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황제, 폐하, 만세 (4)
카타나를 휘두르던 전前 챈들러남작을 죽였을 때보다 더욱 생생한 기분이었다. 직접 죽여서 그런 걸까.
이런 감각이 기스-제-라이가 말하던 흡수 효율이라는 걸까.
[투창 Lv.l을 흡수했습니다.]
[추적 Lv.l을 흡수했습니다.]
[창술 Lv.l을 홉수했습니다.]
[홉수하신 능력은 소화를 마친 후적용됩니다.]
[직접 살해한 시체입니다. 소화가400% 빨라집니다.]
[흡수한 능력을 소화하는 중.]
[소화까지 5:59:59.]
[스킬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추가로 메시지가 떴다.
[현재 소화 중인 능력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발도拔刀 Lv.l] [21:34:41]
[동방어 Lv.l].
처음, 챈들러 남작에게서 흡수했던능력들을 확인한다. 소화라는 단어에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
나에겐 위장 따위는 없다.
메시지는 종족 특성을 고려해 주지 않는 건가. 역시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맛있게 먹었니?”
기스-제-라이가 눈을 찡긋했다.
“맛볼 혀도 없소만.”
“단어야 적당히 빼앗아 쓰면 되지.
그럼 훨씬 영양 넘치는 식단을 짜러가 볼까?”
불안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긴, 황제를 죽인다는 이야기지.”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되게 안전한 거야. 겁먹지 마.”
그녀는 신뢰할 수 있는 화자일지도 모른다. 보여 주는 권능은 하나같이 놀라운 것들이다. 어딘가 ‘어긋나’
있다고 생각될 만큼 강하다.
하지만 저 발화는 아무리 봐도 황당하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동굴 안에 있는 다른 자들은 버리고 가는 거요?”
“그럴 리가. 명령을 내려 놨어. 알아서 움직일 거야. 따라오기나 해.”
빼곡한 뼈들을 생각했다. 대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전력으로 근위대를 상대할 수 있을까?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싸움은 아니다. 하지만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 달그락!
오닉스의 고리가 발동되었다. 강한 힘이 나를 잡고 끌어당겼다. 당해낼 수 없는 힘이었다.
이번 거리 설정은 1미터를 넘지 않는 듯하다. 내 몸이 네크로멘서에게 바짝 붙었다.
- 다그닥 다그닥.
보라색 로브를 입은 두 명의 노인이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어떤 의복은 정체성이다.
보라색 로브는 아쥬라의 마법사에게만 허락된다. 면책특권과 치외법권을 의미했다. 다들 알아서 기라는 상징이다.
공포와 경외의 대상인 두 노인은,
황제가 지나갈 대로에서 어떤 마법함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에라스트에서 유블람으로 향하는 통로 가운데, 황제의 팔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은 여기 하나.
면밀한 사전 답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노인들은 조사를 마쳤다.
“마법이 준비된 흔적은 전무해. 이만큼 깨끗하기도 어려워 보이는군.
스캔 장치에도 아무 반응이 없어.”
“음. 주문 한번 사용해 보겠나?”
구부정한 노인이, 키 큰 노인에게년지시 이야기했다. 키 큰 노인은 하얀 수염을 슬쩍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 손을 내밀었다.
스태프도 주문도 없이 그저 허공에 마법을 시전했다.
- 지지지직!
어떤 준비도 없이 손끝에서 작은 번개가 일어났다. 피와 살로 된 노인의 손에 머물며 이글거렸다.
노인은 그 번개에 어떤 부상도 입지 않았다. 멈칫하던 그가 먼지를 털 듯 손을 혼들었다.
이글거리던 뇌전이 곧장 앞으로 뻗어나가 땅을 때렸다.
- 광!
도로 옆 홁바닥이 한 자 깊이로패였다. 재가 된 풀과 흙이 튀어 오른다. 높게 먼지가 일어났다. 바닥의 풀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장난 같은 손짓 한 번으로 일으킨 터무니없는 위력이었다.
‘저런 걸 인간에게 사용한다면 노인은 간단한 손짓만으로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살해할 수 있는 셈이다.
시약도, 스크롤도, 마법진도.
심지어 스태프도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 의지.
‘저게 아쥬라의 마법사인가.!’
