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세 가지 벽 (4)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긴장이 느껴졌다.
‘당연한가.’
놓아두면 알아서 할 거다. 신경을 꼈다.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다들 약했어.’
토너먼트에 나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약했다. 한 합을 제대로 받을 수있는 놈이 없었다.
내가 강해진 것일까? 싸웠던 두 놈을 생각했다. 그들이 특별히 약한 놈들인지도 모른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게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한껏 긴장하고 있다가 그제야 잠든 것 같다. 인간의 나이는 대충 알아볼 수 있다. 어렸다. 열여섯이나 일곱 정도일 거다.
은은한 새벽빛이 소녀의 얼굴에 비쳤다. 입가에는 손으로 맞은 자국이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단단한 햇살이 밤을 뚫고 비쳐 오고 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던 건가.
여자가 새삼 가엾게 여겨졌다.
밤은 얌전하게 물러갔고,
- 똑똑.
레나가 찾아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즐거운 시간 보내셨어요?”
레나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양팔로 넘기며 빙긋 웃었다.
“이 아이는 잠들었네요.”
레나는 침대에서 잠든 소녀를 홀끗바라봤다. 빛이 그녀의 눈가에 머물렸다.
- 드르륵.
나는 창문에 커튼을 쳤다.
빛이 약해졌다. 소녀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너무 쉬웠다.”
레나는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을 한번에 알아들었다.
“시골 영주가 하는 토너먼트예요.
아직 정식으로 백작伯詩 위도 계승하지 못해, 자작子詩으로 불리는 영주예요.”
“그런가.
“강한 녀석들은 이미 대부분 넉넉한 고용주가 있거나, 어디 기사단에 들어가 있겠죠, 뭐.”
“.재미없는 곳에 왔군.”
“그래도 제법 하는 녀석이 하나 있어요. 오전 첫 경기예요.”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래?”
“굉장한 덩치에, 투구를 항상 쓰고있다더군요. 덩치만 큰 게 아니라 힘과 속도가 제법이래요.”
“무기는?”
“양손 검을 써요. 뭐,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지금 판돈이 다어디로 몰린 줄 아세요?”
레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내 가슴을 손끝으로 슬쩍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 톡톡.
“전부 여기로 몰리고 있다구요.”
“사실 제 생각보다도. 너무 잘 싸워 주셨어요. 다 세에레 자간이 누구냐고, 굉장히 시끄러워요.”
레나가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너무 시선을 끈 건 아닌가 살짝 걱정스러울 지경이에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레나에게 말했다.
“3승이다.”
“네?”
“3승만 하고 끝낼 거다.”
이 이야기를 레나에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박은. 알아서 해라.”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셔요.”
“반가운가.”
“안 그래도 다들 이쪽에 몰려들어서 살짝 곤란했거든요.”
높은 배당을 받으려면, 모두와 반대편에 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천천히 토너먼트 경기장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았다.
그때 였다.
“기사 자간 님!”
얼굴이 긴 남자가 다가왔다.
초면이다. 모직으로 된 고급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그는 내 옆에 서서 슬쩍 말을 건다.
“반갑습니다. 라인츠 상회의 베나르라고 합니다.”
나는 말없이 남자를 흘끗했다.
“뭐냐,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활약 을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든 생각나신다면, 저희 상회에 연락해 주십시오.”
남자가 내 갑옷에 손수건 하나를 슬쩍 꽂아 넣었다.
“저희 상회를 위해서 일해 주신다면, 지금 받으시는 봉록의 2배를 쳐드릴 수 있습니다.”
“얼마 받는 줄 알고?”
“저희는.
그 순社“참가자 분에게서 떨어져 주시오!”
멀리 떨어져 서 있던 경비병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연회장에서 봤던 얼굴이다.
‘참가자에게서 떨어져 달라고? 나를 이야기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았다.
경비병이 얼굴 긴 남자를 막아섰다. 태도가 거칠다.
“함부로 참석자들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경고합니다.”
경비병이 불량스럽게 위협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이런. 역시 방해가 있군요. 언제든 환대하겠습니다.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긴 얼굴의 남자는 웃음기를 유지한채 물러갔다.
경비가 다가왔다. 마치 호의라도 보이겠다는 것처럼 씩 웃는다.
“저희 영주님께서 기사님께 관심이 많습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경비병은 괜히 말끝에 힘을 주었다. 친한 척도 해 본 놈이 잘한다.
