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73화 (73/458)

74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7)

“뭐든 말하게.”

“별건 아니고. 제국이 어디부터칠 거라고 생각하지?”

노인은 고개도 갸웃거리지 않고 확답을 내놓았다.

“그야 엠버겠지.”

놀랐다. 알고 있다는 건가.

“그곳은 너희 본부 아닌가?”

“물론일세. 당연한 얘기지만, 엠버에서도 알고 있다네.”

“그러면.

“엠버는 전쟁을 막으려고 했네.”

“그런데?”

노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대응은 실패했네.”

슬라임이<대응>에 대해서 말하던 게 기억났다.

“가장 강하고 가장 흉악한 대응이. 있었네. 하지만 그 대응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네. 이후 전쟁준비는 훨씬 빨라졌지. 황실이 단단히 각성한 것처럼 말이야.”

‘전쟁을 막으려는 대응이 실패했다고? 그렇다면.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거, 너희가 막은 거냐?”

“으하하 하하.!”

그때였다. 노인이 몸을 구부리며 크게 웃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내리찍는 달빛을 흔들었다.

원형 계단 곳곳에 서서, 사방에서우리를 내려다보는 인간들 가운데몇몇이 킥킥거리며 비웃었다.

“미안하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서. 엠버의<대응>이 뭐라고 생각하나, 자네?”

물론 알 리가 없다. 침묵했다.

“나 따위가 막을 수 있는 대응은 절대 아니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들어도 막을 수가 없어. 우리가 막으면 제국이 못 막겠나? 그 라위대응이라면 엠버의 대응이라고 불릴 수도 없지.”

“그럼 누가 막은 거지?”

“누가 막은 게 아닐세. 그건 그냥<실패>한 거라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대응은 누가 막을 수 있는 게아니었는데. 결국 황실은 계속 전쟁을 준비하지 않나? 그럼<실패>

했다고 봐야지.”

노인의 어조가 진중해졌다.

“세계의 뜻인지도 몰라. 운명이야.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우린물살을 타는 것뿐이네.”

“이렇게 쉬운 일은 없지. 함께하세.

자네들도<힘>을 가지게나.”

“길드 권한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것도 물론이지. 하지만 진짜<힘>을 주겠다는 말일세.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몸에서 뭉클한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우묵하고 맑은 그의 눈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느껴지는 존재감이 순식간에 수십 배로 증폭됐다.

주위에서도 인간들의 두 눈이 검게 물들어 가며, 모습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노인의 지팡이가 연기에 녹아 스르르 사라졌다. 뿔이 잘린 자리에서,

머리카락보다 한참 긴 갈색 뿔이 위로 쑥 솟아났다.

뿔은 뒤로 살짝 구부러졌다가 중간쯤에서 다시 앞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1 자 모양.

가장 높은 끝 부분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날개 같았다. 넓게 긴 뿔에는 룬 문자가 빼곡했다.

- 뿌에에에에!

웃음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났다.

얼굴이 앞으로 길어지고 온몸에 하얀 털이 수북해졌다. 노인은 곧 네발로 섰다. 키는 성인 남자만 하고,

길이는 4미터가 넘는 커다란 사슴이 되었다.

새하얀 털이 달빛을 받아 환각처럼 빛났다. 목에는 검은 각인이 새겨져있었다.

‘.푸르손의 문양인가.’

인간들이 하나둘 변해 갔다.

- 투두두둑!

2미터가 훌쩍 넘는 키의 남자는,

터질 듯한 근육이 실제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몸이 급격히 거대화되며 전신에 긴 회색 털이 빼곡하게 덮여 간다. 코와 입이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칼날 같은 이빨이 보였다.

- 아우 우우우!

남자가 달을 향해 울부짖었다.

눈가의 붉은 흉터가 짙어지며, 은색 손톱이 길게 돋아났다.

- 파드득! 파드득!

울긋불긋한 날개를 펼친 하피도 있었다. 하피는 반은 독수리, 반은 여자의 육체를 가진 마물이다. 나체이지만, 허벅지 아래와 팔꿈치 아래부터는 깃털로 뒤덮여 있다. 이빨은 날카롭고 성정은 포악해 보인다.

- 사르르륵! 사르륵!

하반신이 수 미터로 주욱 늘어져꼬리를 치며, 몸 곳곳에 비늘이 빼곡히 돋아나는 여자도 있었다.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근육만 살짝 부풀어 오르며,검은 핏줄만 얼굴에 몇 가닥씩 서는 인간들도 드물게 보였다.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었다.

몸 주위에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피어오르거나, 전기처럼 파직거리며떠다닌다.

주위를 둘러싼 압박감이 수십 배로중폭되는 것 같았다.

공간이 꽉 조여 왔다.

‘한심하군.’

용사들에게 벌레처럼 썰릴 마왕.

눈앞의 이들은.

그 마왕 앞에 직접 서지도 못할 한참 아래의 종복들이다.

몇 번이나 다시 살아났으면서도,

고작 그런 자들에게 압박감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다.

뭔가 보여 주려는지,사슴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

앞발 주위에는 검은 안개가 진하게 뭉쳐 있었다.

사슴이 앞발을 강하게 내리쳤다.

- 콰광!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 쩌저저저적!

단단해 보이는 돌로 된 계단이, 얇은 유리가 깨지듯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십 가닥으로 난 바닥의 금 사이로 검은 뇌전이 지지직거렸다.

전격電擊의 마왕.

저건 푸르손이 가진 힘의 미약한 파편에 불과하다. 실제 마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힘에도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끼는 게 내 현실.