지켜보는 이쪽의 경악과 다르게,
수염 노인은 한심해하는 느낌이다.
그가 탐탁찮은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끌어 내렸다.
손짓 하나로 허공에서 번개를 만들어 냈으면서도, 제 행사에 전혀 감명 받지 않은 듯하다.
“음. 역시 마법의 힘이 약한 남부답군. 그중에서도 여기는 독보적으로 약한데?"
“그렇네. 아케인(Arcane)도 잘 모아지지 않아. 마법에 의한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자잘한 거야 근위대 애들에게 맡기자고.”
“수레의 강력한 대마력에다. 이정도로 감도가 낮은 지역이면 뭐.
마법에 의한 저격은 없다고 봐도 되네. 가자. 일 다했다.”
두 노인은 뒤로 돌아갔다.
우리는 언덕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멀리 떨어진 위치였고,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에 가려져 있긴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결계 같은 건가?’
악신惡神처럼 오연하게 서서 언덕아래를 굽어보던 네크로멘서가 차갑게 뱉었다.
“역시 다 병신들이네.”
냉혹한 품평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의. 마법사들이?”
“어? 알아보네?”
“시약도 마법진도 없이 단번에 마법을 행하지 않았소. 아쥬라의 마법사들인 것 같은데.
아쥬라의 마법사는 그 앞에 선 대부분의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대꾸했다.
“어, 그게 병신이란 뜻이야. 제대로 된 마법사는 한 년 말고는 없어.”
지금까지의 이 여자를 봤을 때,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신을 말하는 거로군.”
기스-제-라이가 볼을 불룩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빨아들인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난 네크로멘서고.”
그녀는 하얀 뼈로 덮인 어깨를 으쪽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그년 아니었으면 이렇게 쓸데없이 봉사할 일도 없어. 그냥 내 맘대로 묘역 다 파헤치고 가져갔지. 막을 애들도 없으니까.”
이 여자에게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게 누구요?”
“이름 바꿔 가며 노는 또라이 하나있어. 누가 그년 좀 확 찔러서 시체로 안 만들어 주나? 그럼 내가 나긋- 나긋하게 만들어 줄 텐데.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알고 싶지 않은 말투였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렸다. 전방을 주시했다.
마법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들이. 월 모르는 거요?”
기스-제-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서늘한 경멸이 느껴졌다.
마법 함정이라도 준비해 놓은 걸까?
정찰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두 명의 마법사 다음에는 기사들이 왔다. 그들은 훨씬 더 꼼꼼했다.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땅 하나하나를 찔러 보고, 도로 옆의 수풀을 넓게 흩어져 수색했다.
근처에 숨어 있었다면 분명 발각되었을 듯했다.
대충 땅에 번개 한 번 꽂고 간 마법사들과 무척 대조되는 태도였다.
“열심히 찾네.”
“찾는. 다고?”
“우리가 죽인 애들. 외곽 수색대야.
표식을 하고 있더라. 어이구, 똑똑한척은 다 하더니 그건 몰랐구나. 귀엽기도 해라.”
기스-제-라이는 뼈로 만들어진 눈 씹을 올리고, 턱을 살짝 내리며 아랫입술을 끌어당겼다.
놀리는 듯 흥겨워하는 표정이다.
나는 놀라서 달그락거렸다.
“그러면 이 근처를 싹 다 뒤져야하는 거 아니오? 왜 저렇게.
왜 저 정도에서 그치는가. 황제가갈 길을 수색하던 자들이 사라졌다.
실종자가 발생했다면 비상이 걸린 것이다.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다들 심각한 얼굴로 꼼꼼히 수색하기는 하지만,
고작 저 정도로 끝낸다는 게 이해가가지 않았다.
내가 인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덜 중요한 거지.”
“덜". 중요하다니?”
“황제가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간다. 이게 훨씬 중요한 거야.”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직접 가는 길도 아니야. 외곽에 보낸 세 놈이 실종됐다고 일정 취소할까? 보고할 놈 목이 날아갈걸?”
정식 기사도 아닌 녀석들인데. 오러도 제대로 못 쓰는 수준이잖아.”
“보고하면 무조건 일이 생기는 거지. 보고 안 하면 일이 생길지, 안생길지 모르는 거고.”
