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벌레들의 무덤 (3)
삭막한 황야 위로 밤빛이 희미하게 부서진다. 냄새도 소리도 없다. 한포기 풀은커녕 지표가 될 만한 바위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소리가 이곳의 유일한 배경음이었다.
걸을수록 주위는 점점 스산해졌다.
나와 수녀까지도 이 낯선 정적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이런 장소가 있었나?’
이런 장소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바르지 않은 용어다. 내가 아는 장소 따위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얼음 계곡에서 일 년.
미로 동굴, 망령의 납골당, 에라스트 근처의 산에서 3년씩을 보냈다.
좁디좁은 에라스트 근방 지리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 뒤로는 마왕군에 의해, 거대한 무리의 일부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만 다녔다. 많이 다니긴 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오직 같은 해골들의 뒤통수뿐.
그 안에서 숫자가 되어 살아갔다.
한 덩어리가 되어 흔들리면서, 7년을 생각 없이 홀려 보냈다. 아무 생각이 없어야 견딜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회상해 보니 문득 의문이 솟구쳤다.
‘왜 도망치지 않았을까?’
나를 담당한 녀석의 통제력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네크로멘서였지만, 기스-제-라이와는 태양과 반덧불 차이 정도였다.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벗어나서 혼자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왕군에서 벗어나 뭘 할지대안이 전혀 없었다.
도망친다면 예전처럼 산속에서 야생 짐승에게 장난감처럼 부서져서죽거나, 별거 아닌 최하급 모험 자에게도 연습용 타깃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그 속에 묻혀 살았다.
‘잘한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점점 달라지고 있다.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빠른 속도로 내가 접하는 세계가 크게 넓어지고 있다.
네크론.
T&T.
푸르손의 추종자들.
제국 4대 검주.
기스-제-라이.
레드 플레이크.
‘그래. 지금부터 얻는 정보들이.
<진짜H1 가까울 거야.’
멍하니 살아왔던,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살아왔던 세월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집중하자.’
새로운 장소로 가고 있다.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 모든 게 단서가 된다. 예전처럼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이번 생은 여러모로 특별하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네크로멘서에게놀라운 권능을 전수받았다.
황제 암살을 경험한 데 이어, 제국4대 검주 중 하나라는 후작에게 납치당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레드 플레이크의 암살자에게 구출되었다.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 계속되고 있다. 더 신중하고 집중해야 한다.
- 달그락. 달그락.
풍뎅이를 밀며 생각했다. 이번 생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는 게, 향후의 행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지금도 새로운 장소를 지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탐지.’
주위를 살펴서 하나라도 더 정보를 습득하고 싶었다.
[탐지 Lv.2]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14%의체력이 소모.]
메마른 땅이 느껴졌다. 고요하다.
밤이 내린 황야는 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옆에서 여우 가면을 쓴 수녀가 나를 흘끗 바라보고 말했다.
“대단하네?! 레인저였어?<깨끗한 눈>이 울고 가겠어. 이 거리에서 곧바로 탐지를 켜다니.”
- 달그락.
작게 움찔했다.
‘깨끗한 눈’은 자유 연합의 최정예레인저 집단이다.
제국에 맞서 마지막까지 항전하고,
도망쳐서 마왕군과도 싸웠다던 유명한 자들.
물론 그런 자들과 비교됐다는 것에 놀란 건 아니었다.
‘스킬을. 곧바로 알아냈어?’
첫 번째.
내가 탐지를 사용했다는 사실.
그걸 수녀가 곧바로 알아차린 사실에 흠칫했다.
두 번째로.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그 부분을 알기 어려웠다. 우연히 탐지 스킬을 썼지만, 정말로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
탐지를 활성화한 채 집중했다.
최대한 넓은 범위를 느끼고, 보려했다.
‘없는데.’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기이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평야.
그냥 나를 놀린 것 같았다.
집중을 유지하고 있을 때, 곁에서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버에 가 본 적 있어?”
엠버.
솔직히 말한다면 믿지 않을 거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기도 싫다. 그래도 날 구해 준 여자다.
“.1157년까지는 가 본 적 없소.”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일부러 애매하게 말했다.
1157년.
그 이후였다.
군 단병으로서 사역당하며, 그곳을침략했던 것은. 잿더미와 시체밖에 남지 않은 엠버에 가 본 것은.
여우 가면이 쿡,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이 1147년인데? 친구, 무슨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1157년의 엠버까지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하하하. 해골 친구, 누굴 꼬시려고 말을 그렇게 재밌게 해?”
“그래서 깃스가 좋아한 건가. 이정도면. 두상도 예쁘고 말이야.”
수녀가 내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큭큭 웃었다.
‘깃스? 혹시 그게 기스-제-라이의 애칭인가.’
하지만 직접적으로 캐어묻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별빛. 청여우, 당신은. 엠버에머물 생각이오?”
“글쎄.”
역사가 예전과 같이 흘러간다면,
여우 가면의 수녀는 몇 개월 안에 죽는다.
전쟁 첫 해.
제국의 침공에, 엠버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고 전해지니까.
나는 그녀에게 자못 엄숙하게 경고했다.
나를 구해 준 상대니까.
“???분명히 말하겠소. 올해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좋을 거요.”
“푸하핫! 왜? 우리 해골 친구, 방금 완전 진지했어?”
그때였다. 멀리 저편의 어둠이 조금씩 짙게 느껴졌다.
진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 쏘이이이이이?]이이잉.J‘벌레?’
윙윙거리는 소리를 느꼈다.
소리는 탐지 범위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그 이상이었다.
측정할 수 없는 숫자의 조그마한 날갯짓, 주파수들이 멀리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찻.!
저편의 짙은 어둠이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섬뜩했다.
