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가면 쓴 축복 (K))
균열이 손바닥 한 렘 정도로 넓어졌을 때였다.
“그래,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지.”
- 스릉.
푸른 갑옷의 기사가 칼을 손가락한 마디 정도 뽑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새하얗게 빛났다.
- 슈아아아악!
강한 바람이 남자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러난 칼날이 측정할 수없는 온도로 눈부시게 타올랐다.
고작 손끝에서부터 한 마디 정도의 길이에 불과했지만, 뿜어지는 빛은 산장을 전부 덮어 버릴 정도였다.
- 치지직! 치지지직!
기세 좋게 균열을 만들어 가던 글자들이 주춤거렸다. 흩어져 있던 글자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순간, 글자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나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검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과 집중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연결된 하얀 글자들은 빛에 대항해차갑게 주위를 얼려 가기 시작했다.
힘 싸움을 벌이며, 투명한 막에 균열을 만들어 내려는 것 같았다.
파고들려는 차가운 백색과 밀어내려는 뜨거운 백색이 부딪혀 기괴한 파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의 새하얀 칼날은 끊이지 않고계속 빛을 뿜어냈지만, 칠흑 단검에서 나온 글자들은 스스로를 소모하기만 하는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뿐이었다.
찢는다.
깨뜨린다.
한 번에 힘을 집중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었다.
- 우우우!
글자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울었다.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갑옷 안쪽의 뼈가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무형의 기운에 압도당한 상태에서,
무리한 움직임으로 곳곳에 실금이 죽죽 그어졌다. 하지만 당장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검을 억지로 휘둘렀다. 몸 곳곳이 부서지고 깨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아찔해졌다.
- 파파파팟!
강렬한 바람이 폭발했다. 바람에 휩쓸린 늑대의 뼈와 트롤 사체가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첫 번째 글자가 터지듯 타올랐고,
침몰하듯 부서져 허공에 흩어졌다.
두 번째 글자, 세 번째 글자가 버티며 잠시 균형을 이뤘지만 곧 흐트러졌다.
- 치직! 치직!
글자들은 끝부분부터 타들어 가며 힘을 잃었다. 재가 되어 사라졌다.
- 끼기기긱! 파직!
네 번째 글자가 기괴한 단말마를 냈다. 투명한 막을 잠시 갉아먹고,하얀 검집에 조그만 균열을 냈다.
새까만 불꽃이 폭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파삭, 하는소리를 내며 네 번째 글자도 부서져바닥에 떨어졌다.
- 저벅.
푸른 갑옷의 기사가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힘이 빠진 단검을 억지로 잡았다.
하지만 그건 저항이라기보다, 놓을힘이 없어 잡고 있는 쪽이었다.
갈라지고 라들어 간 뼈는 아무 힘도 낼 수 없었다.
- 쓰윽.
다가온 기사는 버릇처럼 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시들어 있는 회청색머리칼이 었다.
두 번째 만남.
동굴 밖에서 만났을 때와 다르다.
이번에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웃었다.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시원하군.
고맙다고 해야 되나?”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단검을 허공에 박은 것처럼 억지로 잡고 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주변에서 파직거리는 파장을 확인하며 느꼈다. 투명한 막은 검집만을두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푸른 갑옷의 기사는 공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칠흑의 단검을 무시하고 검을 내리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균형은 이 남자가 일부러 만들어 냈다. 일부러 단검의 힘을 끌어내어 장난을 친 것이다.
기사는 나를 쓰러트렸다. 발로 배를 짓밟았다. 발버둥 칠 힘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글자가 모두 빠져나간 단검만 허무하게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내 배를 발로 밟았다.
- 투둑. 투독.
차분히 미스릴 갑옷을 벗겨 냈다.
갑옷이 다 벗겨지자 그는 내 손목을 뒤로 교차해서 강철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족갑까지 채웠다. 그리고 그둘을 연결했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뼈에 난 실금사이사이로 지나갔다.
기사는 단장의 갑옷과 검, 마법사의 지팡이를 회수했다. 기스-제-라이가 채취한 혈액을 잠시 바라보다 별말 없이 품에 챙겨 넣었다. 그 과정에서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결국 그에게 물어보았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남자는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머리를 향해 검집을 휘둘렀다.
- 딱!
의식이 팍 꺼졌다.
-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여긴. 어디지?’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세상이 천천히 또렷해진다.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미친 듯이 흔들렸다. 다행히 어지러음은 느끼지 않는다.
두개골을 이리저리 움직여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긴 막대 끝에 매달려 있다.
강철 수갑에 사지가 뒤로 꺾여, 깃발처럼 막대 끝에 매달려 흔들린다.
푸른 기사는 나를 기절시킨 뒤 어딘가로 끌고 가는 증이었다.
- 달그락!
한껏 힘을 줘 봤다. 하지만 수갑은 반응도 오지 않는다.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뼈 곳곳이 갈라진 상태입니다.]
[무리한 힘을 주면 체력이 영구적으로 감소합니다.]
[회복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회복 제한이라고?’
허공에 뜨는 메시지를 보고 팔다리를 얌전히 늘어뜨렸다. 지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 다그닥! 다그닥!
아래로 달리는 말의 머리가 보였다. 하얀 털에 은은한 금빛이 섞였다.
말은 무척 키가 컸다. 무덤에서 죽인 망치와 석궁이 타던 블루 마일 로보다 넉넉히 머리 두 개는 컸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산장까지 올라왔다고 믿기 힘들었지만, 산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니 암벽이라도 탈 수있을 것 같았다.
가파른 산길을 장난처럼 툭툭 디뎌 내려가고 있었다.
