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황제, 폐하, 만세 (6)
기스-제-라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내 이해를 넘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역시 그러했다.
정말 놀라운 건 구덩이 안쪽의 모습이었다.
오우거의 뼈.
트롤의 뼈.
오크의 뼈.
인간의 뼈.
수천의 해골들이 달그락거리는 파도가 되어 황제의 수레와 근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포위 섬멸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것 같은 숫자.
거대한 구덩이는 백색으로 가득 차있었고, 황제의 행렬은 거기에서 한줌에 불과했다.
네크로멘서의 군단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서, 애타게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검은 안개로 몸을 감싸고-
새까만 기운을 줄기줄기 뿌려 대는, 목 없는 기사들이었다.
얼굴 없는 그들은 휘두르는 검으로 자신의 표정을 증거했다.
“서 (ser) 길라우트의 검을 받으라!”
검은 기사가 외쳤다. 외침은 목구멍에서 나왔다.
잘려 나간 텅 빈 목구멍에서 목소리와 함께 검은 마기가 풀풀 뿜어져 나와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그들은 서 (sir) 가 아닌 서 (ser) 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적어도 이백년 전에 기사들이 자신을 칭하던 방식이었다.
목 없는 검은 기사들은 하얀 뼈 사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기세를 폭발시키며 곧 최전선에 서서 근위대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근위대라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근위대는 하나하나가 절정의 무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황제를 보호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푸른 기운이 서린 칼을 휘둘렀다. 아쥬라의 마법사까지 둘이나 대동했다.
그러나-
첫 번째.
땅이 꺼진 충격이 있다.
몸이 아래로 흑 꺼지는 충격.
단련된 기사라도 감당하기 어렵다.
두 번째.
기사들이 떨어지며, 수많은 무기들이 그들에게 꽂혔다.
세 번째.
듀라한과 스켈레톤 나이트들에 게이 순간은, 애타게 고대하던 순간.
반면 근위대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다.
네 번째.
바닥에는 거대한 만다라가 그려져있다. 만다라의 뜻을 물어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스-제-라이가 구덩이 아래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
- 파앗!
구덩이 안쪽에서, 그녀를 향해 창이 날아왔다. 해골들을 부수고 다시 부숴도 그들은 끝없이 생성되고 있었다. 따라서 네크로멘서를 향한 투창은 기능적인 판단이다.
창대까지 철로 만든 강력한 투창.
파르스름한 기운이 맺힌 창날이 날카롭다.
“잘 던진 창이네.”
네크로멘서는 살짝 뺨을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스-제-라이는 당장이라도 머리를 날려 버릴 것처럼 날아오는 창을 피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창을 손을 뻗어 잡아챘다. 잡힌 창이 그녀의 손에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창을 떨리는 채로 거꾸로 돌려 잡아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창끝이 반대편을 향했다.
“맞아 줄 거라고 생각한 거 o竹”
기스-제-라이는 한 발을 뒤로 디뎠다. 다시 내디디며, 날아온 곳을향해 창을 투척했다. 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폭발하는 듯한 속도였다.
- 쌔애애앵!
‘저자가 던진 건가.
반격의 창은 단장을 향했다.
미스릴 갑옷을 입은 자.
그의 주위에는 부서진 해골 수십 구와 산산조각 난 방패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다른 기사들에서 떨어져, 홀로 하얀 뼈의 파도를 타 넘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던 중이었다.
- 쩌엉!
미스릴 갑옷의 단장은 칼로 간신히 창을 쳐냈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단장은 강한 충격에 비틀거리다 결국 한쪽 무릎을 꿇었다. 투구가 흔들렸다. 무릎 꿇은 단장을 향해 다시 수십 구의 해골들과 네 기의 듀라한이 몰려들었다.
네크로멘서는 이제 기사들은 무시했다. 그녀는 두 마법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추락할 때 주문을 사용해 부드럽게 내려앉은 듯했다.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애써 태연해 보이려는 모습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아쥬라의 마법사들.
그들은 지팡이에 주문 몇 개쯤은 중첩해서 다닌다. 내밀기만 하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언제든 위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문을 마음껏 쓰기 곤란했다. 두 노인이 자신 있는 것은 냉기와 전격 계열.
둘 모두 광역이다.
근위대가 해골들과 백백 하게 엉켜있는 상황. 프로스트 노바나 라이트닝 체인을 쓰면 누구의 피해가 더 클지는 명백했다.
“이 이익!”
마법사들이 혀를 찼다.
몸이 구부정한 마법사가 신성 주문을 끌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일단 주로 익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런. 신성 마법이 억제되고 있네! 힘이 모아지지 않아!”
구부정한 마법사가 한탄했다.
