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가면 쓴 축복 (11)
- 뀨! 뀨뀨우우뀨!
가을 산새 우는 소리가 명랑하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나.’
괜히 말을 걸었던 듯하다.
- 달그락! 달그락!
말안장 곁에 바짝 매달려 산길을 달렸다.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이 내뼈에 닿아 실룩거린다.
말의 허리다. 아주 잘빠졌다.
위에서는 잘 달린다고만 느꼈지만.
오밀조밀 힘줄이 돋아난 근육.
그 압축 밀도는 두려울 정도다.
‘곰도 혼자 밟아 죽이겠군.’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툭툭 땅을 박찼다. 그때마다 몸이 위로, 앞으로싁싁 솟아오른다.
기사의 승마술도 놀랍다. 말에는 고삐도 없다. 안장이 특이하다.
안정성과 랜스 돌격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엉덩이를 잘 감싸고등과 배 부분을 단단히 받치는 통상적인 안장이 아니다.
넓고 평평하다.
말의 척추에 무게를 부드럽게 분산시키는 용도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위에서, 기사는 몸을 전혀 흐트러트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대화는 불가능하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관찰뿐이다.
집중해 앞을 주시했다.
황제 암살 때문에 온 거라면, 나를수도로 압송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사들을 마주하게 될까?’
머리에서 기억이 뽑아내어지거나,
영원히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구출해 줄 리도 없다.
마왕이 강림하는 9년 뒤까지.
아니, 까딱하면 아무도 모르는 지하에 갇혀서, 의식이 스스로 산산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옴짝달싹 못 한 채로, 좁고 작은 마법 새장(스펠홀드)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하지만 죽이지 않는 걸 보아, 사실그런 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끌려가고 있다.
영원히 갇혀서, 의식이 완전히 와해될 때까지 온갖 실험 대상이 되기 위해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뼈에 소름이 끼치고 정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느슨했던 마음에 위기감이 확 다가왔다.
- 다그닥! 다그닥!
하지만.
말은 당장 최악을 향해 달리지는 않았다. 넓은 가도를 향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붉은 노을 아래 펼쳐진 밀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그 너머.
기사는 유블람의 잿빛 성벽을 향해똑바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시하고 온 거 아니었나?’
앞을 바라봤다.
경비병들의 감시는 여전하다. 하늘끄트머리가 조금씩 붉게 물든다.
감시조가 막 교대되려는 참.
처음으로 횃불을 든 녀석들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섯 명의 경비병이 새로 나오고,
밖에 있던 녀석들이 들어갔다.
육중한 성문이 완전히 닫히는 게멀리서 보였다.
“놓쳤나.
기사는 아쉬운 신음을 홀렸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 건가? 이 거리에서?’
성문까지 삼백 미터. 이백 미터.
- 다그닥! 다그닥!
그제야 새로 나온 경비들이 기사를 발견했다.
교대에 정신이 팔린 까닭.
“정지! 정지!”
막 햇불을 들고 나온 경비들이 긴창을 겨누며 외쳤다.
같은 자세. 같은 타이밍. 그럭저럭 훈련된 놈들이다.
“멈추시오!”
- 다그닥! 다그닥!
기사는 움찔하지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그는 여섯 자루의 창을 향해 똑바로 말을 달렸다. 피하지도 않았고 검을 뽑지도 않았다.
심지어 창벽을 건너뛰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꺼져라.”
그 순간.
“히, 히, 히이.!”
“이익, 이이익!”
“으, 으으으.
“엄마.
“꼭! 끄흑!”
낮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눈앞의 여섯 경비병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창은 물론 들고 있던 횃불까지 바닥에 멸어뜨렸다. 놈들의 텅 빈 손이 덜덜덜 떨렸다.
- 화특!
몇 명의 바지에 횃불이 엉겨 붙기 시작했다.
- 타닥! 타닥!
허공에 불똥이 튀었다.
“으, 으, 으아아!”
옷이 탔다. 살이 탔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으아■아, 아. ? ? ?으■이?아?이?이■ j ”
놈들은 비명을 질렀다. 성벽 아래해자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 풍덩!
- 풍덩!
그들은 해자에 몸을 던졌다.
꺼지라는 말 한 마디로 기사는 경비들을 모두 실금시켰다. 바닥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방금 본 능력은 이 남자의 고유한권능일 가능성이 높았다.
동굴 밖에서 기사를 처음 만났다.
그때를 떠올렸다. 기사는 비단옷을 입은 남자에게 자살을 지시했었다.
<너.>
<예, 마스터!>
<제보가 과장됐잖아. 자살해라.>
<자, 자, 자.!>
비단옷은 손을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면서도 제 품을 뒤졌다.
푸른 갑옷 기사의 명에 따라 실제로 자살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농담이다, 영주. 제보자를 자살시킬 수는 없지. 그런다고 다 죽이면 누가 제대로 된 제보를 하겠나.>
비단옷은 주저앉았다. 몸을 옭아맨 무언가가 탁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비단옷이 보인 모습은, 지금눈앞의 경비들과 꽤나 비슷했다.
-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나는 회상을 끝내고 앞을 바라봤다. 느긋이 말을 몰던 기사는 도개교 앞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 훌쩍!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안장에 매달린 채 관찰을 계속했다.
벌어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커다란 회색 성域이 코앞이다.