바닥을 내리친 사슴이 자신만만한태도로 나를 본다.

새까맣고 우묵한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주시한다.

공기 중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의 축복이라네. 지금 자네가 가진 힘을 몇 배는 증폭시켜 줄 수 있어.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 왕의강림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힘 아닌가?]

“???그런가.”

어차피 전쟁은 벌어진다.

저런 힘이라면, 격화를 조장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사슴을 향해 물었다.

“힘의 대가는?”

[그저 믿으면 된다네. 그분께서 강림하실 거라는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면 되네.]

믿음은 취향이 아니었다. 침묵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각인을 새기는 대로, 그분의 힘이 곧바로 몸에 임한다네. 이보다 더명확할 수 있겠나?]

사슴이 앞발로 제 목을 가리켰다.

“그분과의 통로만 열어 놓으면 되네. 만월의 밤마다 정해진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된다네. 의식은.

사슴이 길게 의식을 설명했다.

나는 문득 다른 궁금한 게 생겨,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

“너희는 그냥 인간 아닌가?”

모습이 변형되지 않은 채, 그냥 눈동자만 검게 물들어 있는 인간들이 곳곳에 몇 명이 있었다. 그러자 한인간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맑은 회색빛이 되기도 했다가, 다시 검게 물들곤 했다가를 반복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로브를 벗었다. 앙상했지만 제법 미남자였다. 여자로 착각할 만큼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로브 아래로 흘러내렸다.

“맞습니다. 저는 그냥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 오나?”

남자가 어깨를 으쑥했다.

“동족 혐오는 꽤 흔한 삶의 방식 아닙니까?”

“그 동족에 너도 포함되는데?”

“자기혐오는 더 흔한 삶의 방식이죠남자가 다시 어깨를 으쪽했다. 그리고 다시 로브를 썼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항상 여러분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 녀석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 발호 이후.

마왕군에 가담하는 인간은 열 명,

혹은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는 되었다.

대세에 따르는 게 좋아서 그런 자들도 있고, 이미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어 마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만 명 가운데 하나 정도는 진심으로 인간을 미워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이 멸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족을 공격했다.

푸른 로브를 쓴 남자가 뒤로 몇 걸음 물러갔다. 사슴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자네도 각인을 받게나. 균형을,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걸세.]

하지만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 패배할 광대 무리와 어울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너나 실컷 해라.”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말했다.

“굳이 말리겠다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실패할 왕에게 삶을 의탁하는 것도 선택이다.”

“신성 모독이다!”

하피가 붉은 날개를 거세게 파닥이며 소리쳤다.

“신성 모독?”

나는 비웃었다.

“지금의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능성을 보고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거늘!”

옳은 말이다. 첫 문장은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앞의 하피 하나 당해 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나의 성장 속도는 한계에 다다랐다.

가능성을 보고문을 열어 주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놈들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강해지는 느릿느릿한 속도를 보고는 약하다고 실망해 버릴 거다.

힘을 증폭시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놈들이 새긴 각인이다음 생애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꺼려졌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 그 기간 내내 푸르손의 노예가 되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떤 힘을 준다고 해도 사양이다.

“건방진 놈! 얌전히 받아라!”

하피는 자꾸 짖어 댄다. 성난 외침을 무시했다. 레나를 돌아봤다.

ㅡ넌 어쩔 셈이지?”

“했으면 좋겠어요?”

어떨까. 그녀가 이들에게 붙게 되면, 시나리오는 간단히 달성할 수있다. 내 궁금증은 해결될 거다. 하지만 남은 시간선의 그녀는? 푸르손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그의 몰락이후에는 모든 힘을 빼앗긴 채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10년은 즐거울지도 모르지. 그 하지만 그 뒤에는 몰락한다. 모든 힘을 렛길 거야.”

“예언자 나셨네. 정말, 몰라서 물어요? 100년을 잘나가도 혼자서는 안해요. 같이한다면. 오늘 죽어도 상관없어요.”

레나는 팔짱을 끼고 나를 흘겨봤다.

[거절할 줄은 몰랐네만. 의외로군, 그래. 모든 인간을 가축으로 만들겠다는 얘긴 아닐세. 그랬다면 저들이 함께하지도 않았겠지.]

사슴이 턱짓을 하며 주위의 인간들을 가리켰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의 뜻에 이의는 없다. 그냥.

싸움에 질 개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때 였다.

“신성 모독이다!”

- 퍼드드득!

좋아하는 단어라도 되는 걸까.

내 태도에 열이 뻗쳐 있던 하피가그 말을 또 다시 내지르며 빠르게 날아왔다.

깃털 사이로 빠져나온 길고 날카로운 발톱에는 파직거리는 검은 기운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빠르고 강해 보였다.

‘막을 수 있을까?’

레나가 소리쳤다.

“멈춰요! 곱게 나가게 해 주지 않으면.

그녀는 갖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바닥에 특 놓았다.

손을 획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낭입구가 자동으로 풀리며, 빼곡히 박혀 있는 폭죽 발사대가 드러났다.

“이게 다 하늘로 쏘아지게 되어 있어요. 제국군 신호탄이에요!”

하피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저런 건 또 언제 홈친 거야?’

침음과, 매도하는 소리와 비웃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레나는 굴하지 않고 끗끗이 할 말을 했다.

“여기서 이게 쏘아지면, 당분간 여긴 뭔가 하고 수색이 들어오겠죠?

귀찮은 거 싫잖아요. 그냥 우릴 보내 주지 그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