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00화 (100/458)

후작은 그 말만 계속했다.

그는 엉뚱한 이야기나 실컷 들어야했다.

대머리 경비대장은 자기가 어렸을 적 괴롭힌 아이, 어렸을 적 강간한 경험까지도 전부 탈탈 털어놓았다.

몸에서 그가 털어놓은 비밀만큼이나 많은 피가 흘렀다.

무기로 낸 상처는 없었다.

전부 순수한 고통으로 인해, 그의눈과 귀에서 피가 터져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났다.

“하.”

후작은 짧지만 깊게 한숨을 쉬었다. 들을 만한 게 더 없다고 판단한듯했다.

감옥 철창 안에서, 금단 증상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비명 소리와 경비대장의 꺽꺽거리는 소리가 계속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후작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마지막 질문이었다.

“정말 재 몰라?”

“끽, 히힉, 모, 모홉니다!”

‘그래. 알 리가 없거든.’

후작은 진심으로 짜중 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더 이상 경비대장을 고문하지 않았다. 곁에 선행정관에게 명령했다.

“아편 한 덩이 들고 와.”

“여, 여기 있습니다!”

행정관은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검게 뭉친 아편 한 덩어리가 있었다.

후작은 덜덜 떠는 경비대장의 입에 아편 덩어리를 통째로 퍽, 하고 처넣었다.

걸리적거리는 이빨도 없었다.

치사량의 아편 덩어리를 삼킨 경비대장이 코에서까지 피를 뿜으며 괴로워했다.

“삼십 분 정도 살겠군.”

후작은 경비대장의 남은 수명을 판단했다.

그리고 손으로 아편 중독자들이 갇힌 쇠창살을 제꼈다.

- 끽! 끽!

명색이 쇠창살이지만, 반항도 못하고 찰흙처럼 옆으로 허물어졌다.

후작은 벌어진 창살 틈으로, 대머리경비대장을 던져 넣었다.

“히, 히이이?”

중독자들은 모두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경비대장의 목으로 넘어간, 뱃속으로 넘어간 아편 덩어리를 어떻게 해서든 한 조각이라도 가지겠다는 둣뱃가죽을 찢고 내장을 파헤치고 있었다.

“끄, 끄힉, 흐이, 이익! 히이아악!”

감옥 ^■은.

꺼져 가는 모닥불에 잘 타는 활성탄을 던져 넣은 듯한 모습이었다.

불티 대신 피와 내장이 튀어 올랐다.

행정관은 덜덜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작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경비대장의 명복을 빌지는 않았다.

후작에게서 탈출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그렇게까지 여유롭지는 않았다.성 안 지하 감옥에서 수십 명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편이, 후작의 손에 들려 가는 것보다 백배는 나을 것같았다.

하지만 후작은 나를 안장 앞에 엎어 놓고 말을 몰았다.

- 다그닥! 다그닥!

‘???나한테서 뭘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영 희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게없었다. 수갑이 없어도 놈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경치나 바라봤다.

평범한 남부의 가을 풍경이었다.

레나와 함께 걸을 때는 최고의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신선한 공기가 온몸을 훌고 간다.

이파리들이 가장 다채로운 색을 뽐내는 계절이다.

하지만 후작의 말안장에 엎어져 가니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모든 게최악으로 느껴졌다.

‘.볼 맛도 안 나는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차드드득! 차드득!

길게 고개를 빼서 엎드린 귓가로,

날카로운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황동색 풍뎅이였다.

‘.참 잘 날아다니네.’

어디서 날아온 건지는 몰라도, 자유톱게 가을 하늘을 비행하는 녀석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물론 녀석도 천적이 있다.

땅에 있을 때, 다람쥐나 족제비 같은 녀석들에게 몸이 뜯겨서 간단히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맑은 공기를 가르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이다.

‘적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묶여 있는 일은 없겠지.’

부러운 마음으로 녀석을 홀끗거렸다. 황동색 풍뎅이는 주위를 살짝 맴돌더니 곧 멀리 사라져 갔다.

