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가면 쓴 축복 (5)
반나절을 창술 수련에 몰두했다.
교본을 볼 필요는 없다. 스승을 청할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 창술 Lv.l이 완전히 소화되어 있다. 몸도 머리도 안다.
어떻게 창을 휘두르고 찌르는지.
기초 창술은 세 동작.
첫 번째, 돌려 밀어내기.
한 손은 창대 끝에서 한 마디 떨어진 위치.
한 손은 창대 가운데.
창을 한 바퀴 돌리며, 끝을 45도아래로 떨쳐 민다.
두 번째, 돌려 누르기.
다시 창을 돌리며 탄력을 얻어 발을 내디딘다. 아래로 창을 누른다.
창과 바닥은 평행.
충분한 힘을 줬다면, 창대가 탄성으로 파르르 떨린다.
세 번째, 찌르기.
창대 끝을 잡고 빠르게 민다. 다른 손으로 아래를 받친다. 창을 쏘아내듯 허공의 한 점을 타격!
- 싁!
‘음.
허공에 창을 들고 휘두르고 찔러보니 금세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몇 번을 움직여도, 수련 퀘스트는 뜨지 않았다.
‘창술 재능이 없어서 그런가?’
근위대 정도 되면, 분명 [창술 재능]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도 흡수하지 못했다.
재능은 일반 스킬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수 흡수 레벨을 올리거나.
‘용사 포인트로 구입하면 되겠지.’
던전을 공략하면 된다.
떨리는 창끝을 보고 있을 때.
- 띠링!
[동방어 Lv.l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발도拔刀 Lv.l의 소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벌써 된 건가?’
동방어.
머릿속에 처음 접하는 언어 체계가 흘러들어 왔다.
- 툭.
휘두르던 창을 내려놓고, 새로 습득한 언어를 사용해서 말해 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해골병사예요.>
허공에 낯선 언어가 울렸다.
‘신기한데.’
처음 접하는 언어였다 동방 세계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배를 타고 수십 일을 가면, 여기와는 또 다른 대륙이 나타난다.
자라는 식물도, 사람들의 생김새도이 대륙과는 전혀 다른 곳.
그래서일까. 동방 어에는 신기한 언어 규칙들이 있었다.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냥 기초적인 문장들을 발음해 보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지이이잉.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84.68% -> 84.37%]
‘.음?’
문득 머리가 아팠다.
언어 연습 대신 다른 걸 하고 싶어졌다. 할 수 있는 회화는 고작100문장 정도인 데다, 어차피 동방대륙에 갈 일도 없다.
쓸 일도 없는 언어 대신, 다른 스킬인<발도拔刀 Lv.l>이나 시연해보기로 했다.
- 달그락.
단장의 칼을 잡았다.
아무 장식도 없다. 자루도 칼집도은은한 백색.
머릿속엔 발도의 기본 지식이 심어진 상태다. 몸도 꾸준히 수련한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발도拔刀.
칼을 휘두른다면, 제대로 뺀 상태에서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휘두르는 게 강하다.
칼집에서 빼며 휘두르는 기술.
전장에서라면 아무 쓸모도 없다.
이 기술의 가치는 의외성이다.
칼집에 칼이 들어간 상태에서, 빠르게 빼내 기습하거나 기습을 막아내는 것.
앉은 채, 장검을 허리에 찼다.
‘이걸로 될까.’
발도 술은 챔들러 남작이 사용한 것같은 카타나를 기본으로 한다. 지금 그런 무기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단장의 장검을 사용해 본다.
검면이 그리 넓지 않다.
감은 잡을 수 있을 거다.
왼손은 가드 위, 오른손은 가드 바로 아래에 걸친다.
- 스롱.
검집을 평행하게 돌리며, 그대로 검을 쭉 빼어 횡으로 일격.
‘. 2초.,
느리다. 바람 가르는 소리도 나지^는다.
‘안 되겠어.’
이어지는 동작.
칼을 머리 위로 든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강하게 내리쳤다.
- 휙.
다시 1초.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약하다.
칼을 머리 위로 돌려, 오른쪽으로 내려치며 일어났다.
이어 천천히 납검納劍까지 마친다.
자세가 이미 망가졌다.
발도는 정확한 동작이 필요하다.
칼날과 자루, 검집의 각도가 모두조화를 이뤄야 한다.
‘쉽지 않군.’
- 저벅.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 띠링!
[검술 재능 Lv.l을 보유 중입니다!]
[<퀘스트: 수련>이 개방됩니다.]
[1 만 번의 발도를 수련하세요.]
[0/10,000]
[보상: 발도 Lv.2]
발도 술도 수련으로 올릴 수 있다는 걸까?
이 퀘스트.
마다할 이유가 없다.
동굴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이틀이 지났다. 나흘이 지났다.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추적은 없는 건가?’
아니면, 미로가 막아 주는 거겠지.
- 똑물방울 멸어지는 소리가 한층 차분하게 느껴진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방울 소리는 인간의 심장 박동을 닮았다.
