생각했다.
일단 유블람에 가서 노인을 만난다. 거기까지는 같다.<불>을 구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 간다면?
좀 일찍 가는 거다. 경비대와 마주치게 된다.
<불>없이 경비대를 맨몸으로 이길 수 있을까? 불확실하다. 패배할 확률이 크다.
우리가 유블람에 간 시간은 딱 좋은 시간대였다. 다시 그때로 가야한다. 던전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우리는 유블람에 다시 들어갔다.
- 끼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경비대는 무사 통과였다. 손에 은화가 쥐어지자 깔끔하게 성문이 열렸다.
레나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가을도 춥네요.”
레나가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아편 냄새가 나지?”
“콜록! 콜록!”
레나가 기침을 했다.
“어떻게. 저보다 먼저 아세요?”
“내가 냄새에 좀 예민하거든. 경비병도 눈동자가 풀려 있고. 우린 외부인이니까 조용히 하자고.”
레나가 눈만 깜빡였다. 미약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이 도시에서는 웃고 싶지 않았다. 루비아가 죽은 도시다.
- 깡! 깡! 깡! 탕탕! 탕탕탕!
대장간을 지나 곧장 걸어갔다. 횐수염의 노인이 골목에서 나왔다. 시선이 느껴진다. 무시하고 걸었다. 곧그를 찾아갈 거다.
“여기가 유일한 여- 삐그덕.
나는 곧장 여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걸터앉은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옷은 그대로다.
‘확 뒤집어 버릴까.’
하지만 꼬투리를 잡을 만한 무언가가 없다. 정황상 수상하다는 것만으로 다 엎는 건 무리다.
여기는 인간 도시의 한가운데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금방 살해당할 확률도 높다.
‘으음.’
오늘은 얌전히 입실하기로 한다.
“방은 욕조가 있는 곳으로. 식사 때는 흑맥주 한 잔 부탁하고.”
- 띠링!
[레나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현재 호감도: 31]
갑자기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서 옆을 돌아봤다. 레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눈을 깜빡인다.
‘대신 말해 주기만 해도 호감도가올라가나?’
호감도는 예전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도 좀 피곤하겠군.’
방에서 장난을 받아넘길 생각을 하니 살짝 피곤해졌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을라갔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가 조금 다른것 같았다.
‘호감도가 올라간 거 아니었나?’
저번 생보다 말수가 조금 적어진 것 같았다. 별말 없이 나를 자꾸 흘끗홀끗 쳐다본다.
목욕을 마친 뒤, 수증기와 함께 욕실에서 나온 그녀가 묻는다.
“목욕하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책에서 읽었으니까. 인간은 주기적인 목욕이 필요하지 않나?”
“기사님은요?”
“좁은 건 싫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온천에라도 가는 걸로 하지.”
식사를 마친 레나는 침대에서 꿈틀거렸다. 내 쪽으로 머리를 이동한뒤에, 나를 흘끗거렸다.
“화염병 써 보신 적 있어요?”
“써 본 적은 없다. 던져서 깨트리면 되는 거 아닌가? 기름과 끈적한걸 적당히 섞어 만들면 되겠지.”
“잘 아시네요! 써 본 적 없다더니.”
“추측이지, 뭐. 내일 아침에 잡화점에 가자.”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칼을 안았다.
침입자는 없다. 하지만 이 자세가편하다. 레나는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잠이 안 오나 보군.”
“설레서 잠이 안 오나 봐요.”
“무슨 말이지?”
“아니에요.”
그녀는 이불에 조용히 몸을 부비며뒤척였다.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드는 것 같았다.
“으으응.
저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그녀와 잡화점으로 향했다.
잡화점은 커다랗다. 바깥의 붉은 창고를 가리켰다.
“기름은 저기 많군.”
레나는 그 근처에서 냄새를 맡고입술을 살짝 벌렸다.
“진짜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지 뭐.”
잡화점 안에서 작은 소란을 피웠다. 주인은 휘발유도, 타르도, 병도없다고 했다.
“휘발유 냄새, 나던데?”
“아, 못 팝니다. 이미 살 사람들이 있어서. 예약이 끝났소.”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구매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살사람이란 말은 좀 이상하군.”
경비병들은 이미 화염병을 잔뜩 마련해서 거미 굴로 향했다. 그렇다면‘살’ 사람이란 표현은 이상하다.
잡화점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살 사람이 맞소. 한 번 만사는 것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파는 거니까.”
정기적으로 같은 던전에 간다는 뜻인가? 사실 같은 던전을 여러 번방문하는 일은 가능하다.
내부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지 않는이상, 거미는 얼마든지 다시 알을깔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 같은 존재가 다시 생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만.
주인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말한담. 아무튼 못 파오!”
레나는 사겠다고 좀 더 우겼고, 나는 잠시 지켜보다 밖으로 나가자고했다. 그녀는 뭔가 눈치를 챈 듯 내게 순순히 따랐다.
뒤에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흰 수염의 노인이다.
그가 나타났던 장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몸을 드러내기 직전,
- 철컥.
뒤로 돌았다.
“히 익!”