“안티 디바인(Anti-Divine)의 만다라라니. 이런 저주받을 잡년이!”
걸어오는 네크로멘서를 보며, 그의눈동자에 공포가 조수潮水처럼 들어차기 시작했다.
기스-제-라이는 바닥에서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딱히 골라 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품질은 나쁘지 않다.
죽은 근위대가 떨어트린 검이다.
그녀는 칼을 들고, 마력을 응축한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감히. 검 따위를 들고 마법사에도 전하는 거냐?”
흰 수염의 마법사, 에라포르가 애써 살기를 뿜어냈다. 그의 지팡이가 떨리고 있었다.
“까불지 마라!”
그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스태프를 세차게 휘둘렀다. 저장되어 있던 압축 불꽃이 기스-제-라이를 향해 터져 나갔다. 그녀는 주워든 검을 앞으로 휘둘렀다.
- 마법 추방.
아무렇지 않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음직임에, 강렬하게 압축되어있던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기스-제-라이는 그을음 하나 없이 다시걸음을 내디뎠다.
“이. 무슨!”
에레포르의 눈동자가 떨렸다.
분노와 부정이 그 혼탁한 수정체에 비쳤다.
- 얼어라.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며 힘을 전력으로 개방했다.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고 그대로 광역 기를 펼쳐 냈다.
- 아사사삭!
공기와 땅이 부채가 펼쳐지듯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마법사와 네크로멘서 사이에 있던 기사와 해골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에 생명을 잃고 얼음이 되어 버렸다.
줄잡아 다섯이 넘는 근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기사들이 일제히 멈칫했다.
단장이 마땅히 제지해야 할 계제였으나, 그는 이미 네 명의 듀라한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휴, 과격해라.”
기스-제-라이는 훌쩍 뒤로 뛰어 피했다. 구부정한 마법사는 냉기의에레포르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도 스태프에 응축해 놓았던 또다른 주문을 내뿜었다.
“불타라.”
- 화르르록!
스태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붉은 불길이 살아 있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직접 닫지도 않는 잔디를 새하얗게 태워 버리며, 허공을 타고 날아 네크로멘서를 쫓았다.
네크로멘서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녀의 칼에도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기운이 보였다.
눈으로 보일 것 같은 푸른 검기가,
칼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것처럼 선명하게 일렁였다.
근위 기사들이 보여 준 검기보다 훨씬 강렬하게 유형화된 느낌이었다.
'저건 대체.
- 펑!
일렁이는 검기가 살아 꿈틀거리며 날아온 커다란 불꽃 채찍을 쳐냈다.
불꽃은 거세게 터져 나갔다. 얼어붙었던 해골과 기사들은 그 압력에 산산이 몸이 터져 죽었다. 기사들 은제 동료가 갑옷째로 터져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마법사를 탓할 여유는 없었다.
동료의 죽음 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새하얀 해골들이, 그들에게 한 명당 수십 마리씩 붙어서 몰려들고 있었다. 해골들은 부서져도금세 다시 조립되었고, 또다시 조립되고 있었다.
나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그저 조금 뒤에 떨어져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교대로 스태프를 휘둘렸다. 땅이 얼고 하늘이 불탔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기사들과 해골들이 희생되었다.
네크로멘서는 교묘하게 피하며 계속 디스펠을 시전했다. 시간을 끄는 것 같기도 했고, 마법사들을 어디로 몰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두 마법사도 바보는 아니다.
아쥬라의 마법사라는 이름이 그저 허명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기스-제-라이의 패턴을 읽고 있었다. 스태프에 아케인 의 용량을 꾸역꾸역 축적해 놓고 있었다.
더 이상 통제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 두 노인의 스태프에 모아졌다.
이번에도 건방지게 디스펠을 시도한다면, 마법이 가진 용량을 견디지못하고 분명히 한 줌 잿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노인은 상기된 얼굴로 기스-제-라이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이제 어울려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며,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도 좀 보고 살지, 그래?”
마법사들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같은 편이 아무도 없었다.
두 마법사가 스스로의 권능에 취해얼음과 불꽃의 노래를 부를 때 근위대는 이미 전멸해 있었다.
“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죽다니.!”
“터무니없다니 좀 너무한데? 3개월이나 준비한 거야. 허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이제 마법사들은 주문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스켈레톤이, 검은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듀라한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일을 전해주기 위해 도망가는 데 써야 할까?
어디로? 황실로 가야 하나? 탑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눈앞의 건방진네크로멘서를 처리해야 하나.
그들이 지팡이에 모은 기운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잠시 혼란에 빠져있을 때, 기스-제-라이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제 인형들을 확인했다.
실에 매인 커다란 인형들, 뒤쪽에빠져 있던 오우거 해골 몇몇은 이미황제의 수레를 슬쩍 들고 있었다.
