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2)
다시 한 번, 가을이 한창이었다.
동굴에서 돌아오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레나와 함께 걸을 때보다 여름에더 가까운 시기다. 하지만 혼자 걷는 가을 길이 훨씬 추웠다.
- 투두둑!
낙엽을 밟고 오소리가 지나갔다.
레나가 보면 좋아했을까 싶다.
지도는 없지만 여기에서 묘지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레나가 없어도 햇갈릴 일은 없었다.
유일한 갈림길이라면, 이곳 삼거리뿐이다.
세 방향으로 길이 갈라지는 곳.
<메마른 지하 묘지>방향인 오른쪽으로 접어들 즈음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오른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말을 탄 병사 네 명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 잘 벼린 무기로 보아 꽤 훈련된 놈들인 것 같았다.
나는 수풀에 몸을 숨겼다.
‘좀 애매한데.’
깊은 산속까지 순찰을 도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건성이지만,수풀까지 포함해서 곳곳을 훑어보며 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주치게 된다.
‘먼저 죽일까?’
인간들은 타자의 투구를 벗기길 좋아한다. 결국 죽일 수밖에 없다.
먼저 공격하고 경험치나 얻을지,아니면 좀 더 바깥쪽에 숨어 놈들을 보낼지 잠시 고민하던 순간.
왼쪽 길에서도 인기척을 느꼈다.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一 히히힝!
병사들이 탄 말이 울부짖었다.
인마의 시선은 왼쪽 도로를 향하고 있다. 병사들의 맞은편에는 검은 머리 남자 하나가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장발의 검은 머리를 하얀 머리띠로 묶고, 도복 같은 붉은 옷만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허리에는 긴 칼이 있었다.
칼의 모양은 묘했다.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 남을 만큼 손잡이가 길었고, 칼날 길이는1미터에 가깝게 길었다.
칼날은 곡선 형태였는데,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도刀 형태였다.
‘얇군.’
폭넓게 쓰이는 바스타드 소드와비교하면 검신이 얇았다. 두꺼운 부분이 없었다.
어지간히 솜씨 있게 제련되지 않았다면, 대검과 부딪쳤을 때 부서지거나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멈춰라!”
말을 탄 네 명의 병사가 남자에게 창을 겨눴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그냥 걸음을 조금 늦췄다.
나는 도복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병사들이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거리를 재고 있었다.
긴 칼집의 각도가 곧바로 빼기 쉽게 기울어지는 게 보였다.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병사들은 남자에게 창을 겨눈 채 물었다.
“누구냐?”
남자가 대답했다.
“응? 그냥 사람인데.”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간첩 수색을 위해 정찰을 돌고 있다! 정체를 밝혀라!”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간첩 수색? 이런 뻔하고 안전한길로만 다니면서?”
“뭐, 뭐야?”
“날 보면 제발 피해 달라는 복장을 하고 있는 주제에, 뭐? 간첩 수색? 급료 도둑질이 아니라?”
긴 칼을 찬 남자의 목소리는 거의 놀리는 투였다.
“이, 이놈이!”
말에 탄 병사들은 표정이 일제히일그러졌지만, 상대에게 느껴지는 기색이 심상치 않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듯했다.
“이, 이놈이!”
“신분을 밝혀라!”
병사들이 살짝 겁먹은 투로 말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첩 맞아.”
“뭐.?”
“간첩 맞다고. 그럼 어쩔 건데?”
“포위해!”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남자에게 찔러 갔다. 방패가 없는 적을 상대로 창은 대단히 위협적이다.
기본은 되어 있는 병사들인 둣, 말위에서 창끝을 아래위로 흔들며 남자를 찔러 갔다.
아래위로 찔러 오는 네 자루의창은 웬만한 동체 시력이라도 혼란스럽기에 충분하다.
- 스룽!
一 서걱!
푸른 칼빛이 휘둘러졌다. 바람이 불었다.
두 자루 창이 동시에 잘려나갔다.
도복 남자는 앞으로 두 걸음을 디디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칼이 뒤쪽의 두 자루 창을 향해 날았다.
- 서격!
- 투둑! 투두둑!
뒤쪽의 두 자루 창이 바닥에 다시 떨어졌다.
훌륭한 발도拔刀다.
뛰어난 재능과, 그동안 쌓아 왔을 고행이 느껴졌다.