후작은 가도 근처 작은 마을에 들렸다. 여물을 먹이고 말을 편히 쉬게 했다.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었다. 단정한 흑색 무복이 드러났다. 재질과자수가 몹시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는 몸을 씻은 뒤, 앉아서 무언가를 수련하는 것 같았다.

- 휘우우우우!

‘.웬 바람이지?’

사방이 막힌 방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도, 바람이 일어나는 듯 그의 무복이 펄럭이다 내려앉고, 다시 펄럭이다 내려앉곤 했다.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르겠군.’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제국 4대 검주라 불리는 인간의 일상이다. 무언가 얻어 배울 만한 게있을지도 모른다.

‘집중해 보자!’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고 뭔가 얻어 간다는 건 무리.

옆에서 그를 지켜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재능 레벨을 올리거나.

오랫동안 지켜본다면 뭔가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군.

밤이 깊었다. 멀리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우꾸꾸. 우꾸꾸꾸.

후작을 관찰해 봐이^ 지금은 소득이 없다. 자연스럽게 울음소리에 관심이 쏠렸다.

얼핏 인간 아이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여우 울음소리네.’

산에서 오래 생활한 터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가 계속 울었다.

‘뭘 하길래 저렇게 우는 걸까?’

문득 여우가 사람이 되는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서큐버스님이 나를 무릎에 눕혀 놓고 읽어 주었던 이야기였다.

‘여우가 사람이 될 필요가 없는.

그런 세상은 올 수 없을까?’

책을 다 읽어 준 뒤, 그녀가 덧붙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 우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우는 소리와 함께 또 하룻밤이 지나갔다.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서큐버스님이 생각났다.

후작은 새벽에 출발했다.

바람이 뺨을 뚫고 지나갔다. 아래턱뼈가 분리된 터라 두개골로 더욱 휑하게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 먼지가 두개골 안쪽을 투둑,

치고 지나갔다.

- 차드드! 차드드득!

이번 길에서도 풍뎅이가 날아왔다.

아까와 같은 황동색 녀석이었다.

‘풍뎅이가 많이 사는 지역인가?’

녀석은 쇄골에 앉았다가, 날갯짓을해서 두개골에 앉았다.

- 달그락!

반사적으로 두개골을 흔들었다.

귀찮다는 듯 털어 내는 몸짓을 후작이 흘끗 보다가, 말없이 다시 말을 몰아갔다.

- 차?드드드드!

풍뎅이는 작은 소리를 내며 몸 근처를 날아다녔다.

여기 앉고 저기 앉았다.

녀석을 두 번 보자 무언가 갸웃한 점이 느껴졌다.

- 차드드! 차드드드득!

‘소리가. 특이한걸.’

아주 조그마한 칼날들이 계속 철컥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다.

칼날 날개를 가진 풍뎅이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사실 꽤 귀엽다. 예쁘고 정교한 생물체였다.

하지만 좀 걱정되기도 했다.

‘너무 함부로 다가온 거 아닌가?’

위험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 같았다. 달리는 말 같은 큰 생명체에게 함부로 다가오고, 내 근처에서 친근한 척 날아다니다니.

녀석이 내 근처를 맴도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귀찮기도 하고.

몸을 흔들면 쫓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녀석이 놀도록 방관했다.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다.

이런 작은 녀석에게나 까다롭게 굴려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풍뎅이들은.

나를 무슨 휴게소 같은 걸로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엄지손가락만 한 녀석은 어느새 내갈비뼈를 기어가고 있었다.

가장 직경이 넓은 갈비뼈를 한 바퀴 쭉 돌았다. 척추를 타고 기어가 골반을 한 바퀴 돌았다.

마지막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기어간 뒤.

- 차드드드득!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리며 멀리 날아갔다.

‘방금 내 몸에서 뭘 한 거지? 풍뎅이의 습성 같은 건가?’

- 다그닥! 다그닥!

산길로 접어들며 경사는 점점 굴곡져 갔다. 아래위로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작은 풍뎅이에 대한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지워져 갔다.

여정 일주일째 되는 날.