타고 있던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채 듀라한들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네크로멘서가 보이지 않는 실을 잡아당겼다.
- 쿠궁!
수레를 그대로 두 마법사를 향해 뒤집어씌워 버렸다.
엉겁결에 위에서 벼락을 맞은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응축해 놓았던 힘을 터트렸다. 하지만 떨어진 것은 힘으로 부서질 새장이 아니다.
마법모순의 만다라受Pt羅.
자기부정의 주식況式.
중폭반사의 결계結界.
그 외에도 기스-제-라이 자신조차전부 해독할 수 없는, 고대의 룬들이 수레 안쪽에 빼곡하다.
호화 현란한 최상위 대마법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수레.
두 마법사의 힘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폭주했다.
공격 마법을 행하는 자에게 그 힘이 반사되는 수레 안에서, 두 노인의 단말마가 메아리쳤다.
수레는 타오르고, 얼어붙었다.
힘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안에서 자기 마법에 휘말려서 죽어버렸다.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만다라가 뭔가를 흡수하듯 꿀렁거렸다.
“일어나라.”
기스-제-라이가 손을 들었다.
마법에 휘말려 죽은 기사들이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전장에서 활약한 검은 점點.
목 없는 듀라한들이 그녀의 곁으로다가 오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곁에 시립한 자들도 있다. 기스-제-라이의 손짓에 따라,
육이 검은 안개에 뒤덮여 천천히 재생되는 자도 있었다.
모두 살아서 이름을 떨치던 용맹한전사들.
망자에게 남은 것은 옛 명예와 싸울 기회를 주는 주군. 그 두 가지밖에 없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호칭한다.
“동방의 길라우트, 동료를 늘렸다.”
“아, 길라우트! 수고가 많았어.”
기스-제-라이는 손을 들어 인사를 받는다.
“견고한 오웨인. 몸은 죽었어도 검술은 죽지 않았다.”
“역시 오웨인! 믿고 있지. 살아 있을 때도 토너먼트 우승은 싹 다 쓸었잖아?”
“심장을 부수는 안드레이.”
“그래, 오늘은 몇 개의 심장을 부쉈지?”
“일곱 개다, 주군. 용맹한 자들의 것이라 보람찼다.”
“민첩한 펜리르. 오늘은 충분히 민첩하지 못했다.”
“괜찮아, 괜찮아. 상대가 나빴어.
단장이었다고.”
“창백한 하멜라인. 적의 핏기를 빼주는 데는 그럭저럭 성공이군.”
“훌륭해. 고기 맛이 좋으려면, 피를잘 빼는 게 제일 중요하지.”
다섯 명의 듀라한이 검은 살기를 피워 올렸다.
나는 경악했다.
이것이 진정한 네크로멘서인가? 기스-제-라이와 내가 보아 왔던 다른네크로멘서들 사이에는 날벌레와 드래곤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기스-제-라이는 수레 안쪽을 확인했다. 까닿게 타고 얼어 버린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마지막에 그들스스로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마법을사용한 탓이었다.
“쯧쯧. 좀 더 넉넉하게 이겼다면.
이 녀석들을 갖고 좀 연구해 보았을 텐데.”
“연구. 라니?”
“리치로 쓴다는 거야.”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깨달았다. 마법사들을 부활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군단에 편입한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는 말인가.
기괴한 추론이었으나, 눈앞의 네크로멘서는 상식이 통하거나 예측이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다.
- 터벅터벅.
“자, 그럼. 마무리를 해야지. 확인작업도 해 주고.
기스-제-라이는 수레에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진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황제인가?’
화려한 황금빛 복장을 한 남자는 본인을 중거하듯 작은 옥관3E冠을쓰고 있었다.
인장으로 쓰일 법한 커다란 미스릴반지가 눈을 끌었다.
기스-제-라이는 남자의 목에 작은 관을 꽂았다.
남자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그저 무력했다. 제법 선이 고운, 은발적안의 미남자였으나 이 상황에서 그게 아무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목에 연결된 투명한 관에 붉은 피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차올랐다.
곧이어 관이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유전자 검식 완료. 본인 맞고-.”
‘본인. 확인?’
의아했다. 자유 연합이나 엠버에서는 제국이 도달하지 못한 기술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저런 것까지 될 줄은.,
기스-제-라이는 은발의 미남자를 향해 마지막 선고를 했다.
“이만 죽어 주렴.”
남자는 텅 빈 눈으로 기스-제-라이를 바라봤다. 기스-제-라이가 황제의 목을 손톱으로 그었다.
- 화악!
피가 뿜어졌다.
장치로 본인이 확인된 황제가, 죽어 가며 홀린 둣 중얼거렸다.
“황제, 페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