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가면 쓴 축복 (6)
- 팟!
[질주 Lv.4를 사용 중 - 350%의속 도를 내고 있습니다.]
[잔여 시간 9 : 14]
[다음 사용까지 44 : 14]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1/3]
질주 스킬을 두 번이나 써서 동굴을 벗어났다. 잔뜩 긴장한 채 첫 발93화 가면 쓴 축복 (6)
- 팟!
[질주 Lv.4를 사용 중 - 350%의속 도를 내고 있습니다.]
[잔여 시간 9 : 14]
[다음 사용까지 44 : 14]
[24시간 내 사용 가능 횟수 1/3]
질주 스킬을 두 번이나 써서 동굴을 벗어났다. 잔뜩 긴장한 채 첫 발을 내디뎠지만,
- 휘이이잉~
동굴 밖에는 시원한 바람만 분다.
칼도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다.
긴장이 탁 풀어졌다.
‘.없다.’
한껏 긴장했지만, 다행히 반대편동굴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가을 낮.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다.
주위 곳곳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매복 같은 건 없다.
도망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냥 운이 좋은 걸지도.’
뒤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다.
오래 머뭇거릴 틈은 없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간다는 거냐.’
갈 곳이 마땅치 않지만, 움직여야한다. 정처 없이 산길을 지났다.
‘두 번째로군.’
미로 동굴의 출구에서 유블람으로내려가는 길.
첫 번째는 루비아와 함께였다.
겨울에 눈 날리는 길을 걸었다.
하얗게 덮여 있던 바닥은 이제 누런 흙과 잡초, 돌부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소복이 눈이 쌓였던 나뭇가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녹색 잎에 조금씩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산길을 걸을수록 기억도 다시 칠해진다. 감정도 따라 칠해졌다.
‘여긴가.’
루비아가 내게 눈을 뭉쳐 던진 장소를 지났다.
‘아니요! 쓸모없는 꽃은 없어요. 이렇게 하면 어울릴 것 같은데.
날짜가 지난 붉은 사르디아가 있던장소에는, 대신 연보랏빛 가을꽃이 피어 있었다.
가는 꽃대가 바람에 살랑인다.
루비아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섞여오는 것 같았다.
시끄럽게 웃는 여자였지.
- 우드득.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트롤이 나왔던 고산지대로 도망칠까 했다. 인적이 드문 곳. 산세가 깊어 숨기도 쉬울 거다.
하지만 이 길을 그냥 지나려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버려졌는지 떠올랐다.
경비대에게 살해당했다. 덜그럭거리는 수레에 실려 쓰레기처럼 버려진 데다, 시체마저 범해지려 했다.
그 당시에 한 놈을 찔러 죽였고,저번 생에는 무리를 거미굴에서 산채로 활활 태워 죽이긴 했다.
하지만 이 도시를, 경비병들을 그냥 지나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쓰레기처럼 버려지던 루비아의 시체가 생생하다. 그 모습은 내 기억속 한 자리 폐허로 자리 잡고 있다.
떨쳐 내기 쉽지 않았다.
그때.
‘한번 해 볼까.
머릿속에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전혀 치밀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다.
스쳐 가는 한 가지 충동이 있었다.
그냥 뭘 좀 던지고 가 볼 생각.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아무 효과가 없을 수도 있고, 엉뚱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 팟!
바닥을 힘껏 박찬다. 계속 질주를 유지한 채 달려갔다.
천천히 물들어 가는 나뭇잎 사이,
다시 한 번 회색 성벽이 보였다.
성으로 가는 길 좌우로, 맑은 하늘아래 넓게 밀밭이 펼쳐져 있다.
아직 밀밭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지는 않았다.
위는 노랗게 변했지만 아래쪽은 푸른 기가 남아 있다.
루비아와 왔을 때와 달리, 곳곳에 경비들이 밀밭을 지키고 서 있다.
감시의 눈초리로 지나가는 농민들을 지켜보고 있다. 말을 타고 순찰하는 녀석도 보였다.
‘밀을. 못 빼돌리게 하는 건가?’
제국 전체가 전쟁 준비로 수탈이 극심해질 시기.