못 잡을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수련은 좋았지만, 단순한 빠르기나 힘은 내 쪽이 앞설 듯했다.
에라스트에서 만났던 크리스티나보다 한 수 반 정도 앞서 있었다.
하지만 검집에서 뽑혀져, 푸른 예기를 줄줄히 내뿜는 칼이 제법 범상치 않아 보였다.
一 히 히힝!
네 마리 말이 모두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려 했다. 병사들도 사색이 되어 질려 버렸다.
그 얼굴 본 남자가 소리쳤다.
“농담이다, 멍청한 놈들. 간첩은무슨.”
도복 남자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첸들러 남작이다.”
“아, 그라스미어의 공자님 아니십니까?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무사수행을 떠나셨다고.
“그래. 무기는 내 성에 가서 받든지 해라.”
남자가 품에서 증표 같은 것을 그들에게 던져 줬다. 금속으로 만든 작은 패였다. 무언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일 자주 있으니까, 무기는아버님이 알아서 내주실 거야.”
“그라스미어의 무기는 제국 제일이죠! 영광입니다!”
병사들은 굽실거리며 다시 가던 길을 갔다.
‘뭐지?’
기묘한 조우를 보고 잠시 수풀에더 숨어 있었다.
자신들의 임무가 장난처럼 취급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둣, 병사들이 자연스레 길을 가는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라스미어의 공자라.’
영주의 아들쯤 되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듣자 루비아가 떠올랐다. 우리는 그곳에 들르려 했다.
뜨거운 대장간의 도시에.
지금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미갑옷은 있다. 특별히 좋은 무기의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그라스미어에 들른 뒤. 월 하려고 했더라?
‘엠버.’
그 뒤에 엠버로 향하려 했다.
‘엠버라.
T&T의 본부가 있는 도시.
루비아가 가고 싶었던 도시.
전쟁이 터지면, 역설적으로 가장먼저 젯더미가 되는 중립 도시.
어떨까.
이번 생은 그 도시를 목표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다.
전쟁은 곧 벌어진다. 일 년 후의엠버는 잿더미와 폐허뿐이다.
수천 개의 자치령은 하나하나 모두 숨이 끊어진다.
그곳에 가 볼까.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무정부주의자이신가? 해골에겐 국가가 없으니 정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루비아의 말이 떠오른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도복 남자와 한바탕 한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지, 경비들은 이쪽은거의 훑어보지도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쓸데없는 소란은 피했다.
- 스르룩.
수풀에서 걸어 나왔다.
원래의 목적지인 <메마른 지하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가도 책은 읽고 갈 생각이다.
아래로 졸졸 냇물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건녔다.
긴 나무 사다리를 쓰러트려 만든 엉성한 다리다. 이제 곧 도착이다.
저 멀리 보인다.
? 쏴아公]?아.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저 아래로 가면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텅 비어 있을<메마른 지하 묘지 >.
독서에 최적의 환경일 터.
하루 정도 책을 읽으며 천천히 휴식한 뒤, 길을 떠나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문득, 둥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시야가 바닥을 향해 하강했다.
방금 본 레나의 모습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죽는. 건가? 왜? 어떻게?’
- 툭.
가느다란 의식이 끊어졌다.
그대로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System message]
[시전자의 <종족: 해골>에 대한이해도가 EX랭크입니다.]
[대상을 있을 수 없는 상태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잠에 들었습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87.0413% .]
[.까지 2.0413.]
온통 어두웠다. 의식을 차렸지만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만이,
허공에 막 떠올라 올 뿐이다. 나는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숙면에 들었습니다.]
[마음에 쌓인 독소가 씻깁니다.]
[자괴감이 약간 완화되었습니다.]
[죄책감이 약간 완화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잠에 익숙해지면,<꿈>을 꿀 확률이 발생합니다.]
[<꿈>은 잠의 효과를 방해하고,종종 특별한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잠? 이게. 잔다는 건가?’
내가 겪는 건 처음이다. 레나가자는 건 많이 봤다.
첫날밤을 살아남았을 때, 루비아가 동굴에서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잤던 것도 기억난다.
斗스터 서큐버스는 굳이 잘 필요는 없는 것 같았지만, 놀이처럼 잠에 들곤 했다.
