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1)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
깜깜하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자욱하던 신호탄의 연기도, 보름달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둘러싸던 수십의 짐승도 없다.
육중한 동굴 벽이 나와 세계를 분리한다. 주위를 흘끗 본다. 풍경은 고요하다. 레나가, 언제나처럼모포 위에 잠들어 있다.‘여기인가.’
녹아내렸던 온몸이 다시 달그락거리며 움직였다.
갑옷도 칼도 그대로.
놀라지 않았다.
이 루프가, 세계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제 익숙하다.
‘몇 번이지? 일곱 번? 여덟 번?’
용사에게 죽었다. 망치와 석궁에게 세 번 연달아 죽었다. 트롤에게 죽었다. 푸른 갑옷에게 죽었다.
<불>에 녹아 죽었다. 마지막으로, 푸르손을 섬기는 T&T의 간부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꽤 길었나.’
그런 생각이 났다. 직전의 삶은 제법 길었다. 그냥 길기만 한 게아니었다.
던전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처리한 산적과 인간 모험가만 해도두 자릿수가 넘는다.
심지어 에라스트에 직접 들어가,영주가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위험은 없었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다. 그냥 주어진 일만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빠르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모두 슬라임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T&T의 백업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기 때문. 하지만 또다시 그들과 연관될 수는 없다.
‘그건 안 돼.’
저번 삶에서 나를 죽인 게 바로그 슬라임이니까.
그는 갑옷 사이로 흘러들어 왔다.
머리뼈도 다리뼈도, 햇살 아래 눈송이처럼 녹여 버렸다.
그 감각은 치욕적이라기보다 압도적이었다. 몸이 흠칫 움츠러든다.
인간 아이들을 좋아한다던 그 슬라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슬라임이 속한 T&T 내부의 이너서클. 섭외를 거절하면 살해당한다.
각인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거절할 입장.
녀석들과 얽히는 건 위험하다.
‘레나 말을 들었다면 괜찮았을까?’
그녀 말대로 도망쳤다면.
녀석들은 우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곧 전쟁이 벌어지고, 그걸 격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을 테니. 레나는 감이 안 좋다고 몇 번을 경고했다.
그녀의 감이 옳다는 건 안다. 그 장소에 간 건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녀까지 억지로 휘말리게 한 동반 자살. 사실 어렴풋이 알았는지도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레나까지 죽게 될 거라고.
알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죽을 장소로 뛰어들었다. 그녀까지 던져 버렸다.
지독한 짓을 했다.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되돌아온다.
슬라임에게 죽은 나와, 지금의 나사 이엔 뚜렷한 연속성이 있다.
시간은 분절된다.
그러나 존재는 같다. 기억과 자아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힘, 민첩, 체력, 지혜. 가진 기술 하나하나까지.
하지만 레나는 끝이다.
사슴의 마법에 몸이 굳었던 레나.
슬라임에게 녹아내려, 바닥에 비취목걸이만 남겼던 그녀는 없다.
그 세계의 레나는 완전히 죽었다.
이제 어디서도 만날 수 없다.
죄책감이 나를 휘감는다.
한참 늦은 채찍질이다. 고통을 느낄 자격도 없다.
뻔뻔하게도,
? 띠링시효과음은 언제나 명랑하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해골병사 Lv.l(120)]
[체력一53 힘一55 민첩一55 지혜-28]
‘똑같군.’
레벨은 1로 초기화되어 있다.
하지만 레벨 1에 가질 수 있는 능력치는 아니다.
체력과 힘, 민첩이 전부 50을 넘는다. 게다가 레벨 30 정도까지는 금방 올릴 수 있다.
객관적으로 대단한 스탯.
조무래기를 상대하는 건 쉽다. 산적 토벌이나, D랭크 모험가 정도까지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 "?후.,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스탯을 올린다고 해서, 웨어울프 발도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슴 아에자르의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까?
천천히 휘두르는 검집으로 나를 반으로 갈랐던 푸른 갑옷을 어쩔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창을 쭉 내렸다. 스킬과 특전이 펼쳐진다. 스킬은 검술과 질주.
그 외에 별다른 건 없다. 특전은 화염 저항, 관통 저항이 주요하다.
[E마이너] 랭크의 통찰도 있다. 물론 전혀 쓸모없는 수준.
슥슥 창을 치웠다. 새로운 창이나타난다. 빨리 봐 달라는 듯 메시지가 밀려온다.
[사망기념관]
[계승된 이후 일곱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1. 네크로멘서의 연인2. 둔기 저항3. 두개골 저항4. 화염 저항5. 산성 저항(new!)
