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54화 (54/458)

55화 감정鑑定과 감정感情 사이(6)

일순 이명이 들린다. 세상이 하얗게 흐렸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괜찮으십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은 의미로, 괜찮지 않았다.

‘진화(클래스 체인지)라니.’

그런 게 있다는 말인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다.

이십 년 동안, 주위에 그런 일이 발생하기는커녕 그런 걸 겪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해골병사는 끝까지 해골병사다.

능력치와 스킬은 조금씩 오를지 몰라도.

그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클래스 체인지?”

“예? 클래스 체인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역시 이 남자는 모른다.

이 기묘한 상태창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가 아이템을 스캔하면, 숨겨져있던 정보가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정보들은,

나에게만 인식되는 것이다.

이 감정사鑑定士의 활용도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다소 호의적으로 말을 걸었다.

“이모저모로 고맙군. 내가 당신에게 해 줄 만한 건 없나?”

“글쎄요.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언젠가, 다른 슬라임을 보시게 된다면.

“얘기하시오.”

“약간의 호의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른 슬라임?”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멸종 위기입니다.”

‘멸종이라고?’

하긴, 슬라임을 본 적이 거의 없기는 하다. 마왕군 발호 이후에도.

“좀 더 설명해 주면 좋겠는데.”

그러자 남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슬라임은 대표적인 사냥감이었습니다. 초보 모험가들은 저희를 끊임없이 학살했지요.”

- 달그락!

나는 웃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비슷한 처지를 슬쩍 토로했다. 친목 도모를 위해서는 동질감생성이 중요한 요소다.

“해골 분들 말씀이십니까?”

“물론. 우리는 장난감처럼 매번 부서지지.

“그렇습니까. 저희는.

남자는 술술 털어놓았다.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저희는 박애주의자입니다. 인간들도, 다른 종족도 좋아합니다.”

“인간들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하면서 수많은 동포가 죽었습니다.”

무엇이든 껴안기 좋은 몸으로 태어난 슬라임은 박애주의자이며, 평화로운 종족이라는 이야기였다.

“쓸데없이 감상에 젖어 말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꾸떡 숙였다.

나는 물론 박애주의자가 아니고, 인간이나 다른 종족을 껴안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게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잘 들었다. 슬라임을 보면 호의적으로 대하도록 하지.”

- 띠링!

[라임의 호감도가 11 올랐습니다!]

‘으음.’

“???그러면, 일단 갑옷부터 고치러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하지. 아, 대장간 노인에게 의뢰는 완수했다고 전해 주고.”

“의뢰를 받으셨습니까? 받기로 한대가를 말씀해 주시면 수령해 오겠습니다.”

“대가는 선불로 넉넉히 받아서 그냥 전해 주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할 말은 끝이었다. 책을 정리해 들었다. ‘캐빈 애슈턴과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라는 책 제목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분명 그 탓일 거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 버린 것은.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슬라임도 성별이 있나?”

“.하핫. 없습니다. 저희는 무성입니다. 여체女體가 대하기 편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목 아래는 그때그때 적당히 만들고 있습니다만. 가슴이라도 만들까요? 원하시는 형태로 신체 변형이 가능합니다. 종족도,

성별도 자유롭게.

“아니, 내 실언이다.”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박애주의자라고? 역시 슬라임은 두려운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슬라임이 갑옷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간 사이, 레나는 동생과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을 따로 하나 얻어 책을 읽었다.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권>의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책을 바른 자세로 앉아 정독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대가 없이 지혜 스탯을 올릴 기회다.

불평할 계제가 아니다.

-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다음 책은?

[주인님, 이 손 좀 빼 주시겠어요?]

[미스 슬라임, 누가 보는 사람도없는데, 조금만 만져 보자구. 응?]

[아아, 곤란해요. 오믈렛을 망쳐 버릴 거라구요.]

[으으웃. 미스 슬라임의 그곳,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워.!!]

[흥분하면 몸이 산성으로 되어 버리니까요. 이런, 주인님의 손이 다녹아 버렸군요. 제 점액으로 다시 손을 만들어 드릴게요.]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가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집중해서 읽어 냈다.

그리고 몹시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는 단권이 아니다. 이건 5-1 권에 불과했다. 심지어 5권도 아니었다.

‘두렵다, 두려워.’

- 탁.

나는 책을 모두 덮었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내려, 따로 챙겨 둔 웹슬링거의 흥옥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이 구슬을 만지작거린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다.

‘진화라.’

탈피. 진화. 그 일은, 분명히 내가강해지는 데 한 기점이 될 것이다.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켜 둔 촛불이 살짝 흔들렸다. 바람이 들어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짧고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있었다. 그대로 잠들어도 될 것 같은 편안한 옷을 입고 있다.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서요.”

“동생은?

“잘 자고 있어요.”

레나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레나]

[도적 Lv.15]

[체력-21 힘-22 민첩-29 지혜-20]

[호감도: 40]

- 레나는 당신을 진지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레나를 해치려 할 경우,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충격이라.’

물론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저 헤어져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 겠지.’

나는 레나에게 물었다.

“동생을 데리고 다닐 생각인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밖은 위험하니까. 여기 있는 편이 좋겠죠. 원장님만큼 믿을만한 분도 드물고.”

≪ ? , ,

'舌、

“하지만, 자리가 잡히면 언젠가는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말이에요. 그때가 되면, 함께 살아 주실래요?”

“함께 산다고?”

“그래요. 진짜 삶을 살게 되면 진짜 삶이라.

