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인간성의 승리 (3)
“아하하하하.!”
여자는 깔깔깔 웃는다. 당장이라도횃불을 던질 것 같다.
음직임이 빠르다.
말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걸까. 사냥감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주의인지도 모른다.
횃불 뒤로 여자의 비릿한 웃음이 너울거린다. 새된 웃음이 아래까지 전해진다.
바닥 가득한 건초와 횃불. 사냥감을 바싹 익힐 생각인 것 같다.
제법 괜찮은 함정이다.
옷이 엉망으로 찢겨져 훌쩍이는 젊은 암컷을 보면, 침착할 수 있는 인간 수컷은 드물다.
주의 깊게 바닥을 살피며 다가가기란 어렵다.
집요할 정도로 깊게 파인 함정에발을 디디면, 그걸로 끝이다.
좁은 공간이다. 도망가거나 숨을 수도 없다.
안에는 건초가 가득하다.
이곳에 불을 지른다. 바위나 쇳덩이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확실하다.
열기와 연기는 부드럽다. 단단한 갑옷 안까지 쉽게 파고든다.
그렇게 산 채로 불에 타며 질식사한다. 나쁘지 않다. 생계는 한동안 풍족했을 거다.
생각에 잠겨 여자를 올려다본다.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잡아먹는다고? 아직 그 정도로 굶주려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여자가 의도한 게 식인은 아닐 거다. 함정에 빠진 내 갑옷과 칼이 식으면, 어딘가에 팔아넘기겠다는 의미다.
횃불이 열기를 전한다. 한참 위에 있지만 느껴진다.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여자는 손가락을 편다. 아홉 개다.
하나는 잘려져 있다. 그렇지만 열부터 센다.
“1 이”
“9!”
열과 아홉을 셀 때는 어떤 손가락도 접히지 않았다. 묘한 위화감이든 다. 수탈에 반항하다가 잘린 손가락일까?
“8!”
“기”
손가락이 접하기 시작한다. 나는 좁은 함정에 빠진 채 접히는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본다. 몸을 솟구쳐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확실히 긴장감이 사라지고 정신이 느슨해져 있었다. 함정에 빠진 것은그 탓이다.
“6! 5! 4!”
수탈에 카운트다운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여자는 친절한편인지도 모른다.
나가게 되면 깔끔하게 죽여주자고 생각했다.
“3! 2! 1!”
여자가 잠시 멈칫한다.
“뭐야. 달라붙은 걸 벗겨야 돼? 어휴 짜증 나.
잠시 입술을 비죽거린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다.
“너, 협박으로 끝날 줄 알았니?”
대답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여자가햇불을 아래로 던진다. 아래로 떨어지는 횃불을 가만히 바라본다. 여자의 얼굴에 죄책감은 없다.
그런 건 오래전에 태워 버린 듯하다. 혹은 오른쪽 손가락 하나와 함께 잘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잘 타보라구!”
- 휘익!
꽤 익숙한 솜씨다. 횃불이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함정 아래는 고기 탄 냄새가 배어있다. 처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 화르르!
함정 안이 환하게 타오른다.
바짝 마른 낙엽과 건초, 앙상한 잔가지를 채워 넣은 바닥이 활활 타오론다. 불길이 나를 뒤덮는다.
‘뜨겁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화염 저항이 적용됩니다!]
[열기에 의해 2초당 0.15%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체력이 99.85%로 떨어집니다!]
[체력이 99.70%로 떨어집니다!]
꽤나 여유가 있다.
거미굴에서 강제로 선택했던 화염저항 특전 덕분.
0.3초 단위로 체력이 팍팍 깎여 나가던<그라스미어의 불>과 비교하면, 발밑에서 건초를 태우는 불은 차라리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뭐, 뭐야! 왜, 왜 가만히 있어? 뭐야, 재?! 그냥 죽은 거야?”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불길 속에 그냥 드러누웠다.
원하는 대로 발광을 해 줄 체력까지는 없다.
‘좀. 뜨겁군.’
나는 지나치게 태연하다.
지금도 생명력이 미세하게 줄어들고 있다.
