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가면 쓴 축복 (13)
노인은 입을 열었다.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아편에 취한 채로는. 작업 못 한다고 우겼습니다. 덕분에 살았지요.”
이야기가 이어졌다. 후작은 적당히 납득했다. 비중독자라는 건 알아봤지만 큰 관심은 없는 듯했다.
노인이 영주의 내성으로 안내를 계속했다. 내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허겁지겁 나온 문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들어가기 전.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후작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함정이라도 느낀 건가?’
그가 안장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위에 선 인간들이 움찔했다.
- 부스럭.
하지만.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온 건 무기가 아니었다.
‘신호탄?’
길쭉한 끈이 달린 폭죽.
후작이 끝에 달린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 화르록!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심지가 빠르게 탔다.
- 피이이이잉!
폭죽이 하늘 위로 빠르게 솟았다.
- 퍼버벙! 퍼버벙!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에 푸른 장막이 퍼져 나갔다.
‘이건.,
비슷한 걸 본 적 있었다.
T&T의 이너 서클에 포위당했을 때, 레나가 쓴 폭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누굴 부르는 건가.’
무표정하게 폭죽을 쓴 후작은 곧안으로 들어갔다.
내성은 화려했다.
경비대장과 싸우다가, 손 망치에 얼굴에 으깨져 죽은 영주의 시체가 떠올랐다.
[회계 Lv.l이 작동합니다!]
근위 기사에게 흡수했던 스킬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눈앞의 풍경은, 정상적인 세수로 얻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엄청나게 벗겨 먹었군.’
루비아 같은 여행자를 판돈도 이런 장식에 사용됐을 거다. 뼈마디로 차가운 분노가 치솟았다.
주위의 인간들을 돌아봤다.
굽신거리며 문을 연 남자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행정관들이군.’
모두 적극 공조하거나 방조한 이들이다.
Lv.l의 회계 스킬로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다. 저들은 훨씬 더 빠삭할게 분명하다.
‘경황이 없어서 도망도 못 갔나.’
부역하며 지은 죄가 만만치 않은 자들이겠지.
후작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에게 했던 것처럼 살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성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인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성은 짙은 물안개가 들어찬 것처럼 백백했다.
실제로 무형의 기운이 행정관들을 향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으. 으어.!”
- 쿵.
기운이 퍼진 지 십여 초도 되지 않아서, 한 명의 남자가 앞으로 떨어져 졸도했다.
후작은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기운을 멈췄다.
행정관들은 졸도한 동료에 신경도못 쓰고 있었다.
고문 하나 당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땀이 범벅되어 있었다.
후작이 기운을 갈무리하는 게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기의 출납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건가.
행정관들은 후작이 몇 초만 더 옥죄었으면 선 채로 심장이 및어 버렸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서류.”
후작이 낮게 말했다.
“예! 예!”
“전부 다.”
“알겠습니다!”
굳어 있던 남자들은 제발 살려만 달라는 둣 차곡차곡 문건을 정리해서 바치기 시작했다.
물안개처럼 백백한 기운에 숨 한번 못 들이키던 남자들이, 그제야후들거리면서 네 발로 기어서 서재로 향하고 있었다.
놈들이 두 발로 서는 데는 무려 십분이 넘게 걸렸다.
“영주의 장부입니다!”
“마약 재배 일지입니다!”
“인신매매 기록입니다!”
후작은 빠르게 서류를 훌었다.
슥슥 넘기며 적당히 목차만 보는것 같았다.
“사업을 많이 했군. 황제의 인장이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후작은 행정관들을 쭉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빠진 고리가 너무 많은데.
남자들은 덜덜 떨었다.
빠진 고리라는 게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알 리가 없지.’
유블람의 행정관들이.
황제 암살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내가 경비대장에게 황제의 인장을 떠넘긴 것도, 고작해야 한 시간 전에 벌어진 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녀석들이 보기엔 어떨까.
천벌이 내렸다고 생각할 거다.
유블람의 온갖 악행에 대한 벌로,
황실에서 눈앞의 이 남자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후작이 말했다.
“얘기해 봐.”
그래서겠지.
행정관들은 영주와 경비대장이 저질러 왔던 악행을 낱낱이 보고하기 시작했다.
후작이 그걸 원하는 것처럼.
뭘 숨겨야 할지, 뭘 말해야 할지머리를 굴릴 여유는 없어 보였다.
“아편 재배 동굴은 이곳입니다! 여기를 온실로 만들어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행정관 하나가 손가락을 뻗었다.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보안상의 이유인지.