레나는 그런 삶을 살아 본 적도 없고, 살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언젠가, 라는 말을 입안에서 맛없게 되새김질하며 이야기하다죽게 될 것 같았다.

조금은,

이 여자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 달그락.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왜 거절하시는 거예요?”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진짜 삶이어 떤 것인지 경험해 보았다.

용사들에게 짓밟히기는 했지만.

내 ‘진짜 삶’은 눈앞의 이 여자와 함께할 수 없다. 그곳까지 잠시 같이 가는 관계일 뿐이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헤어질 거다.

나는 용사들을 적대한다. 결국, 나는 인간을 적대한다.

레나가 인간계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는다면, 결국 그녀와 부딪힐 날이올 확률이 높다.

결국 이 여자는 인간이다.

먼 홋날, 언젠가.

그녀가 나와 인간 사이에서 오직 나 하나를 선택한다면.

함께 살아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여자의 동생은 너무나 평범하고, 밝아 보이는 여자아이.

그런 아이가 마물의 세계에서 함께할 수 있을 리 없다.

관두는 편이 좋다.

그냥, 함께할 수 있는 눈앞의 길만 걸어간다. 거기까지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같이 가는 거다. 그런 사이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쪽에 벗어 둔 로브를 당겨 몸에 적당히 걸쳤다.

레나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음 날 오후.

갑옷을 수리하러 간 슬라임이 돌아왔다. 갑옷은 하루 만에 말끔히 고쳐져 돌아왔다.

“빠른데?”

“저도 좀 거들었습니다. 여벌 재료가 많이 남아서, 작업이 어렵지 않다더군요.”

“???당신이?”

“예. 녹이고 붙이는 건 제 힘을 쓸 수 있으니까요.”

“노인도 당신 정체를 알고 있나?”

“그건 아닙니다. 적당히 둘러대고,

작업 공간을 받아서 도왔지요.”

실로 다재다능한 슬라임 이었다.

흉갑뿐 아니라 건틀랫과 각반, 투구까지 깔끔하게 수리되어 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으음. 고맙다.”

생각해 보면 이 슬라임은 대단히 유용한 존재다. 무엇보다 나에게 대단히 호의적이다.

초면에 나를 부수고 해체하던 인간들에 비하면, 별 이유도 없이 호의적인 이 슬라임의 태도는 내게 대단히 낯설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냥 성격이 좋은 건가.’

내 입장에서야 그저 레나를 키우면서 쭉 따라온 것에 불과하기에, 지금의 상황이 기연이라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생이 잘 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천둥이 치던 무덤을 생각했다.

끝도 없이, 진흙을 구르며 답답하게 죽어 갈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철컥.

슬라임이 건네준 갑옷을 받아 입으며 물었다.

“앞으로도 아이템을 구해 오게 될 것 같은데, 계속 감정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든 환영입니다.”

물론 맨입으로 해 달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감정료는 어떻게 지불하지?”

“같이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사는 처지 아닙니까? 마음 편하게 요청하셔도 됩니다.”

“그건 불편하군.”

거저는 거저가 아니다. 무엇보다 무거운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

“정 그러시다면.

남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깍지를끼며 말을 잇는다.

“저희 지부나, 본부에서 나오는 의뢰를 수행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디 보자.

남자는 서랍을 뒤졌다.

“마침 적당한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 산적 두목 퇴치. 그라스미어 행정관에게서 들어온 의뢰입니다. 현상금으로 기사님께 20로티가 지급될 겁니다. 좀 짜군요.”

“현상금이라니? 나는 그냥 일을 해주겠다고 한 거다.”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받은 의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그게 제 실적이 됩니다.

길드의 명성이 쌓이니까요. 대가는 당연히, 따로 받으시면 됩니다.”

“으음.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빈민이 산적이 된 거 아니에요? 경비대로도 얼마든지 토벌할 수 있을 텐데. 귀찮은가.”

“그런가 봅니다, 레나.”

“약하다는 뜻인가?”

레나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 기왕이면 조금 더 어려운 일을해 주고 싶었다.

“다른 의뢰는 없나?”

“설원 트롤 퇴치는 지나치게 어렵고, 에라스트 토너먼트 대회에서 진네이가家의 문장을 걸고 대리 참가? 이건 또 뭐람.”

“에라스트. 토너먼트?”

“예. 올해 초 새로 즉위한 영주가주최하는 토너먼트입니다. 주변에 이런저런 가문들에게 초청장을 돌렸는데. 적당히 용병을 사서 면피하는 가문이 많죠.”

슬라임은 토너먼트에 중점을 두어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것은 전자다.

에라스트.

‘루비아’가 도망쳐 나온 도시다.

“현 진네이 가문의 가주는 기사도 따위엔 전혀 관심도 없고, 피혁 장사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말을 이어 가는 남자 앞에 서서,나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루비아가 도망쳐 나온 도시에 대해.

들어가 볼 좋은 기회일까.

토너먼트라면 영주라는 놈도 볼 수 있겠지. 루비아의 삼촌이라는.

“한 번 이길 때마다 2세이론. 번쩍이는 커다란 금화를 두 개나 주는군요.”

“그렇군.”

아무래도 남자, 아니 슬라임은 이 의뢰를 꼭 나에게 맡기고 싶은 것 같았다.

“雄강 이후로는 지급 수당 없음>

이라는 추신까지 있군요. 어차피 용병을 샀으니 주목을 끌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적당히 합리적인 게, 마음에 드는 의뢰입니다. 하시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