해골이 불타지 않는 건 아니다.
피와 살을 가진 것들보다야 낫겠지만, 얼마든지 녹아내리고 잿더미 가될 수 있다.
[화염 저항이 적용됩니다!]
[체력이 98.5%로 떨어집니다!]
불구덩이 한가운데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지만, 체력 감소폭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물론 고통은 없다. 온도는 느끼지만 통각은 없다. 비명은 지를 줄도 모른다. 아무래도 기대에 꽤나 엇나간 것 같다.
안에 빼곡했던 마른 나뭇가지와 건초가 모두 다 탔다. 불이 꺼졌다.
구덩이 안에 연기가 자욱하다.
“죽었나? 죽었어?”
“거참, 비명은 참아도 숨은 못 참을 거 아니야. 저 안에 십 분은 있었는데, 당연히 죽었겠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퉁명스럽고 숨이 고르지 않다. 고생깨나 한 듯한 목소리다.
“왜 소리를 안 질러? 불안하게.”
“한 번에 억, 하고 죽은 거 아냐?
어이쿠. 콜록, 콜록!”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멈춰 선다. 기침을 한다.
“여보,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뭘 그리 서둘러? 가만있어. 다 식고나서, 연기 다 빠지고 들어가라구.”
“콜록! 그래, 그래야지.”
대화가 잠시 멈춘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한다. 잿더미 위에 몸을 가만히 눕힌다.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인간 죽이는 걸 좋아하는 열아홉 살의 누군가가, 커피에 적신 쿠키 서너 개를 천천히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연기가 다 빠졌다.
- 터벅터벅.
“큼, 큼! 내려가 볼께.”
- 스르르록.
아래로 긴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사다리를 타고 한 인간 수컷이 천천히 내려왔다.
- 툭툭.
그가 막대기로 나를 친다. 그리 고위로 보고 소리친다.
“응! 안 움직여!”
“그거야 당연하구!”
위에서 여자가 화답한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죽은 척하기 Lv.l이 새롭게 스킬로 생성됩니다!]
- 죽은 척하기 Lv.l (new!)
- 숙련도: 0/1,000[용감한 사람은 한 번 죽지만,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기꺼이 겁쟁이가 되세요. 진짜로 죽지 않으려면, 언제든 죽은 척하시라구요!]
메시지는 자주 이런 식이다. 이젠 슬슬 익숙하다. 아니, <원래부터>
익숙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리나 잘 걸어!”
위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남자가 내 근처에 선다.
정면에 그가 보인다.
푸석푸석한 피부. 나이에 비해 주름이 깊은 얼굴. 눈이 퀭하다. 몸은 비쩍 말랐다.
一 철컥!
그가 내 갑옷에 쇠고리를 건다. 루비아가 사 준 갑옷이다. 건드리는 게 달갑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를 죽이면, 위에서 사다리를 끊을지도 모른다.
허공에 뜬<죽은 척하기>스킬을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약간의 설명이 붙어 있다.
[종족: 해골]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보정: 모든 대상에게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안眼 계열 스킬이 없는 대상에게 추가로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25배라.’
웬만한 녀석들에게 죽은 척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 쓸모가 있을까? 적어도 서큐버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 앞에서 쓸 만한 스킬은 아니겠지.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는 남자가 소리친다.
“콜록, 콜록! 어휴, 갑옷 그을린 것좀 봐. 제값 받을 수 있을까?”
“내려가서 연기 마셨어?”
“응, 조금.”
“값은 걱정하지 마, 새삼스럽게. 그을음만 닦으면 되지. 쇠가 어디 가려구? 을라오기나 해!”
“금방 갈게!”
고리에는 갑옷이 장착됐다. 남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다.
- 드르륵. 드르록.
두 사람이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위로 올려진다.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도 좋다.
하지만 직접 올려 준다는데 굳이 훼방을 놓을 건 없다.
부부의 대화가 들려온다.
“가볍네.”
“비쩍 마른 놈인가 봐. 자기보다마른 놈 아닐까? 마른 장작이 잘타는데, 얘는 진짜로 타 버렸네! 오호호호!”