지도에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녀석이 침을 꿀꺽 삼키고, 설명을추가했다.
“냇가를 건너서 수풀로 3km 지나가면 됩니다! 동굴 입구는 수풀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다른 녀석이 거들었다.
“일부러 잡풀을 더 심어서, 유독우거진 지역입니다. 지키는 경비는세 명입니다.”
이야기가 술술 홀러나왔다.
후작은 흘껏 지도를 바라봤다. 나도 그 위치를 바라봤다. 영주의 의자에 놓인 덕분에 위에서 잘 내려다보였다.
‘기억해 두자.’
언젠가 써먹을 만한 정보다. 지금이 아니면 알기도 쉽지 않다. 신경 써 둬서 나쁠 건 없다.
“태우실 생각이라면, 이쪽에 불을 놓으면 안쪽으로 활활 잘 타들어 갈 겁니다!”
다른 행정관들도 질세라 거들었다.
지도의 다른 곳을 가리키며 정보를 마구 털어놓았다.
“이곳에는 경비대장이 은괴를 묻어놓았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압니다.”
“여기도 있습니다!”
보물을 매설한 지점 세 군데가 밝혀졌다. 행정관끼리도 서로 모르고 있던 위치였다.
“.성 지하에 특수한 방이 있습니다. 아편에 중독된 자들에게 약을 끊어 놓고, 금단 증상에 발작하는 자들을 철창에 가둔 채 구경하는 방입니다.”
음침한 인상의 행정관이 말했다.
피로한 듯 눈 밑이 검게 푹 꺼진 남자였다.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몰랐던 듯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젊은 행정관이 끼어들었다.
지도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거미굴입니다. 반항하는자들은, 여기에 끌고 가 산 채로 먹히게 합니다.”
그 정보는 모두가 아는 둣, 다들 고개를 비슷하게 끄덕였다.
하지만 다음으로 나온 말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전 제 아비도 끌려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요. 유해라도 수습하고 싶어서.
미친 사람을 보는 시선들이 젊은 행정관에게 쏟아졌다.
어떻게 멀쩡히 돌아왔냐고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젊은 행정관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거미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모두 새까맣게 타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주위가 크게 웅성거렸다.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레나다.’
“타서 죽어 있었다.
후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 툭.
그가 경비대장의 재갈을 풀었다.
“끄, 끼히, 끽, 히, 끄흑!”
기괴한 딸꾹질 소리가 피와 침, 부러진 이에 섞여 튀어나왔다.
이미 데려오며 신경에 기를 침투시켰는지, 경비대장은 온몸을 오들오들 떨며 피땀을 비 오듯 홀리고 있었다.
“사실인가?”
후작이 물었다.
경비대장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하는 자들을 정리하고, 거미를잡으러 갔지만 누군가 이미 다 태워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 저벅.
대장장이 노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나 섰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집에 뿌리기만 해도 불이 붙는 액체 병기가 있었습니다만.
후작이 약간의 관심을 보였다.
“<그라스미어의 불>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네가 만든 건가?”
“예, 각하.”
“제법이군. 장인이 평생 한 병을 만들기 쉽지 않다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하나 가진 것을 꽁꽁 숨겨 놓았지요. 한데, 며칠 전 그것을 도난당했습니다.”
“도난당했다.?”
“예. 범인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짐작 가는 자도 없어 불안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 렸다.
‘확실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나가 다녀갔다. 그녀 외에 다른 인간일 수가 없다. 슬쩍 성 안으로들어와서, 그라스미어의 불을 홈친게 분명하다.
나는 그녀에게 노인의 집 위치와,
<그라스미어의 불>이 숨겨진 장소를 정확히 알려 줬다.
‘정보를. 제대로 활용했구나.’
레나 혼자 거미 던전 공략에 성공한 것이다.
‘해냈어.’
붙잡힌 내 처지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첫 단추는 잘 꿰었다.
레나는 더 잘될 거다. 거미굴을 공략하는 동안 내 정보가 정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준 정보를 기반으로, 세상을향해 빠르게 치고 나갈 수 있다.
폭력과 욕망뿐인 이 세계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조금 안심이 되려는 순간.
“으음.
후작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긴장감이 몸이 사로잡았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쫓아가는 건 아니겠지?’
후작이 쫓는다면.
레나가 아무리 성장했다고 해도 도망갈 수 없다.
반드시 붙잡힌다.