기사는 경비들에게 위협을 가했고,성벽 위에서 빼곡하게 화살이 날아올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기사는 느긋했다. 그는 마치 산책하듯 도개교를 건녔다. 허리의 칼조차 빼 들지 않은 채였다.
- 저벅.
기사는 성문에 다가섰다. 그 순간,
나는 기사가 하려는 일을 깨달았다.
하지만 단어를 실제로 머릿속에서 꺼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너무 터무니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1인. 공성?’
그가 발을 들었다.
걸어가던 자세 그대로였고, 든 발로 세차게 성문을 걷어찼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 광!
별다른 준비도 없는 발차기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경악할 정도였다.
거대한 대포알이 성문을 직격할 때날 만한 소리가 허공을 진동했다.
단단한 금속이 덜 단단한 금속을 쳐서 찢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멍하니 앞을 주시했다.
발로 걷어찬 곳이 살짝 패여 있다.
“단단한 편이군.”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기사는 몸을 살짝 낮췄다. 그리고 주먹을 쥐어 뒤로 당겼다. 몸에서 연푸른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 파지지직!
기운은 주먹 주위에서 짙어졌다.
건틀랫이 반쯤 투명하게 보였을 때,
주먹이 앞으로 뻗어졌다.
- 콰과광!
훨씬 더 큰 소리가 났다. 땅이 실제로 흔들릴 정도의 폭음이 터졌다.
나는 말을 잃고 앞을 바라봤다.
- 찌꺽! 찌꺽!
성문이 흔들렸다.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문은 눈에 보일만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단 한 번의 주먹질에 문 전체가 안쪽으로 푹 찌그러진 모양새였다.
한 명의 인간이 성域에 가하고 있다기에 는 너무한 만행이었다.
두어 번만 방금 같은 타격을 주면 문이 아예 떨어져 나가거나, 주먹을맞은 곳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히히힘.”
말이 나를 흘끗거렸다. 말은 놀라지도 않았다. 이 정도는 자주 봤다는 것처럼 살짝 울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 기사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어떻게 해 볼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 성문에 집중하는 지금이야말로 기회일지 모른다.
- 달그락.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팔다리가 수갑에 완전히 구속된 상태다.
무리를 하면, 체력 최대치 감소에 대한 경고가 다시 뜰 거다.
손목에 주의를 기울였다. 수갑에꽉 죄인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힘으로 끊는 게 불가능하면, 손목뼈를좁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좁게.
아래팔뼈와 손을 이어 주는 건 8개의 손목뼈다. 수갑이 빠져나가게 하려면 이 부분을 재구성해야 한다.
가능할지는 모른다. 의식적으로 움직여 본 적은 없는 부분이다.
뼈를 움직여 좁게 만든다.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왠지 할 수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선은 성문 앞의 기사를 향한 채,
나는 손목뼈 여덟 개를 어떻게든 모아 보려 애썼다.
- 오득. 오드득.
‘움직였나?’
손목을 구성하는 건 여덟 뼈들이 조금씩 붙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목의 축이 되는 뼈. 가동성을 담당하는 뼈들을 움직여 갔다. 조금씩 뼈가 조정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착각일지도 몰랐다.
흘끗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겉보기에는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 띠링!
효과음과 함께, 반투명한 낯선 메시지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갑니다.]
[자신의 뼈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려 하고 있습니다.]
K뼈의 군주>에 내재된 부가 기능,
골격변용骨格變容이 가능해집니다.]
[골격 변용骨格變容]
- 자신의 골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타자의 골격 변화까지 가능해집니다.
-<뼈의 군주>로 인한 보정에 의해, 근육 변화 능력까지 전부 뼈 변환 능력으로 환산됩니다.
- 현재 변용 범위: 부위별 5%
- ‘골격 변용?’
골격을 변화시킨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턱이나 어깨뼈, 골반 같은 부위까지 조금씩 변형할 수 있다는 건가.
얼핏 생각해도 놀라운 능력이다.
활용할 만한 방안 몇 가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어떤 부분을 작게 만들었다가, 다시 크게 만들 수도 있다. 신분 세탁을 위해 외양을 변경할 수도 있다.
전투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쨌건.
지금은 탈출이 최우선 과제.
다시 손목뼈에 주의를 집중했다.
‘줄어라. 줄어라.’
- 우둑! 우두둑!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 띠링!
[더 이상 줄일 수 없습니다.]
[현재 손목 변용: 5.01%]
[초당 0.1%의 체력이 감소합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데.
손목을 빼내 보려 했다.
- 철컥! 철컥!
역시 무리였다.
“히히힘?”
말이 고개를 돌렸다. 꼼지락거리는 게 신경 쓰인다는 듯한 눈빛이다.
‘위협하는 건가.
백금e 金의 명마. 곰도 콱 밟아서죽일 것 같은 녀석이다. 놈의 눈빛은 꽤 살벌했다.
안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벗어난다고 해도, 수갑에 매인 채라면 녀석에게 잡혀 짓눌릴 거다.
‘.몰래 숙련도를 쌓아야겠군.’
숙련도를 올리면 스킬 레벨이 올라간다. 지금보다 뼈의 변화 폭이 조금씩 더 커질 거다. 수갑이 지나갈 만큼 손을 좁힐 수도 있다.
일단 탈출을 미뤘다. 기회는 또 있으리라. 계속 시도하면서도 숙련도를 올린다. 스킬 레벨을 올린다. 그리고 한순간의 틈을 노리면 된다!
일단 희망은 발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