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인간성의 승리 (1)
- 드르륵.
레나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 휘이잉!
늦가을 바람이 차갑다. 공기에 조금씩 살얼음이 끼고 있다.
“이제 곧 겨울이겠네요.”
“아직 한 달 정도는 남았지.”
밖을 바라봤다.
밀밭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수확은 한참 전에 끝났다.
하지만 가을의 말엽末葉에도 밭은 비어 있지 않다.
추수가 끝난 밭을 사람들이 갈고 있다. 소도 없는지, 두 사람이 짝지어 쟁기를 끈다.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벽 안쪽, 아니 영주 성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젊은이도 없었다. 쟁기를 끄는 건 이마에 주름이 진 남자들이다. 뒤에서 비료를 뿌리고, 뭔가를심는 건 늙은 노파다.
비료를 뿌리는 노파는 몇 번씩 무릎을 부여잡으며 끙끙거렸다. 나는지 나가듯 물었다.
“괴로워 보이는군. 수확은 끝나지 않았나?”
“보리를 심네요. 저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네. 정말. 어지간히 뜯어가나 보다.”
레나가 살짝 혀를 찼다.
“뜯어 간다고?”
“밀이랑 쌀을 굶을 정도로 뜯어 가니까, 수확하자마자 저렇게 보리를 심는 거죠.”
“영주가 바뀐 것 때문인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전에는 살기 좋은 도시였거든요. 원래 이런 도시가 아니었는데.”
루비아의 부친은 좋은 통치자였던 것 같다.
어수룩하지만 종종 총기를 발휘하던 루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교육받았다면 괜찮은 영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루비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꾼들에게 자기가 정당한 계승자라고소리치며 반항하던 게 기억났다.
단검을 들고 돌진해서.
- 달그락.
나는 뼈를 들었다 놓았다. 그 뒤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괴로워졌다.
그녀가 영주였다면, 밀밭의 인간들은 저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잠시 동안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 어설픈 모습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젊은이들도 다 없네요.”
“징집한 거겠지. 훈련을 시키고 있을 거고. 성벽 안쪽에서도 보이지 않았나.”
“군사 훈련에 식량 긁어모으기. 계속 진행되긴 하는데, 정말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세요?”
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물론이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냥.”
그 외에 대답할 말은 없었다.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뭘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황제가 전쟁을 원하니까.”
레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연합과 엠버의<대응>을 믿지 않으시는 거군요.”
“그 대응이라는 게, 그렇게 믿을만한 건가?”
“객관적으로 보면 믿을 만한걸요.
‘그냥’ 아는 것보다야. 저야 물론,
우리 남편님 말 믿지만.
레나가 내 어깨로 고개를 기울였다. 은은하게 열은 향수 냄새가 풍겨 온다. 빌 베리 꽃을 베이스로 만든 연한 향수 냄새가.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냄새가 느껴졌지?’
내 후각은 향수를 하나하나 구분할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고 창밖을 바라봤다.
길이 평탄해진다. 말들이 조금 더속도를 낸다. 마차는 살짝 더 흔들린다.
바퀴 아래로 먼지가 풀풀 날린다.
위쪽까지 닿지는 않는다. 멀리 뒤쪽으로 사라진다.
눈앞에 푸른 창이 떴다.
[동화율이 내려갔습니다.]
[88.68% -> 88.61%]
‘동화율.’
계속 등장하는 말.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무언가가 새롭게 인식될 때마다 동화 을이 내려간다는 것.
처음을 돌이켜 본다.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용사를 깨물고, 두개골에 피가 쏟아졌을 때였나?
무언가가 있었던 느낌이 든다.
무언가가 ?
길드에는 금방 도착했다. 원장실에 들어갔다. 순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반색을 하며 나를 맞는다.
물론 그 정체는, 뭐로든 변할 수있는 끈적거리는 녹색 점액이다.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벌써?”
“어쩌다 보니.
원장은 창문 바깥,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흘끗 돌아봤다. 새의 발목에는 작고 검은 리본이 앙중맞게 묶여 있었다. 편지가 적힌 작은 원통이 매달려 있었을 터다.