수식으로 계산하기 힘든 초산Superacid 에 녹아 죽으셨습니다.
산에 닿았을 경우, 반사적으로 신체를 중화시킵니다.
- 산성 저항이 20 상승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될 거예요!
산성 저항이라.’
어차피 슬라임을 피해 다닐 생각.
그와 싸울 일은 없다. 굳이 산성저항을 익힐 필요는 없다.
게다가 고작 20 정도의 저항이다. 슬라임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섯 번째 선택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도 전,一 띠링!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네크로멘서의 연인: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사망기념관 목록 중에서.
호감도 특전이 강제로 장착된다.
다른 특전을 키우기 전에는 계속이 특전이 강제되는 듯하다.
‘계속. 다른 방식으로 죽어 봐야하나?’
그래야 새로운 특전을 장착할 수있을지도.
[네크로멘서의 연인]에 딱히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실용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이 특전은 네크로멘서들의 호감도를 크게 올린다. 그들의 사령술숙련도를 약간 올려 준다.
쓸모가 없다.
이번 삶에서, 나는 혼자 움직일 계획이니까.
‘일단 레나는 좀 키워 주고.’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최대한 빨리 떨어져 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의 상태창을 열었다.
- 띠링!
뭐가 좀 이상했다.
레나의 이름 위에, 처음 보는 메시지들이 떠 있다.
[동화율: 88.119%]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달성 호감도(60)에 따른 초기보정이 이루어집니다.]
[달성 레벨(30)에 따른 초기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보정이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름: 레나]
[호감도: 11]
[호감도 상한: 60] ( 플러스 )
[도적 Lv.5]
[트릭스터 Lv.l] ( 플러스 )
[사냥꾼 Lv.l] ( 플러스 )
[체력: 21( 플러스 )
[힘: 19] ( 플러스 )
[민첩: 25] ( 플러스 )
[지혜: 19] ( 플러스 )
[다음 특성이 강화됩니다.]
- 탁월한 손재주: 대부분의 무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종류라도 몇 번 만져 보면 금세 익숙해집니다.
- 범죄 친화: 그녀는 인간의 도덕률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찔리지 않습니다. 찌릅니다. 털리지 않습니다. 팁니다. 금기는 없습니다.
경비들에게 마약을 품니다. 영주의성에 불을 지릅니다.
‘변했잖아?’
능력치가 그대로가 아니다.
하나씩 천천히 계산해 보았다.
처음 보았던 그녀와 비교해 도합32의 스탯이 올랐다.
기본 스킬과 특전, 칭호에는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직 낮은 호감도 때문인지, 세부내역은 보이지 않았다.
[동화율: 88.119%]
이라는 글자를 뚫어져라 가만히 바라봤다.
[동화율: 88.118%]
그러자 끝자리가 이지러지며 숫자가 하나 변했다. 계속 노려보자,[동화율: 88.117%]
숫자는 8에서 7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신경쇠약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
살과 근육이 다 떨어지고 뼈만 남았는데 대체 뭐가 쇠약해진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라는 게원래 이따위가 아닐까?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동화율이 떨어졌습니다!]
[동화율: 87.75%]
메슥거리는 어지러움이 덮쳐 온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레나를 바라봤다. 특성이 강화된다는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범죄 친화 특성은 우습다. 손재주특성은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가.’
스탯도, 스킬도 그대로인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낫겠지만.
- 터벅터벅.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캐빈 애슈턴의 책 두 권이 보인다.
차르룩.
지혜나 올릴까 싶어 책을 펼쳤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죽고 다시 살아나면서, 한 번에 들어온 정보량이 너무 많다.
책을 다시 덮은 순간.
“후아아암.
레나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눈에 살짝 물기가 고였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허공에서 잠시 시선이 얽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목소리가 몽롱하다.
전에는 저런 말이 없었다.
꿈 애기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무슨 영향을 받은 걸까?
호감도 달성에 따른 ‘초기 보정’
같은 것들 때문일까.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꿈을 꿨다고?”
레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냥. 이상한 꿈을 꿨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몽롱한 표정이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더 묻지 못했다.
“끄으으웃????"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한 태도로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팔다리를 쭉쭉 폈다.
뼈 사이에서 뚜두둑 거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레나가 품에 손을 넣었다. 나에게 손을 내민다. 손에 줄 달린 작은 장식이 있다.
“저.
어머니의 펜던트다.
“신뢰의 증표인가?”
레나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받아 두지.”
나는 팬던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목에 걸었다.
그러고 싶었다.
- 툭.
낡고 작은 장식이 뼈에 닿았다.
아련한 기분이 몸으로 퍼져 나갔다.
