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6)
수십 명의 ‘인간’이 곳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우리를 둘러쌌다. 그들과의 거리는 꽤 멀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압박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대분지. 천 명을 동원해도전부 둘러싸는 건 어려워 보인다.
그 넓은 곳에서 고작 수십 명의 인간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수천 명에게 포위당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빙 둘러봤다. 인간들의 외모는 다양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에, 어깨가비정상적으로 우람한 역삼각형 체형의 남자도 있었다.
두껍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자도 있었다.
우아하게 선이 떨어지는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가슴은 제 머리보다 컸지만 기이하게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리고도 가장 험한 절벽 사이를 자연스럽게 걸어 나와,
긴 계단 끝에 걸터앉았다.
그밖에도 수십 명의 인간이, 다들편할 대로 앉거나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를 짙푸른 터번으로 꼭꼭 싸맨 노인이 정면에서 다가왔다.
그가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터번은 두껍고 커다랬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레나에게 물었다.
“아는 얼굴들인가?”
“몇몇은 그래요. 간부 승급 시험관도 보이네요.”
레나는 왼쪽에 얌전히 서 있는 앙상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레나에게 인사한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터번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알아볼 수 없는 룬 문자들이 나선으로 복잡하게 양각되어 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맙네.”
걸치고 있는 회색 로브가 무척 어울렸다. 우스꽝스럽던 루비아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는 평생 저런 로브만 입어 온 자 같았다. 지팡이가 스스로 조금씩 떨리며 하얀빛을 냈다.
“당신은 마법사인가?”
“그냥 초라한 마술사라네.”
반복되는 시간에 대해 물어볼까 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 이쪽에 서있는 자들은.
노인이 넓게 지팡이를 움직이며,
주위를 가리켰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이네. 대부분 T&T의 간부들이라네.”
“무슨 뜻을 함께한다는 거지?”
“우리는.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뜻에서 모였다네.”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뜻이라.
“너희가 T&T를 대표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냐.”
“길드 내부의, 작은 계파 정도라고생각해 주시게.”
레나가 끼어들었다.
“작지 않잖아요? 간부 승급 시험은 당신들이 꽉 잡은 거 같던데?”
노인이 웃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적지. 하지만 그 말대로 힘은 강하다네. 자리는 물론 넘쳐나고. 지부장을 원하나? 기록 없는 정보 열람 권한?”
“.흐응.”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분석과? 수사대? 처분 전문가? 모두 얼마든지 줄 수 있다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레나에게는 매우 좋은 제안이다.
하지만 중요한 의문이 있다. 노인에게 물었다.
“레나야 그렇다 치고, 나는 대체왜 부른 거지.”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르지 않을 수 있겠나?”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자네들의 행적을 줄곧 조사했네.
놀랄 정도로 빠르게 부각하더군.”
‘너무 눈에 띄었나.’
“레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재능>
은 인간의 것이니까. 특출한 자들이 있지. 하지만.
노인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네 같은 해골은 정말이지 처음 본다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무덤에서 일어나자마자 네크론의벌레 두 마리를 죽이고, 납골당에서한동안 멍청한 인간 모험가들을 학살하고, 위험해질 때쯤 재주 좋게 빠져나가더군.”
“웹 슬 링거를 불태우고, 유블람의흉악한 경비병들을 몰살한 데다가 타락한 켄타우로스, 구울 영주와 맹독 하이에나를 살해하다니.
죽 듣고 보니 좀 민망했다.
“자네가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벌어진 일이야. 자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지금까지의 행적을 모두 조사한 듯하다. 망치와 석궁을 죽인 것까지 아는 건 조금 놀라웠다.
‘정보 길드라는 게 허명만은 아니었나. 하긴.
지금까지 쾌적하게 성장해 왔다.
슬라임이 제공해 준 최적의 장비.
빈틈없는 정보들. 그 덕에 한 번도 위험에 빠지는 일 없이 무척 빠르고 안전하게 성장해 왔다.
슬라임은 T&T 소속.
그걸 생각하면, T&T의 역량이 높은 수준인 건 당연한 일이다.
손바닥 안에서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하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져잠시 침묵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우린 자네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네.”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새로운 세상이라고? 왜 그런 걸 만들려고 하지?”
노인이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최근 고블린 던전에 다녀왔다고 들었네. 살아 있는 고블린의 머리와 심장을 쪼개서, 안에 있는 혈석을 추출하는 곳에 말이야.”
잘 쪼개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던고블린 시체들이 떠올랐다.
“그랬지.”
“최음 가스를 부락에 살포해서, 고블린들을 강제로 번식시키지.”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의 머리와 심장마저 쪼개는 모습을. 전부 자네 눈앞에서 보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가설득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표정으로, 노인이 말을 이어 간다.
“자네는 그들을 구원했네. 도망친고블린들이 모두 자네를 칭송했어.
부족의 구원자라고 말이야. 자네는 그들의 영웅이라네.”
- 짝짝 짝짝.
노인이 박수를 쳤다.
주위에서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사고와 행동을 원하는 대로 몰아가려는 박수 따위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끝까지 들을 생각이다. 요란한 박수가 한차례 지나갔다.
“자네가 살던 납골당은 어떤가. 인간들은 해골의 목숨만 억지로 붙여놓은 상태에서, 끝도 없이 착취하지 않았나. 거긴 인간들의 경험치 공장이었네.”
