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5)
“아무래도, 제가 장사에 방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장사?”
“보육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착취하는 일말입니다.”
인간의 사정이지만, 짐작은 크게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약자고 고아는 더욱 그렇다.
착취하지 않는 편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쳐 난다.
“뒷수습은 어쩔 셈이지? 한둘이 죽은 게 아니다만.”
살짝 눈을 아래로 깔아 내리며, 남자가 대답했다.
“인간의 길드에 괜히 가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해 주겠지요.”
“길드에서 전부?”
옆에 있던 레나가 대신 답한다.
“이분은, 감정사鑑定士거든 요. 높은 감정 스킬을 갖고 계세요.”
“감정 스킬이라고?”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종족 특성을 활용한스캔입니다. 그 덕에 길드에 웬만한 어리광은 다 부릴 수 있지요.”
“그런가.”
“저희 길드는 꽤 편리합니다만.
가입하시겠습니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대단히 훌륭한 회원이 되어 주실 것 같군요.”
- 달그락.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길드 같은 데 묶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와 연緣을 맺는 일은 매우 불편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죽고 다시 시작할지 모른다. 맺은 인연이 쌓이게되면, 새로운 생에서 그만큼 걸리적거리는 게 많아진다.
루비아만 해도 그렇다. 반쯤 어쩔 수 없이 맡았던 그녀가, 지금 나에게 감정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전생前生에서 레나와 얽힌 기억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여자 따위, 신경 썼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반쯤은 끌려가다시피 보육원까지 왔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그건 지금뿐 아니라 다음 회차에서도 매우 신경 쓰이는 요소가 되어 버린다.
“아니, 가입은 거절하지.”
“안타깝군요.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방문해 주십시오.”
“죽기 전엔 그럴 일 없을 거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레나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입보다. 정식 회원인지 뭔지 로이 여자가 신청할 게 있을걸. 아마준비도 해 왔을 텐데.”
그리고 슬쩍 뒤로 빠졌다. 레나가 말을 받았다.
“여기, 기여금이요. 회원 승급을 신청합니다.”
- 짤그랑.
레나가 녹아 붙어 은괴銀魂가 되어 버린 은화 덩어리를 내어놓았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 스르록.
남자의 손이 흐물흐물 녹아 은괴를 덮어 갔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점액질 손이 은괴를 한차례 쓸고지나가자, 은괴에 붙어 있던 불순물들이 옆으로 털어졌다.
“무게로 보아 전부 91로티로군요.
승급 기준인 80로티를 충족합니다.
승급을 신청하시겠습니까?”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습니다. 본부에 보낸 뒤 남은 액수는 환급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당신의 권리는 내 권리와 같습니다.
정식 길드원이 되셨습니다.”
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게 그녀가 원하던 건가?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다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레나 이야기]
- 레나가 T&T 길드의 정식 단원이 되었습니다. 정보 입수 등급이 상향됩니다.
- 레나를 통해 T&T 길드와 더욱 원활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됩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90.14% -> 90.02%]
‘시나리오. 갱신이라.’
나는 다시 시나리오 메시지를 점검했다.
<그녀를 T&T 길드 지부장에 앉혀보세요! ‘어둠 속의 조력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라는 메시지를 본다.
이 조건을 만족한다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걸까? 왠지, 거기까지 그리 머지않은 느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 드르륵.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은은하게 빛나는 석판을 내보였다.
“본부의 강령입니다. 형식적인 절차이기는 합니다만. 정회원 전환에 필요합니다. 한 번 소리 내어 읽어주시겠습니까?”
레나는 석판을 읽기 시작했다.
“.엠버에 중대한 위협을 끼치는 정보를 입수할 경우, 지체 없이 모든 통로를 통해 공유해야 한다.”
낭독이 끝났다.
“엠 버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방에 있는 셋이 모두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엠버라는 말을 듣자,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왜 서약에서 엠버를 말하는지 궁금해서. 뜬금없지 않나?”
“아, 길드의 본부가 엠버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말해 줘야 하나?’
엠버는 몇 개월 뒤<중대한 위협>
에 처한다.
제국은 대자유연합 전쟁의 첫 타깃으로, 항구 중립을 선언한 도시국都市國 엠버를 침공한다.
그곳의 건방진 아나키스트들부터 짓밟아 주겠다며 첫 번째 타깃으로^는다.
“하나 묻지.”
“말씀하십시오.”
“제국이 자유연합을 침공한다면,
엠버가 가장 걸리적거리지 않겠나?”
옆에 있던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도 오호, 하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 제국의. 전쟁 분위기를 알고 계신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아도 엠버는 침략자에게 무척 걸리적거리는 요소입니다.”
슬라임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의 정치에 대해 말하는 모습은 기묘한 추상화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품평 없이 그의 설명을 들었다.
“두 세력의 균형 사이에 존속하는 그 도시국가polis라면, 더 강대한 침략자의 뒤통수를 치고 싶어 할 확률이 높습니다. 침략자로서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죠.”
“그럼 지금이, 그<중대한 위기>
아닌가?”
내 말에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손깍지를 꼈다. 저 손가락들도, 흐물흐물하게 녹을 수 있는 점액질이 본령本領이라 생각하니 어딘가가 미끌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한 템포 쉬었다.
“레나도 정회원으로 승급했고, 그녀에게 말하면 손님께서도 바로 알게 되시겠지요?”
“맞아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앞에 놓인 커피는 삼분의 일도 줄지 않은 채였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엠버는 이미<대응>을 완료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대웅을 완료했다고?”
“그렇습니다.”
나는 몸은 가만히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르다. 뭘 어쨌는지는 몰라도, 대응은 실패한다.