눈앞의 남자는, 내가 3년에 걸쳐 익힌 미로를 단번에 주파한 자다.
상상할 수 없는 추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투력은 말할 것도 없다.
‘막아야 해.’
나나 대머리 경비대장이 당한 꼴을 생각했다. 그런 걸 레나가 당하는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 그녀의 삶에 절대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 달그락!
몸을 움직여 관심을 끌려 했다. 후작은 나를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빛으로 흘끗 바라봤다.
‘거미굴에 관심 꺼. 제발 꺼 달란 말이다.’
그때 였다.
- 끼이익.
내성의 문이 활짝 열렸다.
후작과 비슷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당당히 들어오고 있었다.
발걸음은 깃털처럼 사뿐했다.
강철로 된 풀 플레이트가 아니라 가벼운 천이라도 걸친 것 같았다.
숫자는 고작 일곱.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내성 전체가 다시 한 번 장악되는 듯했다.
그들은 후작의 열 걸음 앞에서 정확히 걸음을 멈췄다.
- 철컥.
그리고 일곱 명이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먹을 가슴에 댔다.
“푸른 사자 기사단 7인, 마스터를뵙습니다.”
“???너무 빠른데?”
“주둔지는 더벤카트입니다만, 우연히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부름에 처음으로 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좋다. 관작官爲 있나?”
“기사 메렉 아벤빅. 10등급 좌서장左麻長의 작위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 대표로 말했던 기사가 손을 들었다.
[제국 예법 Lv.l이 발동합니다!]
관작官爲은 제국 20품계의 9급 이상을 일컫는다.
시골 영주 위位를 수행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신분이다.
후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다. 좌서장左麻長, 메렉 아벤벅.
그대에게 유블람을 맡긴다. 치안 공백을 처리하고,”
후작이 행정관들을 흘끗 돌아봤다.
“저들을 조사한 뒤, 죄질에 따라 형을 집행해라.”
행정관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입술을 덜덜덜 떨면서 주저앉는 녀석도 있었다.
“마스터의 명을 받듭니다.”
“업무 협조에 따른 감형은 그대의 재량에 맡긴다.”
“존명.”
완전히 죽어 가던 행정관들의 낯빛에 한 가닥 희망이 비쳤다.
후작이 지도로 눈을 돌렸다.
“아편굴과 거미굴은.
‘제발.,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을 때.
“역시, 좌서장左麻長 메렉에게 위임한다.”
‘.후우.’
딱딱하게 굳었던 뼈마디가 천천히 풀어졌다. 당장 이 괴물이 레나를 쫓는 일은 없으리라.
후작이 음침한 얼굴의 행정관을 바라봤다.
“성 지하에 감옥이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안내해라.”
- 저벅.
후작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나를 곁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둣 들고 내려왔다.
어두운 통로는 피와 소독약 냄새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위에 목쉰 절규들이 요란히 칠해졌다.
눈을 바치고 심장을 바칠 테니 제발 아편 한 모금만 필 수 있게 해달라는 외침들이 절절히 울렸다.
후작은 감흥 없는 눈빛으로 지하 감옥을 한차례 훌었다.
그리고 툭, 하고 경비대장의 머리에 손을 댔다.
파직거리는 기운이 경비대장의 대머리로 스며들었다.
신경을 긁어내는 기운이었다.
경비대장이 몸을 발작적으로 파닥거렸다. 재갈은 풀린 채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대머리는죄를 끝없이 자백했다.
제발 죽고 싶다고 빌었다.
목표는 그것뿐일 정도로 괴로운 것같았다.
고통으로 이빨이 다 빠져 발음을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후작과 그의 대화 패턴은 대략다음과 같았다.
“완전히 맛이 간 것들은 아편굴에 처박아서.
“다음.”
“팔다리를 자른 채“다음.”
후작은 답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행정관들에게 들은 사실은 다음,
다음이라고 말하면서 계속 넘겼다.
하지만 새로운 건 정말 드물었다.
나오는 것마저도 후작이 원하는 게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저 경비대장 녀석은, 황제 암살과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자초지종을 아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
궁금하면.
‘.턱이나 다시 끼워주든가.’
상악골 아래가 허전했다.
아래턱뼈를 후작이 뚝 떼어 간 터라, 이를 딱딱 부딪칠 수도 없다.
물론.
끼워 준다고 해서, 자세한 사정을 알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이 녀석에게서 도망가는 게 확실할 때에나 말해 줄 생각이다.
“다음.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