영 어색하다. 경비는 잠시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
루비아를 죽인 놈들과 비슷한 인상이다. 무시했다. 경비병은 곧 민망한 듯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건 또 뭐지.’
남자가 건넨 손수건을 펼쳤다.
실크 위에 상회 이름과 위치가 수놓아져 있다.
같은 일이 두어 번 더 반복됐다.
“기사님, 부디 저희 상회에.!”
“혹시 거처를 옮기실 계획이라면,
반드시 저희 가문에 대해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최대한,아니 원하시는 것 이상으로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기사님과 꼭 한번같이 일해 보고 싶습니다.”
부유해 보이는 남자들이 내게 다가오다가, 경비병의 제지를 받고 물러났다.
“역시 인기네요.”
레나가 옆에서 웃었다.
“뭐 하는 것들이지?”
“스카우트죠. 자기 칼이 되어 달라는 거예요. 돈 많은 놈들은 항상 힘센 칼잡이가 필요하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 ㅇ , ,
cT.
“영주는, 자기 토너먼트에서 영업하지 말라고 견제하는 거죠.”
- 둥! 둥! 둥!
예비 북이 울렸다. 레나가 이야기를 돌렸다.
“아, 벌써 다음 경기네요. 저 사람이에요. 한번 보세요. 둘 다 우승 후보예요.”
양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덩치가 무척 컸다. 그냥 크기만 한 건 아니었다. 탄력 있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투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같은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었지만, 갑옷의 질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금이 가고 낡아 있었다.
그리 기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기사라고 말하기 위해서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자인가?”
“네. 항상 저렇게 투구를 쓰고 있어요. 연회도 거절했다더군요.”
“난폭자 크레스틴!”
사회자가 그를 소개했다. 그는 적당히 양손 검을 위로 들어 보였다.
“와아아아.관중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군중은 쏟아지는 피를 갈구했다.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반면 크레스틴은 조용했다. 의외로 차분한 움직임이다. 투구 때문에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반대편은 차가운 창날, 웨인이라는자였다. 날씬한 중키의 남자는 작은 갑옷만 입고 있었다. 손에 든 창이아주 길었다. 2미터가 넘는 창대에서 탄성이 느껴졌다. 특별한 재질의나무로 만든 것 같았다.
- 둥! 둥! 둥!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한 번 주의 사항을 읊었다. 먼저 공격해 들어오는 녀석은 창잡이였다.
녀석은 덩치 주위를 빙빙 돌며 스텝을 밟았다.
- 피릭!
- 피리릭!
창이 빙빙 돌며 꿈틀거렸다. 가죽갑옷은 창을 길게 잡았다. 한 손을 받침대로 삼아 세차게 쏘아 냈다.
빠르게 회수하고, 다시 쏘아 냈다.
- 쨍!
양손검을 든 덩치는 안에서 밖으로 칼을 휘둘렀다.
- 챙! 챙!
덩치는 뒤로 한두 걸음을 물러났다. 하지만 자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 픽!
어깨가 창에 맞았다. 몸이 살짝 혼들렸다.
- 피릿!
창이 다시 아래로 뻗어 왔다. 덩치는 다리를 옆으로 디뎠다.
그리고 칼을 위로 들어 창잡이를 내리쳤다.
‘제법 빠르군.’
커다란 양손검이, 막 창잡이의 머리 위로 날아오던 순간이었다.
- 팟!
창잡이는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덩치의 얼굴 근처에 뿌렸다.
“큭.!”
옅은 신음이 투구 밖으로 새어 나왔다. 덩치는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래가 더 빨랐다.
흠칫하는 사이 창날이 투구를 향했다. 창은 구부러지둣 날아갔다.
- 툭!
투구가 벗겨졌다. 땅을 굴렀다.
덩치 큰 ‘난폭자 크레스틴’ 의 얼굴이 드러났다.
투구 사이로 내비치던 크레스틴의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짧은 머리. 커다란 주먹코. 얽은 볼이 드러났다.
갑자기 군중이 웅성거렸다.
“응? 뭐가 좀.
“여 자?”
“혹시. 여자인가?”
“덩치만 보면 곰 같은데?”
“목소리를 내 봐라!”
잠깐 혼란에 빠져 있던 관중들이 크레스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빙빙 돌며 창을 찔러 가던 놈도 거기에 가세했다.
“사람이랑 싸우는 줄 알았는데, 웬오우거랑 싸우고 있었네? 이게 뭐야! 결투가 아니라 사냥이었어?”