날쌘 산악 늑대보다 넉넉히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 다그닥! 다그닥!
기사는 그물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말을 몰았다.
이 남자는, 유블람에 들르지 않았다. 곧바로 나를 쫓아온 것이다.
‘무의미한 짓이었나.’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 언제부터 쫓아온 걸까.
무엇보다.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레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운이 좋으신 거죠. 눈앞에서 제국4검주劍主 중 하나를 보고 살아남으신 거라면.>
<검 주劍主라고?>
<네. 새하얀 검집은 백조라 불리는세라펌 Seraphim. 외양을 들으면<???푸른 사자들은, 마魔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린다던데.>
- 다그닥! 다그닥!
회상을 끝냈다.
푸른 갑옷의 기사.
이 남자는, 레나의 말대로 정말 제국 4대 검주 가운데 한 명일까?
막대 끝에 매달린 채, 슬쩍 그를 떠보았다.
“다른 검주들은. 오지 않았나?”
하지만 그는 위쪽을 흘끗 바라보지도 않았다. 나를 완전히 무시하곤,
타고 있는 하얀 말의 목덜미를 솔로숙숙 긁어 주었다.
“히 힘!”
예민한 부위를 긁힌 말이 기분 좋은 듯 몸을 슬쩍 떨었다.
막대 위에 매달린 몸이 한차례 크게 움직여졌다.
추적당했다.
‘.아이템 때문인가.’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은 필연이다. 사실 아이템 때문이 아니라도,
나를 쫓을 가치는 충분하다.
황제의 암살 현장.
거기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걸어 나온 무언가의 흔적.
게다가 마법사의 스태프, 황제의반지, 미스릴 갑옷까지 가져갔으니.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부자연스럽다.
- 뀨. 뀨꾹!
새들이 나를 비웃는다.
남자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레나를 동료로 맞이하고 한 달 뒤.
지금으로부터 약 이 주 후였다.
그때도, 아마 황제 암살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니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건?’
저 앞쪽, 바닥에 배가 반으로 갈라진 여섯 명의 사냥꾼이 보였다. 다들 창자가 조금씩 바깥으로 새어 나와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지나가며 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냥꾼들은 고통으로 눈의 혈관이다 터져 있었다.
기사는 이 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이자의 짓이다.’
분명했다.
그냥 죽인 게 아니다.
정교하게 복막을 갈랐다. 거기까지면 충분하다. 일부러 안을 꺼내어고통을 가할 필요도 없다.
연분홍빛 창자가 압력을 못 이기고바깥바람을 쐬면 진실은 자연스레 토해진다.
기사는 사냥꾼들에게, 위로 올라간 나에 대해 자세히 물었을 거다.
정작 내겐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잠시 이유를 고민했다. 고통으로다 터진 사냥꾼들의 실핏줄을 떠을리고 불현듯 깨닫는다.
이 남자는 고문 없는 대화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부류일 거다.
내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모른다.
해골을 고문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말도 걸지 않는 것이리라.
- 다그닥! 다그닥!
새하얀 말은 금세 산을 내려갔다.
나는 남자가 든 창대 위에 매달려비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창대 위에 매달려 흔들리는 처지보다도, 이 남자와 나의 경악스러운 격차에 마음이 괴로웠다.
기스-제-라이에게 미안했다. 칠흑칼날 위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에게 미안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가진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근위대의 정수를 잔뜩 흡수해 내심우쭐해졌지만, 산장에서는 수수깡인형처럼 간단히 제압당해 버렸다.
그래도 저번 삶보다 나은 건 있다.
첫 번째.
예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칠흑 단검의 힘덕분이라고는 해도 분명히 유형화된 기운을 인식했다.
두 번째.
이번에는 혼자 잡혔다. 죽어 버려도 뒷일이 개운하다.
첫 만남 때는 레나와 함께였다.
동굴에서 한 달을 버틴 뒤 탈출해보니, 이 남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레나가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사냥꾼들에게 한 짓을 보아 곱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보를 얻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다음 생에 레나를 만나면.
그녀에게 의존할 게 아니라, 내가많은 걸 알려 주고 싶다.
“미로를 한 번에 돌파한 걸 보니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나 본데 나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녀석은 나를 그물 안의 물고기라생각할 거다. 경계가 느슨해질 가능성이 높다. 죽기 전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다.
아무렇게나 질문을 던져 갔다.
하나라도 반응이 있으면 이득이다.
잃을 게 없는 도박.
“언제부터 날 쫓았나?”
“가장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할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수도에서 여기까진 꽤 거리가 멀텐데. 마법사도 없이 혼자 온 건가.”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녀석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었다.
“혼자 움직이는 걸 보니 끈이 떨어진 모양이군. 어차피 날 죽일 생각 아닌가. 입을 꾹 닫고 있는 걸 보니 날 감당할 자신도 없는 건가?”
나는 기사를 도발했다.
이렇게 끌고 가는 걸 보면 죽일 생각은 아니다.
팔다리뼈가 좀 부서진다고 해도,
뭐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 스록!
기사는 말을 모는 자세 그대로, 철로 된 창대를 움직였다. 들고 있던 철창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당겨 잡았다.
- 뚜둑!
그는 내 턱뼈를 두개골에서 가볍게 뽑아낸 뒤, 말안장 오른쪽에 달았다.
- 달그락! 달그락!
몸이 말안장 왼쪽에 매달린 채, 나는 안장과 나란히 전방을 주시했다.
턱뼈가 없다.
“이번엔 내가 묻지. 그거, 다시 끼우면 조립되겠지?”
“봐 봐, 너도 대답 안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