노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난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놀라던 노인은 집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도시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어차피 연기에 불과하다.
노인은 우리를 관찰했다. 잡화점의 실랑이를 보았다. 우리가 화염병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불>로 유혹한다면 쉽게 넘어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난 생의 나는 거기에 넘어갔다.
“.이걸 받게나.”
노인이, 철로 된 검은색 병을 꺼내며 말했다.
“잡화상에서 보니 거미 굴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내 마지막갑옷을 입어 준 보답이네.”
“고맙군.”
한마디 거절도 없이, 덥석 손에서 낚아채듯 바로 받았다.
“홈. 홈홈.
내 태도에 노인이 홈칫한다.
“이게 뭔지는 아나?”
“설명해 주겠지, 뭐.”
“이건 아주 귀하고 무서운 건데.
<그라스미어의 불>이라네.”
적당히 노인의 설명을 들었다.
노인은 우리에게 한 포대의 가루를 건넸다.
“쓰기 전에 이걸 몸에 뿌리게. 이걸 끼얹으면 뜨겁지 않아. 불에서 몸을 보호해 준다네.”
‘또 사기인가.’
나는 포대를 열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포대에 가득했다.
포대 속가루를 한 줌 집어, 노인에게 확 끼얹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한번 실험해 봐도 되겠지?”
“무, 무슨!”
- 콱!
나는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뜨겁지만 않겠지.”
“.r노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방염防炎 효과는 전무하다. 알면서 왜 이런 걸주지?”
“정말이에요?”
레나가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노인을 허공에 든 채 말했다.
“무슨 꿍꿍이냐. 왜 우리까지 죽이려고 한 거냐.”
“으으. 자, 자네?.“
허공에서 침음이 흐른다.
“말해라.”
“.자네,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 달그락.
나는 놀라서 노인에게 물었다.
“그게 어쨌. 아니,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너는 마법사인가?”
노인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내가 갑옷을 만든 지 벌써 오십 년일세. 갑옷 안에서 뭐가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나?”
침묵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 마물魔物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하고 죽는걸 세. 고맙게 생각해야지.”
노인의 멱살을 놓았다.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이 주저앉았다.
레나가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이 전반적으로 그녀에겐 매우 황당한 듯했다.
“아니, 할아버지. 제대로 된 걸 빨리 내놔요. 이걸 준 목적도 말 하구요. 좋은 일은 또 뭐예요?”
노인은 전부 털어놓았다. 하지만 원액에 대한 방염제 따위는 없다 고했다.
“그럼 희석해 줘요!”
우리는 1/20로 희석된 용액을 여러 통에 나눴다. 노인은<불>을 발사할 수 있는 혹철 분사기 몇 개를 더 갖고 있었다. 찍어 내는 틀이 있는지 규격이 일관되어 있었다.
‘진작 이렇게 받았어야 하는데.’
더 가져갈 게 없나 싶어 주위를 돌아봤다.
“이 투창, 괜찮아 보이는군.”
벽에 걸린 투창이 보였다. 들어 보니 무거웠다. 특별히 제작된 것 같은, 저지력에 집중한 것 같은 작품이었다.
“그건 안 파는 건데.!”
“우릴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값은이 정도면 되겠지.”
- 쨍그랑.
투창 하나당 은화 하나씩 노인에게 던져 줬다. 물론 이것보다 훨씬 가격이 비싼 물건일 것이다.
제대로 던진다면, 던전 초반 통로의 거미들 정도는 충분히 저지할 수있는 위력으로 보였다.
그 외에도 좋아 보이는 무기 등,
노인의 밑천을 탈탈 다 턴 뒤 집을 나서며 말했다.
“그놈들은 확실히 죽여 줄 테니,걱정하지 마라.”
노인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일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에게도 다른데 말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우리는 평화롭게 길을 나섰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레나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제법 상기된 표정이다.
“책 보고 알았지.”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띄운 채 대답했다.
[호감도: 38]
- 연달아 레나에게 놀라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신의 지식과 능력에‘굉장히 감명을 받은’ 상황입니다.
호감도가 지속 상승 중입니다.
[특전]
- 재능(B)
<충분히 탁월한 재능>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탯에 플러스2보정됩니다.
- 전투 감각(B)
<하나 더 열린 감각>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뛰어난 전투력.
노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약간 더 호감도가 올랐다. 저번보다 높은 호감도다.
“무슨. 책이요?”
“캐빈 애슈턴이 쓴 책. 아주 좋은 책을 쓰는 인간이더군. 찾게 되면 나에게 좀 넘겨줘.”
물론 농담이다.
그가 쓴 책은 고작 두 권 읽었고,
내용도 전혀 다르다.
“캐빈 애슈턴이요? 캐빈 애슈턴.
알겠어요!”
‘농담이라고 말해야 되나?’
살짝 고민하다 그냥 잊어버렸다.
희석한 통 하나를 그녀에게 들게 했다. 여분은 내가 들고 있지만, 되도록 그녀에게 사용하게 할 생각.
이번에는 레나를 집중적으로 성장시킨다. 효율이 압도적이니까.
그녀를 잘 키우면, 이 지겨운 반복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