여자는 과하게 즐거워한다. 남자는 그럭저럭 장단을 맞춘다. 다정한 시간이다.
죽인 뒤에 이 함정에 함께 묻어주면, 배려가 될 것 같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였다.
- 퍼걱!
“아아 아아악!”
“끄! 끄아아아!”
살을 뚫는 파육음과 함께 비명이 들렸다.
- 퍽! 퍽!
둔기로 뼈와 살을 짓이기는 소리가 들린다.
“끼히, 끼히이이익!”
뱃속 깊은 곳에서 긁어내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 드르르록!
- 퍼걱!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사다리는 그대로다.
“히히, 히히히. 드디어 잡았다. 이 새끼들이구나? 우리 구역에서 장사하던 게?”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 픽!
“아아아아악!”
“좀 더 반항해 보지 그래? 어? 이년은 다 늙어서 성노예로도 못 써먹겠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좀 즐겁게, 꿈틀거려 보시라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연기를 이렇게 풀풀 피워 대면 뭐, 제발 잡으러 오라고 광고하는 거 아닌가? 멀리서도 쫓아왔네.”
살과 뼈를 부수고 꿰뚫는 파육음과, 비명이 들려온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여자의 비명 소리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사다리를 잡았다.
‘질주.,
[스킬<질주(Lv.2)>를 사용!]
[10분 동안 25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2/3]
E급 던전<피 묻은 승마자의 쿼터>.
그곳에서, 붉은 눈의 켄타우로스를 살해하고 얻은 스킬이다.
일정 시간 버프를 주면서도, 부작용이라는 게 없다.
- 팟!
사다리를 잡고서, 거의 튕기듯이몸을 솟구쳐 올라갔다.
순식간에 구덩이 밖.
“어?! 어어엉?”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한,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는 모, 뭐냐?”
방금 전까지 바깥에서 이죽거리던 목소리였다.
빠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도끼와 가시 박힌 쇠몽둥이, 톱처럼 뾰족뾰족한 칼을 든 다섯 남자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산적인가?’
산적들의 구역 다툼인가 싶었다.
바닥에는 비쩍 마른 남자가 머리가터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피비린내를 풍기는, 몸에구멍 몇 개가 뚫린 여자가 주저앉아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손으로 쥔 배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살아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건 내가 처리할 거라서.”
- 스르릉!
잔뜩 그을음이 묻은 칼집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디디며 칼을 휘둘렀다.
함정 안으로 횃불을 던진 여자의 목이 날아갔다. 붉은 피가 치솟았다.
피가 그을음 묻은 갑옷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 툭.
배를 쥐고 있던 손이 바닥으로 멸어지며, 목 없는 여자의 시체가 허물어 졌다.
“이, 이, 이게 뭐야?”
“저기서 살아 나온 거야?”
- 철컥.
칼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원한 없는 산적이다. 죽여 봐야 경험치도얼마 되지 않을 게 뻔하다.
- 터벅.
그들이 길을 막고 있다. 놈들은 서로 훔칫흠칫 눈치를 본다.
“가, 가자!”
놈들이 쭈뻣거리며 몇 걸음 물러난다. 무기를 내 쪽으로 향하고 서서히 뒷걸음질을 친다.
현명한 판단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도망가 버리는 건 제법 안전한 선택이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젓더미가 손으로 빠져나간다.
지도가 다 타 버린 것이다.
나는 화염 저항이 있다. 하지만 지도까지 저항을 갖출 순 없다.
“"?이거 곤란하군.”
고블린 던전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지도가 필요하다.
‘돌아가는 길은 알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다.
<죽은 척하기>라는 괴이한 스킬하나를 습득했을 뿐이다.
다시 슬라임에게 돌아가는 건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다.
“멈춰라.”
놈들을 불러 세웠다. 남자들은 일제히 긴장하며 무기를 꽉 잡았다.
실용성보다는, 고통을 주기 위해 제작한 듯한 무기들에 피와 살점이 어지럽게 튀어 있었다.
나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고블린 던전으로 가는 길을 알고있나?”
그 순간,
칼자국의 눈썹이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