농민들이 수확하며 밀단을 빼돌리거나, 타작할 때 낱알을 빼돌릴 거라는 짐작은 쉽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상황은 점점 심각해질 거다.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이라도 잡아먹어야 할 거 아니야.’
나를 함정에 빠뜨렸던, 손가락 잘린 여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질주 Lv.4: 사용이 종료되었습니다. 정상 속도로 이동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스킬이 끝났다.
속도가 흑 줄었다. 밀밭 사이의 도로를 천천히 걸어갈 때였다.
- 히히힘!
“멈추시오!”
도개교에 가까이 가기도 전, 말을타고 순찰하던 경비 녀석이 나를 불러 세웠다.
‘됐군.’
녀석뿐만이 아니다. 이미 주위에 있는 경비들은 일제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을 탄 경비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멈춰 세워졌다. 계획대로다. 여기오래 있을 생각은 전혀 없다. 시선만 끌면 된다.
단호한 어조로 경비에게 말했다.
“너희 대장과 약속이 되어 있다.
전해 주기로 한 물건이 있지.”
물론 약속 따위는 없다.
하지만 이 도시의 경비들은 대장을 매우 두려워한다. 일단 놈의 이름을 팔면 얼어붙는다.
“어.
경비병들이 흠칫했다. 물론 양념을 좀 더 쳐야 한다. 녀석들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 뒤면 거미 잡으러 갈 텐데?
그 전까지 전해 주기로 한 물건이다.”
역사가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경비대장은 화염병을 잔뜩 모으고 있을 거다.
함께 거미굴로 가는 심복들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알겠지.
“으, 으흠.!”
놈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필요 없나? 나야 상관없다. 대신네 이름 좀 알려 주지 그래. 대머리가 그걸 꼭 알고 싶어 할 거다.”
말에 탄 녀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아, 아니오. 정말 대장을 아는 분이구려! 지금 당장 모시겠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도 지금 갈 길이 바빠서.
물건만 전해라.”
- 번쩍!
품에서 작은 금괴 한 덩이를 꺼냈다. 황제의 수레에서 주운 물건이다.
일련번호까지 찍혀서 번쩍거린다.
슬쩍 들어서 다른 경비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밭에 나온 농민들도 곁눈질로 금괴를 흘끗거렸다. 모두 그 광채에 멍하니 사로잡혔다.
말에 탄 녀석이 입을 떡 벌리고 멍청히 있다가 말을 이었다.
“이게. 대장께 전해 드리면 되는. 물건이오?”
“아니.”
금괴는 그냥 시선을 끄는 용도다.
정작 전해 주어야 할 물건은 따로 있다. 일단 주워 오기는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쓰기엔 곤란할 것 같은 물건이 하나 있다.
레나도 없고, T&T에 접촉할 생각도 없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 그렇다면.r“이걸 전하도록.”
나는 황제의 손가락에서 빼 온 인장을 꺼내 들었다.
“부탁한 물건은 잘 가져왔다고 전해 드려라. 협조에 감사한다고도.”
주위의 경비들이 모두 여기를 보고 있었다. 의도대로다. 놈들 전체가 다들 으라고 하는 이야기다.
황제 암살을 조사하는 자들에게,
이 밀밭에 있는 인간들 모두 중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 알겠소.!”
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말 좀 빌리지.”
“어. 그게.
“대머리한테 말해. 좋은 걸로 줄거야. 물건, 꼭 잘 전달하도록.”
- 덥석.
나는 억지로 말고삐를 쥐었다. 타고 있던 경비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모든 능력치에서 내가 녀석을 압도한다.
- 훌쩍!
수수깡 인형을 집듯 녀석을 간단히한 손으로 들어 내려놓았다.
일단 힘에서 압도당하면 말수가 줄어든다.
“엇, 어엇.
뭐라 말하려는 듯한 녀석을 간단히 치워 버리고, 말에 올라탔다.
질주도 두 번이나 썼는데, 딱 맞는 시기에 말을 구했다.
“이랴!”
[승마 Lv.2가 작동합니다!]
[자연스러운 자세로 말을 달릴 수있습니다.]
[승마 중 근거리 무기 사용 패널티가 20% 감소합니다.]
[승마 중 투사 무기 사용 패널티가15% 감소합니다.]
