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4)
결국.
당해 내지 못했다.
- 뚜둑!
양팔이 뒤로 꺾였다. 트롤 해골 두 마리가 좌우에서 날 제압한다.
“크워어어.
나보다 세 배는 클 것 같은, 트롤해골의 커다란 손.
내 팔꿈치가, 손목이 잡힌다.
뒤로 꺾여 단단하게 쥐어진 팔은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 덜커덕!
양쪽에서 올라탄 트롤 해골들.
엄청난 완력이다.
두 마리가 동시에 짓누른다.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겠군.’
턱이 바닥에 내리꽂힌다. 바닥은 차갑다. 울퉁불퉁하다. 충격으로 몸이 떨린다. 헛된 줄 알면서도 나는 발버둥쳤다.
- 달그락! 달그락!
두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 콱!
곧 트롤 해골들의 커다란 발에 단단히 깔렸다.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묵직한 무게에 사지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나보다 훨씬 컸다. 훨씬 더 무거웠다.
‘.이런.’
온몸을 뒤틀었다.
생각으로만 그랬다. 실제로는 꼼짝도 못 했다. 괴로운 와중에 한편,
의문이 마구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상황은 그 정도로 괴상하다.
‘트롤이 이렇게 통제되는 녀석들이라고?’
움직임이 무척 체계적이다. 실에 매여 있는 듯하다. 철저히 훈련받은 것 같은 정교함.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그렇다면 떠오르는 의문은.
‘대체 누굴까?’
무덤에서 인간 해골 한 구를 일으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초보 사령술사라도 가능하다.
‘루비아도 했으니까.’
하지만 일으킬 대상이, 인간보다강한 힘을 가진 오크가 되면 한층 더 어려워진다.
‘술자와 다른 종족인 경우에 특히 어렵다고 읽은 것 같은데.
대부분의 네크로멘서(사령술사)는 인간이다. 결국, 인간 외의 해골을 움직이는 건 이중으로 어려운 셈.
오크도 어려운데.
훨씬 강한 오우거나, 고산지대의폭군인 트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을 무덤에서 일으킬 수 있는자는 극소수.
전장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따로 있다.
무덤에서 일으킨다고 끝이 아니다.
일으킨 해골을 통제하는 게 훨씬 어사실 그게 핵심이다.
마왕군에 가담했던 인간 네크로멘서들을 돌이켜 본다.
내가 겪었던 네크로멘서들.
그들의 능력은 조잡했다.
해골병사에게 창을 들리고, 방진을짜게 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네크로멘서조차 없었다.
인간의 기병 돌격을 잠시 막을 만큼조차도.
어디 있고, 어디로 진군하라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전부였다. 거기까지가 통제력의 한계.
고작 그 정도로도, 놈들은 마왕군내에서 거들먹거리는 위치였다.
하물며 이 정도의 통제력을 보이는 건 대체 어떤 존재일까?
‘고위 마족이 미리 강림한 건가?
혹시 마왕 자신이?’
마왕의 힘 같은 건 모르지만.
한때 세계의 절망으로 군림했던16마왕 정도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겠지.
정말 그들일까.
혹은.
앞에서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흐으음.>
이 장소에 떨어졌을 때, 처음 머릿속에 울렸던 그 목소리다.
- 달그락! 달그락!
유일하게 자유로운 머리를 위로 올렸다. 앞을 보려 움직였다. 누가 이장소를 지배하는지, 이들을 조종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 쿵! 쿵!
앞에 있던 트롤이 걸어왔다. 거대한 몸집이 시야를 차단한다.
- 콱!
감히 뭘 보려고 하냐는 둣, 트롤은 머리를 땅에 짓눌렀다.
너무 세게 누른 탓에 턱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젠장.’
- 스르릉.
차가운 한기가 두개골에 닿는다.
도끼다.
- 휘익!
트롤이 도끼를 높이 들었다.
팔다리는 단단히 붙잡혀 어차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이제 죽는 건가 싶을 때였다.
<더 숨긴 거 없어?>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숨긴 거라니?’
- 덜그럭! 덜그럭!
양쪽의 트롤 해골들이 내 팔다리를 놓았다. 살아서는 인간을 산 채로 쭉쭉 찢었을 녀석들이, 순한 양처럼 얌전히 뒤로 돌았다.
주위의 거대한 뼈 무더기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사라졌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 달그락.
차가운 바닥을 짚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꽉 쥐여져서인지아직도 뼈가 얼얼했다.
‘금이 좀 간 거 같은데.
그때 였다.
- 끼아아아아악!
허공이 떨렸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없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비명이었다.
갑자기 천장 쪽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반투명한 하얀 연기였다. 연기가 나를 향해 덮쳐왔다.
‘스펙터?’