반사적으로 탐지 스킬에 한층 더집중했다. 새까만 어둠의 결 하나하나가 느껴졌다. 셀 수 없는 무수한금속음이 들렸다.
천.
이천.
오천.
그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 숫자가 극히 일부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녀가 먼저 말했다.
“벌레들이 야.”
“아까 말한 게 혹시.r“응.”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를 다 세지도 못하겠소.”
“몇 마리까지 셌어? 1억? 2억? 그것보다 좀 더 되는데-.”
그 말에 깜짝 놀라 풍뎅이를 밀지도 못하고 멈칫거렸다.
수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수억 마리의 벌레 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수억 마리라니.
“저런 군체 숫자가 이 부근에 수백은 될 꺼야.”
숫자 계산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아직 이쪽으로 다가오려면 몇 분은 넘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풍뎅이를 미는 속도로도 망치기는 곤란했다.
“저게 뭔지. 알고 계셨소?”
수녀가 피식 웃었다.
“B마이너14 지역. 보다시피 황량한 평야지만, 우리끼린 ‘붉은 늪.’이라고 부르지. 이곳을 맴도는 기계 부유물들이야.”
“.기계라고?”
“그래. 아까 봤던 풍뎅이들 같은.
그런데 좀 달라.”
수녀가 말을 이었다.
“훨씬 작고. 폭발하는 대신 전부다 갉아먹거든? 돌이든 뼈든 안 가리구. 만나면 굉장히 힘들 꺼야.”
- 달그락.
나는 무심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다양하게 죽어 봤지만, 벌레 떼에게 갉아 먹혀서 죽는다는 건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수억 마리의 벌레라니. 우리는 왜 여기로 온 거요?”
“아하하하하핫.
웃음소리는 뱃속에서부터 깊게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수녀가 내 팔을 잡고 말했다.
여우 가면의 붉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너 버리러 왔어. 질투 나서.
내 깃스를 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군 단병이잖아? 총애는 잔뜩 받은 주제에. 마지막 뼈 한 조각까지 먼지로 만들어 줘야지.”
순간, 바닥 깊은 곳을 흐르는 지하수까지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에에? 정말 속았어어? 농담이야.
코드네임 별빛청여우, 입회의 의무에 충실하겠습니다! 헤햇.”
농담이 심한 여자였다.
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얼어붙어 있다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대꾸할 수 있었다.
“.그럼 도망갑시다. 빨리 이 풍뎅이에 올라타서.!”
수녀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뭐, 그럴 것까지는 없고. 연료 충전해 놨다가 나중에 써야 돼.”
“그럴 게 없다니, 당장 죽게 생기지 않았소. 저런 게 대체 왜. 어디서 나타난 거요?”
그때 였다.
“이거나 좀 볼래?”
수녀가 품에서 작은 판을 꺼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판이었다.
- 타닥. 타다닥.
그 판을 몇 번 두드렸다.
풍뎅이의 두 눈에 파란빛이 들어왔다.
아까처럼 부우우우응, 하는 기괴한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허공에 매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S.G.I.S. - 절전모드로 기동 중.]
[지형 정보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현재 위치 인식. 저장하신 API 배율을 로드 합니다.]
[MapType 객체는.]
수녀가 짧게 말했다.
“유산만?”
[사용자 지정 프로젝션을 구현합니다.]
풍뎅이의 두 눈에서 비치던 파란빛이 모아졌다.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생겨났다.
‘지금 누구랑. 얘기를 한 거지?’
하지만 질문을 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수녀가 반투명한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봐 봐. 여기 동그랗게 표시된 게이 녀석이야.”
곧게 뻗은 손가락은, 반투명한 창위의 파란색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풍뎅이 엉덩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수녀에게 물었다.
“.지도인 거요?”
“응. 반경 16km.”
파란 점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나타나지 않소?”
“절전모드거든. 맵타입 객체를 유산만 표시해서 그래. 뭐, 이 근처에 생명체 따위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일단 수녀의 손놀림을 따라갔다.
수녀는 북쪽에 있는 거대한 붉은 원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원은 아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붉어지는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반투명한 허공에 표시되어 있는 걸보는 것만으로도 어떤지 섬뜩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붉은 소용돌이를 보고 물었다.
“이게. 저 벌레 무리요?”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들은 여기에 구현되지도 않았어. 유산만 나와.”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붉은색은. 등록되지 않은 파장.
즉 미발굴 유산을 뜻해. 일단, 우리는. 이 소용돌이를 ‘1만 배’라고 부르고 있어.”
“1만. 배?”
“지금까지 발견된 유산 중에 가장 강력한 파장보다, 수치가 1만 배 강하거든.”
나는 뒤에서 밀고 있던 풍뎅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 풍뎅이도 ‘유산’이라고 하지 않았소?”
“개랑은 3만 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여우가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씩 짐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풍뎅이만 해도 황당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말보다 열 배는 빠르다. 심지어 날개를 펼쳐서 하늘을 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눈에 봐도 방어력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기동성 하나만 생각하더라도.
활용도가 대체 얼마나 될지 떠오르는 것만 해도 까마득하다.
게다가.
새로운 능력이 양파처럼 한 꺼 풀한 꺼풀 계속 드러나고 있다.
“.터무니없지 않소.”
터무니없다.
이것의 3만 배라니.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 숫자는 어처구니가 없다. 여우 가면의 수녀가 어깨를 으쪽한다.
“그러니까, 이 근방 50km가 전부 저런 기계 부유물로 가득한 거지.
유산이 내뿜는 파장에 끌린 거야.
이쯤 되면, 뭐가 있는지 우리도 솔직히 상상이 안 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국에서는 그냥. 그대로 저 걸보고만 있소? 이 넓은 땅을 못 쓰고있었다는 말이오?”
그때 였다.
- 위이이이이이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