‘전쟁은 일어나니까.’
그리고, 가장 먼저 잿더미가 되는 것은 엠버라는 도시다.
이 사실을 이야기해야 할까? 이 앞의 남자라면 내 말을 믿어 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마법사인가?”
“아닙니다. 감정鑑定의 스킬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전투력도 비루한수준입니다.”
‘비루한 수준이라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
“아, 지금 입고 계신 갑옷을 바꿔야겠군요. 제가 도시에 다녀오겠습니다.”
“수리는 안 될까?”
“가능할 겁니다. 다만 가격이.
“상관없다. 이걸로 부탁하지.”
“예.”
- 철컥.
갑옷을 벗어 남자에게 건넸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 필요한 건 언제나 많다. 남자가 알 만한 것부터 물어본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서 알고 싶다만.”
남자가 곤란한 표정이 된다.
“죄송합니다. 놈들과 저희는 정보공유 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자들을 공유하는 조약이죠.”
“그래서?”
“저희를 통해 놈들을 알아보신다면, 놈들에게 노출되게 됩니다.”
‘역시 그런가.’
레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단지금 정보를 얻어 내고, 죽는 선택지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자포자기식의 선택은 마지막 벽에 부딪혔을 때나 가서 고려해 볼 만한 것이다.
지금은 안전한 방법으로도,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나는 네크론 신사회의 조사를 잠깐 미뤄두기로 했다.
자살을 하더라도, 조금 더 많은 걸 알고 난 후에 결행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무엇을 알아보아야 할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잠깐 머뭇거리다 말을 뱉어 냈다.
“캐빈 애슈턴이라는 저자를 알고 있나?”
“캐빈, 애슈턴 말씀이십니까?”
알고 있다! 남자의 눈빛에서 그런 기색을 잡아냈다.
- 달그락!
흥분해서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그래. 캐빈 애슈턴. 혹시 그자가쓴 책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한 움직임까지, 인간을 많이 연구한 듯하다.
“네. 저도 몇 권을 갖고 있습니다.
개국공신인 대공大公 가문의 직계장자이자, 아쥬라의 최고위 실력자였죠.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쥬라의 실력자.
“그건 마법사란 말인가?”
“예. 탑주급의 마법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얻은 소문에 불과합니다만.
- 탁.
나도 모르게 품에서 녹아 붙은 금화 덩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남자의앞 책상에 놓았다.
“혹시 그 책들, 볼 수 없을까?”
남자는 서재에서 세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자유롭게 열람하십시오. 저도 수집 욕구가 있어서. 파는 건 죄송하지만 조금 곤란합니다.”
사실 그편이 나도 좋다. 읽으면 그만이다.
“열람료는 어느 정도 지불하면 되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책은 읽어 주는 사람이 있기에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제가 쓴 책도 아닌데, 값을 청구하겠습니까?”
그와 잠시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은화 몇 닢을 억지로 냈다.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4권>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권>
<캐빈 애슈턴과 음란한 슬라 임 메이드>
‘으음.
하지만 제목을 보고 조금 당황해버렸다. 아무래도 소장하고 싶지는 않은 제목들이다. 빨리 지혜만 을리고 덮어 버려야겠다, 싶다.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옆에서남자가 슬쩍 말했다.
“이름을 끊임없이 바꾸는 성격이라, 캐빈 애슈턴이라고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으음. 오늘 하루만 빌렸으면 좋겠는데.”
“예, 부디 편하신 대로.”
여기서 당장 읽어 보고 싶었지만,
눈앞의 슬라임에게 아직 부탁할게 남아 있었다.
“아이템 감정 하나 부탁하지.”
나는 품에서 붉은 결정을 꺼냈다.
4미터가 넘는 거대 거미를 잡자, 심장부에서 떨어진 흥옥이었다.
레나에게 맡기려고 했었지만 깜빡하고 내가 그대로 갖고 있었다.
- 탁.
홍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음울한 핏빛이 탁자 위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표면은 마치 마수의 눈처럼 보였다.
“재미있는 아이템이군요.”
남자가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손이 흐물흐물 녹아 홍옥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묘하게 형체를 잃어 가는 손을.
음울하게 빛나는 홍옥을 덮어 가는 초록빛 점액질을 바라본다.
생각해 보면 레나는, 나를 처음 보고 지나치게 친근하게 대한 감이 있었다. 역시 이 남자의 존재에 익숙해진 덕분일지도 모른다.
“스캔을 완료했습니다.”
한참 동안 구슬을 감싸고 있던 푸른 점액질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앞을 바라본다.
푸른 점액은 다시 인간의 손으로 변했다. 색도, 형태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치가 높은 구슬입니다. 오랫동안 홉혈吸대과 홉정吸精을 해온 덕분에, 상당한 에너지가 농축되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칼에 박아서 휘둘러도 되고.
가치를 설명한다.
하지만, 나에게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뜬 창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스캔 완료됨]
[웹슬링거의 흥옥]
웹슬링거는 오랫동안 인간을 주 먹이로. 통곡과 절규가 축적되어,
붉은 결정結晶이 되었습니다.
[1 차 진화(클래스 체인지)의 재료로 사용 가능]
[사이드SIDE 마물魔物 전용]
[이 아이템을 활용해 진화할 경우]
- 당신에 대한 거미류 몬스터의친화도가 ‘미세하게’ 증가 합니다.
- 거미줄 타기 Lv.l 스킬을 ‘매우 낮은’ 확률로 익히게 됩니다.
- 곤충류 몬스터에 대한 공격력이‘아주 조금’ 증가 합니다.
[진화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동화울이 내려갑니다.]
[90.02% -> 88.68-%]
[???단계의 적용은 재.]
눈앞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