“딱 좋을 정도로.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활약해 주셨더군요.”
뒤로 돌았다. 벽에 붙어 있는 빼곡한 갈색 서랍장을 보고 섰다.
- 철컥.
열쇠를 들어 가운데 서랍을 연다.
무겁게 쩔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꺼내어내게 건넨다.
“보수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받아서 손에 쥐었다.
3세이론을 획득했습니다, 하는 메시지와 함께 라임의 호감도가 2 올라갔다는 창이 떴다.
이런 창도 점점 익숙해진다.
“그럼 이 의뢰는, 레나가 달성한 걸로 하겠습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게 목적이다.
금화 세 개를 레나에게 툭 튕겼다.
제법 부피감이 있긴 하다.
“받아라.”
“우와. 감사합니다!”
레나는 잽싸게 받는다. 제법 묵직한 금화 세 개가 그녀의 손에서 짤랑거린다.
레나는 밝게 웃는다. 반짝이는 금화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양각된 초대 황제의 초상이 그녀의 손끝에서 몇 번이고 비벼진다.
금화의 감촉과 감도를 천천히 즐기는 것 같다.
‘그렇게 돈이 좋은가.’
얼굴에 감격이 번진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
눈 내리는 들판에 알몸으로 서 있다가, 갑자기 코트가 입혀진 것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와. 이거 무겁네요.”
“무거운가?”
세이론은 순금과 미스 릴을 섞어 만들어진다. 배합 비는 50 : 1이다. 은화에 비해 직경도 부피도 크다.
하지만 들기 힘들 정도는 아닌데.
“하하핫.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게. 무겁다구요.”
눈이 조금 촉촉해진다.
민망한 기분이다. 잘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건 전혀 이타적인행위가 아니다. 빚진 감정을 아무렇게나 푸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게, 우연히 잘 진행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관계는 언제 파탄이 날지 모른다. 애초에 인간과 마물이다.
그녀의 감격을 피하고 싶다. 내겐 과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원장을 바라봤다. 화제를 돌린다.
“이 금화들, 진네이 가문 쪽에서 대금을 받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의뢰 수행자에게는 마땅히 먼저 드려야지요.”
호의적인 태도다. 자기 돈을 먼저 꺼내 주는 것이다.
“다음 의뢰를 받지.”
“서두르시는군요.”
“아직 갈 길이 멀어서.”
말 그대로다. 토너먼트에서 인간들 몇을 가볍게 이기긴 했다. 하지만 아직 나아갈 길이 까마득하다.
토너먼트에서 만났던 놈.
그는 ‘이런 건 다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놈은 아주 진지했다.
강한 인간은 층층이 쌓여 있다는 거다. 세계에는 모르는 것투성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곤란하다.
초조한 듯한 내 반응에, 원장이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난이도 있는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만.
“얼른 해치울 테니 이야기해 봐.”
원장이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를한 모금 홀짝였다.
3개월이 지났다.
동부의 하이 랜드(고산지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국 남부도 평평하지만은 않다. 그락스 산맥의 긴 자락이 곳곳에 퍼져 있다.
그 사이사이를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독 묻은 가시로 가득한<시들어 버린 미로>를 공략했다.
붉은 눈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켄타우로스가 웅크리고 있던 <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를 클리어했다.
넝마 같은 몸을 하고 있는 구울 들이 걸어 다니던 <시체 출 금소>도기 억에 남는다.
<맹독 하이에나의 구덩이>에서는 칼끝에서 스스로 독을 뿜어내는 단검을 얻었다.
대부분, 던전을 침략하는 모험가들의 뒤를 밟아 들어갔다.
침략자도 거주자도 모두 우리의 경험 치로 만들었다.
산적 소굴을 부쉈고, 복수를 대신해 주거나 상인을 호위해 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동선은 원장이 최적으로 짜서 넘겨주었다.
돈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벌렸다.
레나는 그 이상으로 빠르게 강해졌다. 반면 내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레벨은 30까지 오른 상태에서 정체 중이다.