말은<새까만 수풀 길>에 접어들었다. 밤이 찾아왔다.

‘강가에서 야영할 셈인가. 근처에 마을이 없나 보군.

후작과 말이 모닥불 주위에서 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은 곧 깊게 잠드는 것 같았고,

팔다리가 구속된 채 매달린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달그락. 달그락.

뼈를 차근차근 움직였다. 일주일동안 줄곧 해 온 일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갑에서 벗어나려고, 손목뼈를 모아 보았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뼈의 군주>의 부가 기능.

<골격 변용>의 숙련도는 5.02%를넘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군.’

한없는 무력감이 덮쳐 왔다.

단순한 위기가 아니다. 뭘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는 압도적으로 무력한 상황이었다.

첫 번째 생이 떠올랐다.

용사의 시종에게 짓밟힐 때가.

던전 바닥에서 달그락거리며, 부서진 내 다리뼈를 집어 힘없이 던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의 발에 밟히고, 시종의 방패에 찍혀 빠각빠각 우드득우드득 부서지던 기억이 떠올랐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던 기억들.

이를 악물고 싶었지만 아래턱뼈 가빠진 채였다.

위턱뼈는 힘없이 허공을 헛돌았다.

그때와 비슷한 무력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나는 후작과 용사를 비교했다.

‘느낌은 상당히 달라.’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하다.

터무니없이 강하다.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세계와 타자를 침공한다.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 윤리나 논리는 없다.

‘필요하지도 않지.’

오직 폭력과 욕망뿐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침해를 강요받는다. 조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아직. 무의미한 수준이야.’

처참하게 살해당하던 서큐버스님이떠올랐다.

그녀라도 지키려면.

이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용사들을 이겨야 한다.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었던 스스로에게 황당함을 느꼈다.

순간 지독히 허기가 졌다. 내가 갈길이 얼마나 먼지 생각하자, 다시한 번 힘에 대한 갈구가 솟아났다.

나는 각오했다.

마법사들에게 수십 년을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느슨한 태도를 취한 내가 받아야 할 응당한 징벌로 생각하기로 했다.

‘좋아.’

어디로 끌고 가든, 끌려가 준다. 황실의 비밀 감옥이라도 좋고, 아쥬라의 스펠 홀드라도 상관없다.

기억을 읽어 내고 나를 오랫동안 봉인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래 고통 받는 만큼.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도모른다.

나는 죽어도 끝이 아니다.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였다.

- 우꾸꾸. 우꾸꾸꾸.

‘여우가 많이 사나?’

첫날 밤 들었던 울음소리 였다.

풀벌레 소리, 다른 짐승이 우짖는 소리와 강물 소리에 섞여 들렸다.

하지만 오늘 따라, 울음소리가 묘하게 신경 쓰이는 데가 있었다.

깊이 잠든 후작을 바라봤다.

깨는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장가라도 듣는 것처럼 더없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一 우꾸꾸꾸꾸. 우꾸꾸꾸꾸우.

여우 울음이 다시 한 번 울렸다.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묶인 채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계속 써 온<골격변용>과 함께 종종 써 온 터라, 숙련도가 상당히 상승해 있었다.

‘탐지.’

[탐지 Lv.幻[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초당 0.0014%의 체력이.]

하지만 감각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기척은 전혀 없다고.?’

오싹한 위화감이 들었다.

문득, 가을 밤 맑은 공기가 낯설고 무겁게 느껴졌다.

묶인 채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동은 트지 않았지만, 어둠이 겉에서부터 희미하게 열어지기 시작- 깡!

허공에 강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릿속이 찌르르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내가 돌아보던 수풀과 반대쪽, 바로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 깡!

어슴푸레한 어둠 아래, 쇠와 쇠가 서로 긁히며 불꽃이 튀었다.

칠흑 단검을 상대할 때도 손가락한 마디 정도만 뽑혔던 후작의 칼이검집에서 전부 다 뽑혀 있었다.

얼룩 한 방울 없이 잘 갈린 검이었다. 광채 없는 은백색이 어둠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누구지?’

