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제, 폐하, 만세 (1)
“느껴져?”
반듯하고 고고한 콧대 아래, 붉고단아한 입술이 움직인다.
“뭐가 느껴진다는 소리요?”
“시커먼 고리에 네 본령本領을 꽁꽁 묶어 버렸어.”
아끼는 장난감 인형을 소중히 손에 쥐고 짓는 표정이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읽은 책의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마법의 발동에는 세계의 비역秘域에 대한 명철한 인식이 필요하다.
세계가 비틀어진 틈 사이사이를 구석구석 짚어 주는 통찰이 필요하다.
인식의 범위가 곧 마법사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동된 마법을 감각하는 건 그보다 훨씬 쉽다.
그 마법이 당신을 향했을 때는 특히 더욱 그렇다.
허공에 울려 퍼지던 개념. ‘오닉스의 고리’ 라는 개념.
물론 전혀 알지 못하던 힘.
하지만 느껴진다.
쇠사슬이나, 밧줄에 온몸이 꽁꽁 묶인 느낌은 아니었다.
몸의 텅 빈 공간 가운데 무언가가 심어진 기분이었다.
“어때. 거칠거칠한 헛바닥에 온몸이 막 핥아지는 기분이 나, 안 나?”
그런 기분까지는 들지 않는다.
감각이 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를 구속한 거요?”
“당연하지. 그럼 그냥 보내 줄 줄 알았어?”
그녀는 왜 그런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곤란한데.’
당장의 구속도 문제다. 하지만 그녀는 죽는다. 이건 확실히 정해진 사실이다.
이 정도의 존재가 어떻게 죽는지는모르겠지만,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재앙이 닥칠 거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 나도 따라서 죽겠지.
그녀가 안전한 길을 가도록 설득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안전한 길이 뭔지 모른다.
“왜 그리 심각해? 말이 없으니 어색하잖아. 산책이나 좀 하자.”
뜻밖의 제의였다.
“동굴 밖으로 말이오?”
네크로멘서와 산책.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둣 대꾸했다.
“그럼. 동굴 안에서 하는 것도 산책이라고 부르니? 새로 배운 것도 많이 써 봐야 늘지.”
‘정수 착취를 말하는 건가.’
- 달그락!
[고리가 조여듭니다.]
[거리 설정: 0.3미테나는 허공에 뜬 먼지가 끌려가듯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푸른 기운을 띠는 차가운 손아귀가 목뼈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너무 좁은가?”
[거리 설정: 5미테얌전히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 와?아아아-
동굴 바깥으로 나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놀라? 던전 처음 봐?”
물론 아니다. 게다가, 몹시 익숙한 풍경이었다.
수십 개의 돌계단 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보였다.
쏟아지는 기세가 거세다. 작은 호수에 하얗게 거품이 터진다.
물방울이 잔뜩 튀어 오르는 폭포 아래로 향한다. 네크로멘서가 뒤에서 내 목뼈를 잡는다.
서늘하고 차가운 감각이 척추를 타고 발목까지 내려간다.
여기는.
<메마른 지하 묘지>.
레나와 함께 왔던 E급 던전이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상상도 못했다.
밖에 나와서야 그 정체를 알았다.
뼈로 백백한 미로.
허공을 가득 메운 사기邪氣.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랐다.
레나와 함께 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터뿐이던 공간이 원래 이런 곳이었나?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 달그락.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고작해야 E급 던전에 트롤 해골이존재할 수가 없다.
이 네크로멘서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천장에 박혀 있던 야광주들, 새장들이 전부 다 뼈로 뒤덮여 미로 가되어 있었다.
던전 안의 해골을 전부 다 끌어 모았다고 해도 그런<분량>이 될 리는 없다.
내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롭게 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이 동형 진지.
이단. 사술 그 자체다.
“인간들의 눈에 뜨인다면.