- 부응!
바닥에서 주운 칼을 휘둘렀다. 칼은 연기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트롤처럼 이들 역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게 분명했다.
주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것도보이지 않았다.
- 끼아아아악!
연기는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기분 나쁜 한기가 온몸에 흑 끼쳤다. 연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수십 마리스펙터가 나타났다.
하얀 연기 같은 스펙 터들은 반투명한 몸을 허공에 흐느적거리며 나를 둘러쌌다. 주위가 전부 그들로 덮여버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희끄무레한 연기로 나를 일제히 덮쳐 왔다.
- 부응! 부응!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 휘이이잇! 휘이이잇!
수십 마리 스펙 터가 내 몸 곳곳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으스스한 한기가 두껍게 온몸을 뒤덮었다.
‘귀찮군.
생명력에 집적 적으로 해가 되는 건아니다.
내가 그들을 해칠 수 없듯 그들역시 나를 해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내 몸에서 장난질을 반복하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고몹시 불쾌했다.
긴 시간이 지났다.
나는 완전히 지쳤다. 칼을 휘둘러도 의미는 없었다.
처음 이곳에 납치된 순간부터 이미 패배해 있었다.
- 털썩.
기괴한 뼈 무더기 한쪽에 기대어 쓰러졌다. 실험실에 갇힌 키메라는,
갇힌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그냥 힘없이, 침묵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였다.
- 쉬잇. 네 손은 아주 붉구나. 어떤 죄악을 저질렀지? 그런데 또 어찜 이렇게 하얗니? 되는 대로 살아서는 너 같은 아이가 될 수 없어.
넌 누구니? 무슨 인형을 가지고 놀았니? 어떤 어미에게 버려졌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수 없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말인지도 역시 전혀 알 수 없었다.
‘희롱하는 건가.’
다시 몇 번이고 주위를 바라봤다.
옆에도, 뒤에도, 앞에도, 위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 깡!
단단하고 울툴불퉁한 돌바닥을 칼로 두드려 봤다. 역시 바보 같은 행동이다.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날 뿐이다.
칼을 멀리 던져 버렸다.
거대한 뼈 무더기로 만들어진, 기괴한 미로가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나는 허공에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냐?”
- 누구냐. 누구냐. 누구냐.
칼을 던질 때는 울리지도 않던 메아리가, 작은 중얼거림에는 곳곳에서 중폭되어 되돌아온다.
- 굶어 죽은 창고지기, 혀를 뽑혀죽은 시인, 갑판 위에서 살해당한밀항자.
목소리는 줄곧 연극적이다.
‘장난을 치는 건가.’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사방의 거대한 뼈 무더기들이 응응 울리며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 강간당해 죽고, 불타서 재가 된사령술사이기도 하지.
- 달그락!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비아를 알고 있어?’
게다가 명백한 조롱이다. 바닥에 놓인 긴 할버드를 들었다. 하지만보이지도 않는 상대다. 어디로 칼을 휘둘러야 할지도 모른다.
- 나를 찢어 버리고 싶니? 사지를 돌려서 분리해 버리고 싶니?
다리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골반 가운데 텅 빈 부분에서.
- 아이야, 실은 네가 그렇게 될 거경추 하나하나를 올올이 울리며 목소리가 쏟아졌다.
- 네 뼈를 쪼개고 조립할 거야. 머리를 짜 맞추고 관절부터 갈아 끼워야지. 독수리의 날개를 달아 줄까?
트롤의 팔을 달아 줄까?
‘뭐라고?’
그 순간.
여자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저런 말을 할 만한 존재가 둘 일리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곧바로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존재가여기에 있지?’
그녀가 말하는 행위를 알고 있다.
뼈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한다.
이종異種 간의 뼈를 짜 맞추고 갈아 끼운다.
살해와 육식처럼 누구나 하는 행위가 있고, 개인의 고유한 색을 가지는 행위가 있다.
해골 개조는 꽤나 고유한 행위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네크로멘시에 대해 끝없이 궁리한 결과물이리라. 이런 행위는 남다른 내면과 자질을 나타낸다. 타자池者와 겹치지 않는 정체성의 좌표를 보여 준다.
거기에 이 절대적인 통제력.
지배와 결계의 네크로멘서.
그녀의 정체를, 내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게 오히려 기이할 정도.
‘위치가 너무 엉뚱한걸.’
처음에 루비아와 함께 계획대로 여정이 진행됐다면 두말할 것 없이 엠버로 계속 향했으리라.
엠버행行은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호의를 구걸할 예정이었다. 접골시술을 요청하고. 계속되는 반복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최고의 네크로멘서였다고 했으니.
그 지혜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있다고?’
사정을 도무지 짐작하게 어려웠다.
‘음.