처음에는 죽는 건가 싶었다. 의식이 툭, 하고 꺼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다시 깨어났다.
의식이 나간 뒤 다시 들어오는 건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메시지 아래.
또 다른 메시지들이 빼곡하다.
[결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전능全能 감소>
< 감속 >
<항마降魔 억제>
<시야 억제>
[시전자의 <종족: 해골>에 대한이해도가 EX 랭크입니다. 결계의 위력이 4,000%까지 증가합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당신의<모든 능력치>가 97% 감소된 채 발현됩니다.]
[시야가 97% 감소합니다.]
‘결계?’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내 상태를 천천히 돌이켜 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 시야를 박탈당하자 시간이 낯설어진다.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짧은 시간이 무한히 길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긴 시간을 아주 짧게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 똑.
_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동굴인가.’
울퉁불퉁하고 단단한 돌바닥과,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물방울 소리로 보아 동굴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전능 억제가 조정됩니다. 스탯이85% 감소된 채 발현됩니다.]
[시야 감소가 조정됩니다.]
- 달그락.
몸에, 아주 약간 힘이 들어온다.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바닥이 딱딱하다. 앞으로 몸을 구부려 일어났다. 그 정도만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농락당하고 있다.
‘결계. 라고 했나?’
몸이 무거웠다. 거대한 철추 수십 개를 매단 감각이다. 하지만 강한 능력치에 지나치게 익숙해졌을 뿐.
처음 무덤에서 일어날 때는 결국이 정도였겠지.
주위로 손을 휘저었다.
아직도 새까만 어둠뿐이다. 아래로 몸을 더듬었다. 갑옷이 벗겨져있다. 딱딱한 뼈가 드러난다.
툭. 투둑.
손끝으로 두드려 본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척추, 갈비뼈, 골반이다. 줄곧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만져 볼 일이 없었다.
두 가닥 아래팔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
한기가 와 닿는다. 새삼스럽다.
- 달그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머릿속에 음성이 울려 퍼진다.
두개골에 <각인>되는 것 같은 소리다. 머리 안쪽에 거대한 종을 치는 것 같다.
‘으음.’
E급 던전 <메마른 지하묘지>를향해 가고 있었다. 케빈 애슈턴의 책을 양쪽에 쥔 채로, 조용히 책을 읽을 공간을 향해서.
작은 소란을 피해 수풀에 숨었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러던 도중의식이 꺼져 버린 것이다.
‘.까마득하군.’
내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저번 생을 떠올렸다.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슬라임의손바닥 안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무력武刀의 차원이 아니라,전반적인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
이번에는 다시 살아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식을 잃고 알수 없는 공간에 떨어져 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목적도 모른다.
그래도 희망적인 몇 가지가 있다.
묶여 있지 않다. 통중도 없다. 마치 조심스레 들려져 운반된 것처럼.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관람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폐기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 달그락!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뒤에서 났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해골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그러했다. 나와 비슷한 크기의 녀석이다.
키가 살짝 더 크고, 턱뼈가 조금 더 발달해 있다는 정도가 다를까.
콧구멍도 약간 더 크다. 유의미한차이는 아니다.
그밖에 는.
주먹을 좀 썼던 걸까. 몸에 비해손가락 마디가 제법 굵다.
나는 녀석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녀석이 나를 이 장소에 납치한 건 아닌 듯하다. 그러기에 놈은 너무 초라하고 약해 보인다.
느리다. 허술하다.
? 딱딱! 딱딱!
녀석이 이빨을 세차게 부딪친다.
적의가 느껴진다. 나를 공격하려는 것 같다. 혹시 말을 거는 걸지도 모른다. 잠시 기다렸다.
기다림의 대가는 혹독했다.
가까이 다가온 녀석은,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힘은 약간 있지만, 전혀 빠르지 않다.
빠르지 않.
- 빠각!
나는 그 녀석보다도 느렸다.
뼈로 만들어진 주먹이 내 두개골을 때린다.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 달그락!
비참하게 뒤로 몇 발자국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살짝 몸이 뜬 것 같기도 했다. 가벼운 펀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몸도 가볍다.
- 탁!
둥이 곧 벽에 부딪혔다. 더 물러날 수도 없었다.
양손으로 주먹을 단단히 그러쥔 녀석이 내게 다가왔다.
- 달그락! 달그락!
주위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기로 쓸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