단급 병력이 출동하겠지.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결계로 다 막아 놨어. 아무도 모를 거야. 곧 여기 애들도 다 빼 갈 거고. 걱정이 많구나?”
“믿지 않았지만. 당신은, 당신은곧 죽을 거란 말이오.”
스킬을 얻은 보답으로라도 재차 경고해 줄 필요가 있다.
이른 시일 내에, 당신은 아쥬라의마법사들에게 살해당한다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
죽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른다.
일시까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
나도 끼어서 허무하게 소멸되는 일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내 경고를 그녀는 조금도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입가가 갈라진다. 물에 잠긴 개를 바라보는 것처럼, 폭포에 조금씩 젖어 가는 나를 그녀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핫.
“더 해 봐. 내가 죽는다고?”
순간 따듯한 미풍微風이 불어왔다.
바람은 분명 부드러웠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주위를 감싸는,
광기 어린 매혹이 느껴졌다.
“죽기는, 엘튼 클레멘스가 죽겠지.”
- 달그락!
‘뭐^고?’
“지금, 현 황제를 말하는 거요?”
“와, 모르는 게 없는 해골이네?”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먼 바다를 건너온 네크로멘서.
그녀에겐 비밀스런 친구들이 있다.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
기스-제-라이는 교단의 명예 사제다. 레드 플레이크의 정원은 일곱을 초과할 수 없다.
이미 일곱 명이 가득 찬 상태.
그녀는 일종의 위촉 단원이다.
“레드 플레이크라고 하셨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알고 있니? 너, 굉장한걸. 기초 상식이 풍부하구나.”
네크로멘서가 따듯한 피가 흐르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춘다.
기특하다는 듯한 손길에, 반항할생각도 하지 못했다.
급하게 기억을 돌이켰다. 레나를 거미줄에 매달아 놓고 읽었던 책.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라는 책이었다.
백여 개의 엉뚱한 시만 잔뜩 실려 있어서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던 책이다.
마지막에 있던 해설을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다.
‘그 시들이, 레드 플레이크가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려고 퍼트렸다 고한 거였지.’
네크로멘서가 이야기를 이었다.
암살은 시체를 공급하고 네크로멘서는 시체의 수요자다.
어려운 암살이 끝나면, 적어도 한구의 좋은 시체가 생긴다.
레드 플레이크가 취급하는 건 최고난이도의 죽음.
네크로멘서는 그 죽음에서 파생되는 시체들이 갖고 싶었다.
밀월蜜月은 자연스럽다.
그러던 어느 날.
레드 플레이크에 자극적인 의뢰가한 건 들어왔다.
[의뢰처: 자유 연합]
[암살 대상: 엘튼 클레멘스]
[개인 난이도: A플러스]
[주변 난이도: SS플러스]
[파장: 측정 불가]
[기한: 3개월 이내 희망]
[의뢰자 요구 사항: 없음. 죽여만 달라.]
[보상: 연합 의회가 공식/비공식적으로 허가할 수 있는 모든 것]
<열람 회원 소견>
거부: 5표기권: 2표개별의견:
- 흥옥의 바실리스크: 기억해라.
우리는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
- 맥박 빠른 타란툴라: 동의한다.
개입하지 않는다.
- 설아 : 재청. 누군가 해도, 나는안 하겠어.
- 별빛청여우: - (안식 기간)
- 루멘: 역시, 중립성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의뢰야.
- 마니당: - (의견 없음)
- 보이지 않는 비: 우리는 암살자다. 용병이 아니다. 대신 전쟁을 해주지는 않는다. 의회는 왜 스스로하지 않는가?
일곱 명의 정회원은 모두 의뢰를 거절한다. 그러나 위촉 회원으로서,
기스-제-라이 역시 의뢰를 열람할 권한이 있다. 기스-제-라이는 의뢰를 받아들였다.
다만.
레드 플레이 크는 탈퇴해야 했다.
회원들은, 이 사건의 청부를 공식적으로 거절했으므로.