뒤통수로, 경비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금괴와 인장은 대머리 놈에게 안전하게 전해질 거다. 그 뒤에 놈이 ‘안전’할지는 별개의 일이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그곳에서 멀어져 갔다.
- 다그닥! 다그닥!
황제의 인장.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활용할 수없는 물건. 하지만 시선을 끌기에는끝내주게 적합하다.
금괴나 보검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 상징성이 있다.
날 쫓아서 동굴로 들어온 발자국소리는, 유블람 경비대장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져 줄 게 틀림없다.
유블람 경비대장 따위가 왜 황제의 인장을 넘겨받았는가.
그 황당한 괴리감도, 추격자들이 상상력으로 충분히 메꿔 줄 거라고 생각했다.
- 다그닥! 다그닥!
빼앗은 말을 몰아 쭉 뻗은 가도를 달렸다. 뚫고 가는 바람이 갑옷 안으로 스며들어 시원했다.
승마 스킬의 첫 시연이었다. 말 위에서도 발도가 될지 궁금했다.
- 부응!
칼을 빼내어 휘둘렀다. 흩날리는 꽃잎 하나가 칼끝에 감겨 반으로 갈라졌다.
‘정확도는 제법.’
그럭저럭 쓸 만한 것 같았다.
반으로 갈린 꽃잎을 뒤로하고, 고개를 높이 들어 앞을 바라봤다.
은은히 가을 색을 띠어 가는 높은 산이 보인다.
경비대장에게 주의를 약간 분산시켰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쫓아오던 발소리가 거기서 얼마나 시간을 지체해 줄지 알 수 없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혹은 깊은 곳으로숨어서, 조심스럽게 정수 흡수를 반복해 강해져야 한다.
말은 금세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일단이 위로 올라가 보기로 결정했다.
설원 트롤이 나타날 만큼 높고 깊은 산이다. 잠깐의 도피처로 나쁘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위에서 아래를 살펴보며,추격이 어떻게 오고 있는지 확인할 용도로 적당하게 느껴진다.
- 다그닥! 다그닥!
산의 초입은 구불구불했지만 험난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말을 타고 갈 만큼 바닥이 잘 다져져 있었다.
널따란 길을 어렵지 않게 달려갔다.
숨기에는 너무 길이 평탄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잘 깔린 길은 금방 끝을 보였다.
유블람에서 그라스미어로 넘어가는 길만 잘 닦여 있었던 것이다.
앞을 내다봤다.
산 정상과 깊은 계곡으로 향하는 길들은 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곳곳에 수풀이 깊게 우거졌고 바닥의 돌부리들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숙련된 사냥꾼 정도는 되어야 쉽게 갈 만한 길이었다.
한쪽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안전대도 없이 깊게 파여 있었다.
“히히힘!”
중간의 널따란 공터에서, 고삐를 살짝 잡아 말을 세웠다.
바닥에 작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말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칫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나타나는 트롤의 먹이가 될 뿐이다.
이쯤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고맙다.”
태워 준 말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보낸 뒤 안장에서 내려왔다.
말을 혀를 길게 빼어 내두르고 있었다. 혀가 파랬다.
‘재갈이. 너무 깊은데.’
나는<승마 Lv.2>가 전해 준 지식을 떠올렸다. 재갈은 잇몸 위에 놓인다. 고삐를 당기면 단단한 재갈이 잇몸 신경을 꽉 짓누른다.
위치상 자연스럽게 혀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하지만 녀석의 재갈 고리는 특히 낮게 채워져 있었다. 혀가 파랗게 부을 정도였다.
- 툭.
충동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재갈에 연결된 끈을 끊어 냈다.
“히히 힘!”
재갈이 옆으로 날아갔다. 채 전부풀기도 전에 말이 혀를 빼서 마구 움직였다. 갑작스런 해방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마구 움직이며 온몸을 비틀었다.
“히힝! 히히힘!”
녀석은 허공에 발길질을 하며 이리저리 날뛰더니, 산길 아래로 다그닥 거리며 달려갔다.
‘.으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녀석의 고삐를 끊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녀석이 유블람의 마굿간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재갈이 채워질 때 한층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어떤 해방은 폭력적이고 무책임하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망가진 시간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정도는 내키는 대로 하고 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