레나가 나를 바라본다.
“목에 걸어 주시는 거예요? 보석은 가짜예요.”
“사연만 진짜면 상관없어.”
“사연. 이요?”
“신뢰의 증표라며. 뭔가 있지 않겠어?”
당황한 기색이다.
레나가 눈을 몇 번 깜빡인다.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뜬다. 현재 호감도는 14로표시되고 있다.
묘한 일이었다.
‘안 받았을 때도 올랐는데.’
인간에게는 악의로, 나에게는 호의로 가득한 이상한 여자다.
빛이 바랜 큐벅을 조심스레 갑옷 아래로 집어넣었다. 이제 그녀와헤어지면, 레나를 기억할 물건 은이 목걸이밖에 없다.
기념품 하나쯤은, 갖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나는 못을 박는 것처럼, 단호하게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떨어진다.”
“.네?”
당황한 기색이다. 나는 멋대로 설명을 이어 갔다.
“유블람으로 들어가서.
레나에게 지금껏 거쳐 온 던전들과 의뢰에 대해 전부 말했다.
자세한 위치.
던전에서 처할 수 있는 위험.
각 던전의 보스를 상대하는 방법.
중간 중간에 의뢰를 받아 처리한,인간 산적들이 재화를 숨긴 장소.
하나하나 전부 다 털어놓았다.
“어.
레나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런 걸. 왜 저한테 말해 주시는 거예요? 같이 가면 되지 않아요?”
- 달그락.
단호한 척 고개를 젓는다. 지금껏 그녀를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 전부 나 때문이다.
“나는 떠난다.”
“떠난 다구요?”
갑작스러운 통보의 연속에서 레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래.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원장을 조심하라고 말할까 했지만, 관뒀다. 레나는 감이 좋다.
위험은 알아서 피할 거다.
슬라임에 대해 경고해 봐야 괜한 위화감만 주겠지.
나만 없으면, 레나가 T&T의 이너 서클에 섭외될 가능성이 꽤 줄어들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는 인간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여기에 보름 정도는 있어도 괜찮아. 한 달은 넘기지 마라.”
한 달 뒤에는 푸른 갑옷이 온다.
녀석에게선 시체의 악취가 났다.
아예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
“보름. 알았어요.”
“다른 것도 다 기억했지?”
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서. 다시 만나요? 진짜 갈 거예요?”
“만날 일 없어.”
“오래 매달아서 미안하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살아.”
- 팟!
나는 밖으로 몸을 튕겨 빠르게 빠져나갔다. 왠지 부끄러웠다.
아예 <스킬: 질주>를 사용해서 도망쳤다. 당황한 채 굳어 있는,레나의 기색이 점점 멀어져 갔다.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건 옳은 판단이다. 이건 옳은.
여기서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
나는 죽음을 거듭하며 여기저기 부딪쳐 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누군가와 얽히게 되면 곤란하다. 상대의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상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식이라면,마음이 조금씩 닳아 버리게 된4???아.
- 팟!
세차게 땅을 디딘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갔다.
[질주의 유효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10분이 지나, 질주의 유효 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 서서 두개골을 잡고 깊이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난 어디로 가지?’
레나를 두 번 연속 죽게 한 죄책감에, 서둘러 그녀와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다.
대책도 없다.
레나와 떨어지기만 한 것이다.
알고 있는 던전은 전부 레나에게다 말해 줬다.
내가 갈 수는 없다.
내 영향을 받아 시간선이 뒤틀려버릴지도 모른다.
기껏 그녀에게 준비해 준 선물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양손에는 캐빈 애슈턴의 책이 각각 한 권씩 들려 있다.
읽다가 집중이 안 되어 덮었는데,
엉겁결에 들고 나온 모양.
‘일단 이거나 읽어야겠군.’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오른다.
지혜 스탯을 올려서 해가 될 일이 있을 턱이 없다.
‘밖에서 읽는 건 좀 그런가.
어디 조용한 곳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망령의 납골당이 딱 좋았다.
하지만 방금 뛰쳐나온 터.
짧게 고민하던 나는, 곧 목적지를 정했다.
‘거기로 가면 되겠군.’
목적지는 <메마른 지하 묘지>.
E급 던전. 망령의 납골당과 가장 가까운 던전이다.
다른 던전들보다 훨씬 가깝다.
여기서도 금방.
저번 생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미 새끼한 마리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횃불도 없었지.’
하지만, 최심부 홀에는 을올이 야광주가 박혀 있던 게 기억난다.
一 터벅터벅.
나는 <메마른 지하 묘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책 읽기 딱 좋겠군.’
그런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