그녀가 나를 어떻게 요리하려 들지 알 수 없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접골 실험에 사용하는 재료로 쓸 것 같다.
‘이 많은 뼈들을 놓아두고.’
왜 하필 나인가, 의문이 들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건가?
‘일단은.’
적극적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나를 왜 여기 데려온 겁니까?”
<호호호호.>
사기邪氣로 가득한 웃음소리.
사방에서 나를 죄어 오는 듯하다.
웃음소리가 발자국이 되어 허공을 마구 디딘다.
소리는 환청처럼 멀기도 하고, 귀바로 옆에서 울리는 종처럼 거대하기도 했다.
<오순도순 얘기나 좀 하자고 데려온 거야.>
“얘기. 말이오?”
그럼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은 다뭐란 말인가?
<그래. 난 여기서 지겹게 누굴 기다려야 하거든. 이쪽에 공사해 놓은 게 있어서. 파는 건 이미 한참 전에 끝내 놨는데. 재밌어 보이는 아이가 있어서 살짝 초대한 거지. 체력검사도 끝났으니, 건강한 우리 아기이야기를 듣고 싶은걸.>
공사는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나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납치된 상황. 어떻게 봐도 거대한손가락 앞의 개미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감각이 나에게 우스운 자신감을 심어 준다.
다행히 손가락은 개미를 완전히 짓이기지는 않는다. 목소리에서 즐거움과 호의가 느껴진다.
<내 얘기부터? 좋아. 물어봐.>
“불타 죽은 사령술사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셨소? 나와 루비아를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겁니까?”
<그 여자 이름이 루비아니? 나는 해골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읽어 낸단다.>
“기억을 읽는다는 말씀이오?”
<네가 해석한 기억이지.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라는 게, 내밀한 만큼 제멋대로고엉성하잖아? 자세한 건 읽어 낼 수없고, 그냥 이미지야.>
“그럼 날 발견한 건.
<이틀 전이지! 수풀에서 숨어서 인간들을 관찰하는, 갑주를 입은 해골을 발견한 거야! 그런 재밌는 걸 보고 어떻게 그냥 가겠니.>
‘이틀 동안이나 여기 있었나.’
깊이<잠>에 빠져 있었다.
깨어난 후에는 해골들에 짓밟혀 발버둥 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전혀 몰랐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게. 너, 건강하더라.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도 아닌데 안고 싶을 정도야. 일어난 지는 얼마나 됐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지금이 언제인지를 떠올리고 내뱉듯 대답했다.
“???3 개월이오.”
<3개월! 어려 보이기는 했는데 그 정도였니? 놀랍구나. 일어나서 여기까지 온 얘기를 해 줄래?>
‘어려 보인다고? 그런 것까지 알수 있나?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말로는 정말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다른 이야기를더 듣고 싶어 하는 듯하다.
씁쓸했다.
내 능력치는 20년 수련의 산물. 거기에, 무려 여덟 번을 죽고 살아나며 레벨 업을 한참 거친 결과다.
‘그걸 3달 동안 했다고 하는 게,
그냥 좀 놀라고 말 정도인 건가.’
나는 몹시 허탈해졌다.
무언가 탁 놓아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욕은 도수가 높고 자학은 마시기 쉽다. 두 가지를 섞어 들이키자 금세 말이 많아졌다.
말뚝을 깎아 석궁과 망치잡이를 죽인 이야기, 루비아가 결국 경비병들에게 죽은 이야기를 했다.
동굴에 인간을 놓아두고 이 근처의<메마른 지하 묘지>로 향하던 이야기를 했다.
“.이번 생은 그렇소.”
<이번. 생?>
공기가 흔들렸다. 의문이 느껴졌다.
- 쾅!
나는 할 버드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 쳤다.
“그렇소. 이번 생이오. 이건 내 아홉 번째 삶이오. 기스-제-라이! 나는 여덟 번이나 고쳐 죽으면서도,
당신에게 고작 3개월짜리 삶으로 간단하게 납득 당했소. 아무도 지켜 주지 못하고, 구하지 못했소!”
내가 이렇게 감정이 격했던가?
루비아가 죽은 장면을 이야기하며 다시 치욕을 느꼈다.
내 20년은 3개월짜리로 너무 간단하게 납득되었다. 시디신 자멸을 느꼈다.
자신의 초라함에 취해 아무렇게 나말을 던져 버렸다.
여기서 뭘 한다고 해도 살아 나갈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너무막 던져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네크로멘서인 게 분명한 것도 아닌데.’
그 순간이었다.
“깜짝이야!”
공기가 떨렸다. 공허에서 떨려 오던 것 같은 목소리가,
“여기야! 바로 네 뒤!”
바로 둥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 달그락!
나는 될 듯이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