반대편에는 괴한이 있었다. 어두워잘 보이지 않았다.

- 까가강!

다시 한차례 칼날이 얽혔다.

튕겨 난 괴한은 숨을 고르고 두 발자국 크게 물러섰다. 그리고 손에든 무기를 고쳐 쥐었다. 양손에 하나씩 든 무기는 무척 기괴했다.

갈고리를 소검小劍처럼 만들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날카롭게 푹 파고든 뒤 찍어 당기기 좋아 보였다.

‘저런 걸. 갑옷 입은 상대에게 사용한 다는 말인가?’

뭘 찍어 당기려는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은 무기였다.

애초에 괴한의 목적은 격돌이 아닌것 같았다. 둘 사이에 떨어진 후작의 배낭이 보였다.

‘.가지고 도망가려고 했군.’

후작이 잠에서 깬 이상.

혹은 자는 척을 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이상. 괴한의 운명은 실패를 향해 가파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후작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며 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어떤 준비동작도 없었고, 눈으로 잡히지 않을 만큼 빨랐다.

- 끼기기기긱!

괴한은 양손의 갈고리를 교차해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칼이 갈고리를 주르륵 긁으며 불꽃이 튀었다.

괴한이 가볍게 불평했다.

“???너무 세잖아?”

성별과 나이를 전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라면 알아볼 텐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았다.

격돌의 충격으로 괴한은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났다. 후작은 한순간에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후작은 느릿하게 말했다. 휘둘러지는 칼은 조금도 느리지 않았다.

- 까앙!

괴한은 휘청거렸다. 간신히 칼을 막아 냈다. 딛고 선 바닥이 깊게 푹파였다. 괴한의 다리가 종아리까지 진흙탕으로 푹 파고 들어갔다.

“일단 양팔을 가져가 주지.”

후작의 몸이 순간 흐릿해졌다.

그가 든 검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날카롭게 일어났다.

동시에 양손에 든 검붉은 갈고리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잘렸다.

무기가 잘린 괴한은 피하지도 못했다. 그런 만만한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이 아니었다.

- 슈우응!

양팔을 후작의 은백색 검이 가르고 지나갔다. 검에 맺힌 빛무리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방금의 참격은, 괴한이 열 걸음 뒤로 물러났어도 그대로 잘라 냈을 만큼 공격 범위가 길었다. 괴한은 한걸음도 뒤로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육음이 들리지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짧은 비명도 없었다.

괴한은 그대로 팔을 뻗었다. 검에 갈라졌던 팔은 그대로였다.

반으로 갈라진 괴한의 손이 후작을 향해 뻗어졌다.

손에 쥔 ‘갈라졌던’ 검붉은 갈고리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후작의 갑옷 흉부를 통과했다.

뚫은 게 아니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후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갔다.

두 개의 갈고리는 후작의 ‘심장’을양쪽에서 잡아 뜯어내고 있었다.

“심장, 가져간다?”

가면 뒤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팟!

후작은 땅을 박찼다.

- 스록!

내던진 몸이 괴한을 그대로 투과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안에 박혔던 갈고리가 앞으로 빠지며, 후작은 바닥에 한 움큼 격하게 피를 토했다.

심장은 지켰지만 갈고리에 안쪽 장기가 엉망으로 망가진 것 같았다.

후작은 바닥을 굴렀다.

쇼크로 떨리는 손을 품에 넣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약병을 꺼냈다. 딸 시간도 없이, 피를 토하는 입에 억지로 처넣었다.

- 와그작!

병째 포션을 씹는 소리가 울렸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피범벅이 되어 후작의 속살을 마구 유린했다.

그 사이에 괴한은 배낭을 잡았다.

그리고.

- 달그락!

쇠말뚝을 간단히 뽑아내고, 나까지 잡아 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여우?’

진짜 여우는 아니었다.

가면이었다. 괴한은 이마에 세 가닥 붉은인이 찍힌 하얀색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 팟!

괴한이 바닥을 박찼다. 가면 뒤의 변조된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입회 활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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