닷새.
이레가 지났다.
고요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2주가 지났다.
- 부응!
평온한 날들.
대부분의 시간은 발도拔刀 수련에 집중했다.
- 스르릉.
납검納劍 완료.
- 띠링!
[퀘스트 클리어!]
[수련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발도 Lv.5 습득!]
체력이 높이 올라간 덕분에, 이제 수련하는 도중에 지칠 일도 없었다.
지겨워질 만하면 다른 스킬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았다.
이를테면, 중갑 착용 Lv.2.
스킬을 소화한 뒤 갑옷을 입었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메일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 띠링!
[중갑 착용 Lv.2가 적용됩니다!]
- 사격 패널 티가 40% 감소합니다.
- 속도 패널 티가 40% 감소합니다.
불의 여신이나, 참회의 여신 예매 라의 교리를 정리해 보기도 했다.
<나는 참회자요 뜨겁게 달궈진 쇳물을 일곱 구멍에 붓길 원하며.>
<고통 받고 으깨져야 참회는 완성되어, 영혼은 순백이 되리라.>
두 종교의 교리는 조금 기괴했다.
상류층으로 잘 먹고 잘사는, 황실근위대 기사들이 섬기는 종교라기엔 살짝 갸웃한 면이 있었다.
어쨌건, 2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발도 수련으로 보냈다.
뒤에서 기습하는 상대도.
옆에서 다가오는 상대도, 발도로베어 버릴 수 있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쓸 만한가.’
칼날에 속도와 힘이 붙었다.
- 붕!
단장의 검을 한차례 시험하듯 내리치고, 다시 조용히 칼집에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 저벅.
‘응?’
멀리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누구지?’
박쥐도 못 들어오는 미로.
이런 미로를 아는 자가, 나 말고또 있을 리 없다.
실수로라도 들어온다면.
길을 잃고 헤매다 곧 죽어야 한다.
하지만.
- 저벅.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는,규칙적으로 꾸준히 울리고 있다.
정신을 집중하고 들었다. 소리는 조금씩 크고 또렷해져 왔다.
- 저벅.
‘가까워진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의 뼈가 꽉쥐어드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입구 근처에서 헤매고 있는 소리는 아니다.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갈림길이 수십 갈래지만 발자국 소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계속 커져 갔다.
- 똑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2주 동안 평온하게만 들렸던 소리가 이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 달그락.
나는 긴장한 채 칼자루를 그러쥐었다. 내가 3년이나 헤맨 미로를 꿰뚫고 있는 상대다.
- 저벅.
정체를 고민해 본다.
이런 미로를 단번에 풀 만한 터무니없는 강자가, 하필 내가 머무르는 시기에 이 미로를 지나는 이유?
나를 쫓아오는 거다.
누가 날 쫓아오는지는, 내가 누구로부터 도망쳤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황실의 추적대다.
황제 암살 사건을 조사하는 자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일 게 분명하다. 싸우는 건 미친 짓이다.
‘도망쳐야 해.,
- 저벅.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다시 미스릴 갑옷을 입고, 황제의혈액과 인장을 들었다. 두 마법사의지팡이도 챙겼다.
칠흑의 단검도 허리에 찼다. 다른 보검들도 묶어서 들었다.
- 저벅.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자국 소리는 무척 불쾌했다. 상대와 마주치면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저벅.
발소리는 동굴 벽을 타고 두개 골속에 울려오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차갑고 무거워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확히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질주.’
[스킬<질주(Lv.4)>를 사용!]
[15분 동안 350%의 속도를 낼 수있습니다!]
[다음 사용까지 50 : 00]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2/3]
가진 물품이 너무 많습니다.
효과가 50% 감소합니다.
‘뭐?’
이런 패널티가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단장의 검과 기스-제-라이의 칠흑 단검, 마법사의 지팡이를 제외하고 다른 무기들은 버렸다.
- 쨍그랑!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물품이 정리되었습니다!]
[질주!]
- 팟!
나는 몸을 솟구쳐 동굴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칼 한 번 휘둘러보지 않고 몸을 빼낸다. 버린 무기들도 아깝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1년을 헤맨 미로를 간단히 돌파하는 존재.
만나면 허무하게 죽을 게 뻔하다.
이게 현명한 판단이다.
- 팟!
최대한의 속도와 정확성으로 미로를 주파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길 나가면?’
똑바로 걸어도,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긴 미로.
그나마 내가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바깥은 이미 빼곡히 포위되어 있는게 아닐까?
문득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레나와 납골당을 탈출했을 때.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기다리고 있던 푸른 갑옷의 기사가 생각났다.
뭉툭한 칼집으로, 날 천천히 갈라놓던 자.
반대편엔 그런 녀석이 씩 웃으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운에 걸어 보기로 했다.
‘쫓아오는’ 녀석의 의도가 좋지 못한 것임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느낄 수 있다.
미로 안에서 그런 녀석과 장난을,
술래잡기를 한다? 도망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꺼림칙하다.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