기스-제-라이는 암살의 대가로 원하는 뚜렷한 보상이 있었다.
<쐐기돌 기념 공원>
<흑요석 언덕 공원>
이 두 공원의 완전한 활용권.
이곳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자유와 평둥을 위해 싸운 전사자들의 묘지다.
세이론 1세가 인간을 이족異族으로부터 해방했다면, 이곳에 추도된 영웅들은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해방하려 했다.
두 공원에 잠든 자들은 영웅이면서도 영웅주의를 거부했다.
가지런히 세워진 대리석 묘비들에는, 개인의 역량은 더 없이 뛰어났으나 가장 약한 자들의 평등을 위해 싸운 영웅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계의 절반을 자유 진영으로 만들어 준 영웅들.
그 영웅들의 시신 전부를, 연합 의회는 망설임 없이 한 네크로멘서에게 팔아넘기기로 한 것이다.
뼈조차 남지 않고 풍화된 시체에 의견을 물을 수는 없다. 물론 묘비의 주인들은 찬성할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군비를 중강 하는 제국의 황제, 엘튼 클레멘스.
그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시신이 쓰인다. 그 사실을 몹시 기꺼워할지도 모른다. 의회의 일처리를 비루하다 평하는 건 별개겠지만.
“그래서, 여기서 지루하게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지.”
네크로멘서의 설명이 끝났다.
황제 ^^살.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이야기였다.
확실히 내가 아는 건 하나 있다.
황제 암살은 실패한다. 자유 연합의 의뢰는 실패한다. 제국은 전쟁을일으키고, 수백만 명이 죽은 9년 전쟁 끝에 마왕이 강림한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까?
내가 회귀했다고 해도 그녀는 전혀 믿어 주지 않는다. 나는 일단, 가볍게 이의를 제기했다.
“연합. 의회와 계약한 거요?”
“그렇지.”
“인간들은 무덤에 큰 상징성을 부여할 텐데. 일이 끝나면 말이 달라지겠지. 기념 묘역의 시체를, 한 명의 네크로멘서가 전부 사용할 수 있게 한다니. 의회가 해산될 만한 안건이라고 생각하오만.”
인간들의 상식을 최대한 활용해서그녀를 말려 보았다. 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기스-제-라이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레드플레이크 전체가, 입회인으로 들어갔으니까.”
“입회인이 라니.?”
“레드 플레이크 전체가 이 계약을 중명하고 집행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계약에 참여한 자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야. 내가 받을 시체만 잔뜩 늘어나는걸? 의회 녀석들,
살만 찐 돼지들도 있지만 컬렉션에 넣고 싶은 놈들도 있어.”
기스-제-라이는 자신만만하다. 무슨 그런 귀여운 걱정을 하냐는 표정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가 죽는 미래.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는 미래. 그 둘을 엮어 보면 결론은 단순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전범戰犯, 클레멘스 2세가 이때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기스-제-라이는 여기서 황제 암살을 실패한다. 죽게 될 거다.
그녀에게 목줄에 쥐였으니, 높은 확률로 나도 휘말려서 죽겠지.
그래도 물어봐야 한다.
일이 어떻게 굴러가나 지켜볼 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을 생각한다면, 이 여자의 계획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러면 암살은 언제요?”
“막 물어보네? 사흘 뒤야. 곧 이 근처로 와.”
“황제가 여기까지? 몰랐는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그런 걸 다 소문내고 다니게? 멋대로 갈아 치운 영주 녀석들을 점검할 겸, 남부를 순방하고 있거든. 이 근처에서는, ”
“에라스트.
나는 순간적으로 툭 내뱉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에라스트와 유블람. 유블람의 영주가 바뀌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어느 날부터, 황제의 뜻에 반하는 영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루비아의 말이 기억난다.
그들은 시체가 되어 자신의 성에 던져졌다. 에라스트 백작인, 루비아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바뀐 곳이라면 거기겠지.
“오호?”
기스-제-라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