나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인간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렇게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나?
머리칼이나 옷차림, 어딜 봐도 암컷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들은 제 종족을 빠르게 구분하나 싶었지만, 레나의 말을 들으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바람잡이가 있네요. 잘 보면 여자긴 한데.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저런 반응이라니.”
그녀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미리 알았다는 건가?”
“저 웨인이라는 놈, 상대가 여자인걸 알고 있던 것 같아요.”
그때 였다.
투구가 벗겨진 크레스틴의 검은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연지라고는 한 번도 발라진 적 없을 것 같은, 수련으로 부르트고 거칠어진 입술이 움직였다.
“기사의 예의를 지켜라.”
그 한마디뿐이었다. 창잡이가 비웃었다.
“기사? 아무래도 오우거 암컷 같은데? 니 숲으로 돌아가지 그래? 우하 하하하.
군중의 왁자한 웃음이 쏟아졌다.
창잡이는 조롱을 퍼부으면서도, 긴창을 가지고 날렵하게 크레스틴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야유와 웃음에도 크레스틴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칼자루를 잡은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짧었고, 한 번도 제대로 손질된 적 없는 것처럼 거칠었다.
“효과를 별로 못 본 거 같은데.”
“네,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상처라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영 안 먹히네요.”
- 피릿!
창이 다시 한 번 쏘아졌다.
투구가 벗겨진 크레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눈가의 모래를 다 털어 내지도 않은 채 자세를 낮췄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봤다.
크레스틴이 쓰고 있던 건 시이를 크게 제한하는 투구였다. 그걸 벗어던지자 그녀의 움직임은 훨씬 빠르고 정확해졌다.
서른 합 정도가 지났다.
- 서적!
“항복!”
뱀처럼 꿈틀대던 창이 잘렸다.
크레스틴이 코앞까지 쇄도하자, 수세에 몰리고 있던 창잡이는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속도도 힘도 한쪽이 압도적이었다.
크레스틴은 상대의 코앞에서, 대검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대검은 곳곳이 이가 나가 차라리 쇠몽둥이에 가까워 보였다.
한쪽 구석으로 도망간 창잡이가 넉살을 떨었다.
“어이쿠! 영주님, 오우거도 나오는 거였습니까? 항복! 항복입니다!”
웨인이 와하하, 하고 웃었다. 군중들도 따라 웃었다. 승자에게 보내는 환호와 찬사는 없었다.
그저 저질스런 휘파람이 관중석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레나를 돌아보았다.
“왜 안 죽이지? 저런 모욕이라면 칼을 멈추지 않아도 됐을 텐데.”
레나가 어깨를 으쪽하며 말했다.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기회?”
“기사단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자를 안 받아요.”
“종자로도?”
“네. 종자로도 안 쓰죠.”
“ ?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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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을 가진 여자들이 있나 봐요.
충성, 명예, 뭐 이런 거에.”
그녀는 살짝 피식거리며 말했다.
“이런 결투 대회에 나오곤 하죠.
그렇게라도 기회를 잡으려고. 저도 이야기만 들었어요.”
“그런가."
“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경기장을 바라봤다.
2미터가 넘는 덩치의 크레스틴은, 관중들과 단壇 위 영주의 웃음을 경기장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감내하고 있었다.
영주가 다가가서 말했다.
“하하하.! 크레스틴이라고? 정체를 밝혀라. 편력 기사라고 되어있는데.
- 덥석.
크레스틴이 투구를 주웠다. 묻은 흙을 털어 냈다. 옆구리에 끼고 영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본 경기에는 자원해서 참가했습니다.”
“그런가. 하하핫. 혹시 오우거의피가 섞인 건 아니겠지?”
크레스틴이 두꺼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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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칼을 집어넣었다. 주근깨로 얽은 볼이 살짝 떨렸다. 칼을 집어넣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름을 말하게. 본명은?”
“크리스티나 더 브루이져입니다.”
그녀가 크리스티나, 라고 말할 때관중들은 다시 한 번 와하하핫 웃었다.
“크리스티나? 휘우우?”
휘파람을 길게 부는 놈도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왔다.
“브루이져 가문?”
“그 다 망했다는 가문 말이야? 거기 오우거가 있었나?”
- 철컥.
크리스티나는 다시 투구를 썼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회자가 그제서야 선언했다.
“승자. 크리스티나!”
그 순간 다시 한 번 사람들이 킥킥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