레벨 업 때마다 내 능력치는 1씩밖에 오르지 않는다.
해골병사라는 종족의 한계다.
서큐버스님도 그걸 안타까워했다.
반면에 레나는, 레벨 업 때마다 한번에 스탯이 4씩 오른다.
특전이 한 번 성장한 뒤에는 종종5씩 오를 때도 있다. 지나치게 효율이 차이 난다. 나중에는 경험치를 그녀에게 몰아주었다.
- 휘이이잉!
창문 바깥에는 눈발이 흩날린다.
- 타닥. 타다닥.
벽난로가 장작을 태운다. 날이 추울수록 난로는 온화하고, 따스하다.
장작 타는 소리에는 리듬이 있다.
짧다가 길어지고, 다시 짧아진다.
“따듯하다.”
레나가 작게 중얼거린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는다.
잠든 동생을 안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바닥에는 빈 커피잔이 있다.
뜯어진 쿠키 포장지 몇 개가 근처를 굴러다닌다.
“후아.
레나는 제 품에 잠든 동생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힌다.
그리곤, 뒤로 획 넘어가듯 내 무릎위에 누웠다.
갑작스럽다.
- 툭.
손을 들었다. 떨어지는 그녀의 머리를 아래에서 받친다.
“무릎에 눕지 마라.”
“왜요? 관절염 있어요? 신경통?
같이 온천에라도 갈까요?”
레나는 내 손에 머리가 받쳐진 채로, 위를 쳐다보고 키득거린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맑다. 침전되어있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다. 이런 눈동자를 볼 때면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볼 수 있는 걸까.
말캉한 수정체가 있어야 할 자리,
탁한 회백질이 서서히 침전되어 갈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텅 빈 구멍뿐이다.
세계는 어떤 정해진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때론 아무렇게나 그 설명을 망가뜨리고 훌쩍 초월해 버린다.
원래 현실이라는 게 이따위다.
“온천은 무슨.”
“왜요! 돈도 많은데. 한 달 동안전세 내서 빌려도 넉넉한데요?”
웃기는 이야기다.
“아직 할 일이 많다.”
돈이 많은 건 사실이다. 내가 벌었다고 하긴 애매하다.
각종 의뢰와 던전 공략을 숨 가쁘게 수행하며, 레나는 돈 될 만한 것들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그녀를 키워 준다고 분주하게 돌아다녔지만, 나 혼자서는 그녀가 번 돈의 십 분의 일에도 한참 못 미쳤을 거다.
금화로 가득 찬 주머니가 몇 개나있다.
금전적인 면 외에도, 레나는 이제더 이상 내 도음이 필요 없다.
나는 레나의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레나]
[도적 Lv.17] [트릭스터 Lv.13]
[사냥꾼 Lv.3]
[체력: 40 힘: 37 민첩: 53 지혜:
37]
[호감도: 60] [애정] [신뢰] [분리불안 下]
- 레나는 당신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등 뒤를 맡기는 데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 이 상대는 마음 깊이 당신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 호감도가 50을 넘으면 ‘집착’이발 생합니다. 이 상대의 특성상 뚜렷한 강요나 구속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상대는 당신과 떨어져 있으면 불안을 느껍니다.
[기본 스킬]
- 백스탭 Lv.9- 급소 공격 Lv.ll- 함정 해체 Lv.7- 파괴 공작 Lv.3[특전]
재능 (B플러스)
<보호받는 탁월한 재능>
이 특전의 소유자는 범인보다 훨씬 더뛰어난 재능과 성장력을 가졌습니다.
- 레벨 업 때마다 얻는 스뱃이 플러스2에서 플러스3까지 보정됩니다.
전투 감각(B플러스)
이 특전의 소유자는 타인과 완전히 같은 스탯을 가지고도,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 줍니다.
- 이동속도가 약간 증가합니다.
- 회피 확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 더 깊숙히 치명타를 박아 넣을 수 있습니다.
- 치명타 공격에 적중당할 확률이 제법 줄어듭니다.
※ [분리 불안 下]에 의해, 당신이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전투 감각이C플러스 랭크로 감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