기스-제-라이는 그 뒤에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뭐, 살짝 허술한 감은 있네. 어쨌건 ‘저’녀석을 죽이는 걸로 계약한거니까. 뒷일이야 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을 가만히바라봤다. 일부는 돌아갔고, 일부는대로 곳곳을 점하고 서 있었다.
“우리의 다음 계획은 뭡니까?”
“별거 없어. 가만히 있다가, 황제가 오면 죽이러 간다. 끝이야.”
느긋한 어조에 다시 한 번 말을 잃었다. 본인이 생사를 반전하는 권능이라도 가진 듯한 태도다.
“못 믿겠으면 갈비뼈 게임이나 하든지.”
그녀가 이상한 제의를 던져 왔다.
“갈비뼈 게임이라니?”
기스-제-라이는 뼈로 된 손을 내흉부에 얹었다.
“네 갈비뼈를 하나씩 부러뜨려 보는 거야. 성공, 실패, 성공 순으로.
마지막 갈비뼈가 남았을 때 말하게 되는 게 진짜지.”
어처구니없는 제의다.
“.그냥 성공하는 걸로 칩시다.”
그녀는 실패한다. 어차피 나도 휘말려서 죽게 될 거다. 그렇더라도,
미리 갈비뼈가 부러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다. 해는 하늘 높이떴다가, 다시 서서히 기울어졌다.
“아, 재네 온다.”
대로를 바라봤다.
잿빛 갈기의 전투마.
그 위의 풀 플레이트.
준마에 탄 한 무리의 기사들이 먼저 길을 열고 있었다.
“웃긴 짓이네.”
“웃긴. 짓?”
“도로를 열고 있잖아. 누가 길에서기 다리는 것처럼 저래. 환각이라도 보는 거야, 뭐야?”
도로는 깨끗하다.
사람은커녕, 쥐 한 마리 없었다.
“확실히. 아무도 없군.”
“그래. 누가 여길 나오겠냐? 세금으로 다 경비 처리하는 근위대나 우러러볼 우리 폐하지. 돈 뜯기는 입장은 영 다르거든. 누가 와서 황제만세를 외친다고.”
≪ ? , ,
■?.
말에 탄 근위기사 몇 명이 다그닥거리며 행렬을 조금 앞서갔다.
‘화려하군.’
행렬 가운데 황제의 수레가 눈길을 끌었다. 팔두마차가 이끄는 거대한 수레였다. 화려한 몸체에 수십 겹의 복잡한 문양이 상감되어 있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저걸 보고 조악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황제의 수레는 네크로멘서에게도깊은 감명을 준 듯하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잃어버린 지식들도 있네.”
“잃어버린 지식?”
“실전된 아케인 문자들이 빼곡하잖아. 웬만한 마법은 근처에서 아예팍 꺼져 버리겠는걸.”
‘마법을 쓸 수 없다고?’
그렇다면.
역시 암살 운운은 농담인 것 같다.
마법도 없이 황제를 암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기스-제-라이는 그냥 황제의 행렬을 보고 싶었던 거다.
지금까지 한 말은 역시 다 농담이겠지, 하며 약간 안심했다. 하지만 곧 다시 불안해졌다.
‘그러면 왜 죽은 걸까?’
네크로멘서의 사망은 이미 정해진 미래. 나는 그 미래를 살고 왔다.
죽는 건 확실하다.
시기적으로 봐도 그 사망은 지금 일어나는 게 딱 맞다.
혼란스러웠다.
- 다그닥. 다그닥.
앞서가는 정예 근위대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핀다.
황제의 행렬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방을 위한 간소한 행렬이다.
수행원의 숫자는 고작 백 수십에 불과. 그러나 하나하나가 고르고 고른 정예일 터. 아까 보았던, 보라색로브를 입은 노인 둘은 황제의 수레 옆에 붙어 있다.
손짓 하나로 번개를 일으키는 아쥬라의 마법사가 둘이다.
근처의 영주들이 군대를 동원해서이 행렬에 달려들어도, 어렵지 않게 구워 버리겠지.
그들 외에도 또 하나, 관심이 가는 자가 있었다.
‘누굴까?’
선두에서 살짝 처지게 말을 모는,
특이한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기사가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