노인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다.
내가 겪어 온 세계가 그러했다.
- 스르록.
다음 순간, 노인은 두꺼운 푸른 터번을 풀었다.
이마에는 잘린 뿔이 있다. 잘린 단면에는 붉은 기가 돈다. 잘린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다.
‘사슴인가?’
“내 동족들도 마찬가질세. 인간에게 사육당하고 있지.”
사슴의 뿔은 인간이 좋아하는 약재가 운데 하나다. 고블린의 혈석과 비숫한 용도로 쓰인다.
“신경이 살아 있고 피가 도는 뿔을잘라 내고, 다시 잘라 낸다네.”
“빨리 자라라고 목에 영양제를 꽂고, 피까지 뽑아 마시지. 병에 걸려죽을 때까지 말이야.”
“그런가.”
“죽으면 그 시체는 냉동고에 보관하다가 갈아서 다른 사슴의 먹이로 준다네.”
“.네 뿔도 인간에게 잘린 건가?”
“내가 직접 잘랐지. 동족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네.”
‘하긴.’
저런 존재감을 가진 이족異族이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노인이 뱉어 놓는 이야기는 전부 알고 있는 거다.
구태여 공감을 유도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들이 어떤 종족이라는 건내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모든 타자池者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나 역시 인간에게서, 언젠가 만날 마스터를 지킬 작은 영역을 만들 기위해 싸우고 있다. 서큐버스님이,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런 꼴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비슷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네. 세계를, 이대로 놓아두어야 하겠나?”
“어쩌자는 거냐.”
“균형을. 조금 맞추고 싶네.”
“균형?”
“인간은 세계의 병病이 되었어. 증상을 약화시켜야 해. 일단. 숫자부터 대폭 줄여 봐야겠지.”
말은 좋다. 인간이 사라지는 만큼,
다른 이족異族과 마물魔物이 번성할 것이다. 그걸 굳이 균형이라고 부른다면 균형이리라.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 일을 누가 할 수 있지?”
인간은 이미 이 세계의 지배자다.
그 지배는 너무나 깊고, 너무나 견고하다. 나는 말을 이어 갔다.
“폭력의 우열 문제다. 당위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인의 눈이 살짝 꼬리를 그렸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호오. 물론 자네 말 대로라네. 힘의 문제겠지.”
“멸종되거나 가축이 되거나, 숨어있는 이족異族들이 그런 걸 할 수있단 말인가? 이건 분열의 문제도 아니야. 죄다 끌어 모아도 인간에게 상대도 안 될 텐데.”
의외였다. 내 말에 노인은 조금도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나보군. 훌륭해. 역시 멋진 친구야. 물론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네.”
“그렇다면?”
“인간은. 전쟁을 일으킬 걸세. 우리는 거기서 흐르는 피를, 위대한왕또께 바치면 된다네.”
푸르손을 말하는 건가. 노인이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왕께서 강림하실 걸세. 스스로 정화淨火가 되셔서, 인간들을 소각하실 거야.”
“왕이라면. 저자 말인가?”
나는 주위의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곰을 타고 사자의 머리를한 인간의 조각.
노인이 진한 감탄사를 홀렸다.
“역시. 눈치가 정말 대단하군. 범상치 않아. 지식인가? 신화에 대해알고 있는 건가?”
“뭐, 그럭저럭. 푸르손 아닌가?”
내 말에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노인이 고개를 몇 번이고 크게 끄덕였다.
“그분의 진명을 알다니! 정말 박학다식한 친구로군. 그렇다네. 설명도 필요치 않겠어.”
20년 전에서 돌아왔으면, 세계에강림한 마왕들의 이름을 모르는 편이 이상하다.
“바로 그분께!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바칠 생각이네. 제사는 준비되어있어. 공양 받은 왕께서 강림하시면. 인간은 끝이라네.”
나는 주위를 쭉 돌아봤다.
이런 그룹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삶을 돌이켜 보았다.
확실히 이때쯤 황제가 전쟁을 일으킨다.
이런 회동을 가질 정도라면. 이런 정도의 조직이라면.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너희가 전쟁을 조장했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황실의 의지라네.”
주위의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저, 전쟁을 좀 더 소모적으로 만들 생각이라네. 휴전을 방해하고, 전쟁 영웅을 계속해서 조작할 거라네. 제국과 연합은 서로를 끝없이 증오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걸세.”
노인은 잔뜩 들떠 있다. 한없이 진지하다. 제 계획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나는 이들이 가여웠다.
계획은 반만 성공한다. 전쟁은 길어지고 마왕은 강림한다.
하지만 마왕은 용사들에게 밟혀 죽고, 맞아 죽는다.
이들의 신은 응답을 준다.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제물로 받아푸르손은 실제로 강림한다.
그러나 차라리, 이뤄지지 못한 신앙이 아름답다. 세계에 강림한 신이,
걸레처럼 찢겨 죽는다면 신자들은 어떤 마음이 될 것인가.
물론 그들의 마음까지 신경 써 줄 여유는 없었다.
마왕들은 적어도 10년 동안은 인간은 마음껏 유린한다.
이자들은 거기에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어쨌건, 약간 더 실용적인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