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기분의 문제 (5)
유블람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반짝이는 은괴들을 본 레나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레나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저번 생보다도 한층 더 강해졌다.
내 힘은 분명히 그녀에게 도움이 될거다.
레나가 궤도를 타기 전까지 최대한도움을 주고, T&T 이너 서클이 나에게 관심을 갖기 전 한발 뒤로 물러선다면.
꽤 견고한 위치에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걸어갔다. 아직 날이 밝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달빛이 발끝에 걸렸다.
천천히 걷다, 검술을 다시 한 번가 다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싁!
소리는 한 번처럼 겹쳐 들렸지만 칼질은 두 번이었다.
네 조각으로 잘린 풀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검술 Lv.10을 달성하고 가능해진움직임이었다.
나는 내 상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기스-제-
라이의 도움이 컸다.
‘기스-제-라이.’
그 이름을 떠올리니 복잡한 심경이 몰려온다.
나는 유블람으로 걸어가고 있다.
얽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고서.
반대 방향에 있는 메마른 지하 묘지에선 그녀가 황제 행렬을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아무리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도,경고 하나 없이 이대로 지나쳐도 되는 걸까.
- 달그락.
루비아가 남겨 준 갑옷 속에서 뼈를 조금 움츠렸다. 가을 밤바람이갑자기 차게 느껴졌다.
생각에서 도망치듯 다시 칼을 몇번이고 휘둘렀다.
칼날에 베인 하얀 달빛 조각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바람 끝에 매달려 있던 풀벌레 소리가 몇 가닥씩 잘려 끊어졌다. 가을밤의 열은 추위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결국 베고 싶은 건 마음 깊숙이 숨은 죄책감이었지만, 그건 내 칼로 베기엔 너무 강한 감정이었다.
- 스르릉.
한참 달빛 아래를 휘젓다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고 한들, 달빛에 우스운 꼴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대단하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다가오는 기척마저 느끼지 못했다.
나는 긴장한 채 뒤로 돌아섰다.
비록 목소리에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고 잡념에 빠졌다고 한들, 접근을 허용한 상대다.
붉은 도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이쪽을 향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저 녀석은.’
달빛에 비친 녀석의 얼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상대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놀라운 기술이고, 힘과 속도야. 감탄해서 멍하니 봐 버렸어.”
긴 검은 머리를 하얀 머리띠로 묶고, 도복 같은 붉은 옷만 입고 있는 날렵한 몸매의 남자.
허리에 찬 긴 칼이 인상적이다.
‘챈들러. 남작 이랬나.’
내가 발도 술과 동방어, 지혜를 흡수한 상대.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창 네 자루를, 고작 두 번의 칼질로 열두 조각으로 만든 남자다.
뛰어난 기술과 속도의 보유자.
‘안. 죽은 건가?’
하지만 저번 생에서 녀석은 기소-
제-라이에게 장난처럼 살해당했다.
내 첫 번째 ‘먹이’로 활용됐다.
정수 흡수의 희생양으로.
동굴에서 깨어난 첫 번째 날에 벌어진 일이다. 오늘은 내가 깨어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챈들러 형빈 이라고 한다. 무사 수행 중이지. 네 이름은?”
“형빈 이라고?”
특이한 이름이었다.
“동방에서 받은 법명法名이지.”
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메마른 지하 묘지 쪽을 손가락으로가 리키며 물었다.
“저쪽에서 오나?”
“그래.”
‘역시 그렇군.’
이자는 예전과 같은 루트를 탔다.
하지만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
눈앞의 검사가 그녀에게 죽었던건, 역시 나 때문이었나.
“그럼 됐다. 이제 웬만하면 저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라.”
- 터벅.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이름을 물었다만.”
“궁금하면 가르쳐 줘야 하나?”
“호오.”
챈들러 남작이 작게 웃었다.
“뭐,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이것도 인연이니.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군.”
가르침?
“무슨 헛소리.
녀석을 떨쳐 내려다 말을 삼켰다.
저번 생에서 저 녀석은 내가 아니었으면 안 죽어도 될 운명이었다.
괜히 길을 가다가, 내 먹이로 삼아지려고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나와 일대일로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만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서도.
거품이 툭 꺼지듯 억울하고 허무한 죽음이 오죽 많겠냐만, 놈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스킬도흡수했는데.,
칼 한 번 섞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저번 생보다 강해진 지금.
나보다 분명히 한 수 앞서 있던 인간을 상대로, 검술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경비대장보다 서너 발자국은 앞서 있는 실력이니까.
“그래. 덤벼 봐라.”
나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챈들러는 발을 움직였다. 역시 칼자루에 손을 댄 채, 칼을 빼어 들지 않은 채 자세를 낮췄다.
잘 아는 자세다.
발도술.
‘보인다.’
내가 들어갈 때 어떤 각도로, 어떤궤적으로 도가 그어질지 전부 눈에 선명히 읽혔다.
타이밍을 맞춰 교묘하게 피하며,내 목을 날리려는 수작이 하나하나전부 허공에 선처럼 그어졌다.
속도, 힘, 약점이 모두 보였다.
‘이거. 내가 너무 유리하군.’
녀석을 앞에 두고 보니, 발도술을알고 있다는 것 외에도 녀석과 나의수준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탐지.’
눈앞에 있는 챈들러의 심장박동과,
근육 움직임까지 어느 정도 잡혀 왔다.
? 털썩.
칼을 빼서 던져 놓았다. 그리고 검집만 손에 들었다. 이걸로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T7.ㄲㅇ ?
챈들러 남작의 미간이 좁혀지며,
입술이 강하게 다물렸다.
“.지금 모욕하는 거요?”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최선의 공격을 해 봐라. 세 수를 양보해 주마.”
“목숨이 네 개쯤 되나?”
챈들러의 안광이 폭사됐다.
“일단 열 개는 넘는 거 같은데.
“무례하다!”
나름대로 성실한 답변이었지만, 챈들러는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가 세차게 땅을 디녔다. 절기 발도 술이 극쾌의 속도로 펼쳐졌다.
- 팟!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챈들러 본인에게 발도술을흡수한 내가 공격을 맞아 줄 리가 없다.
손에 단단하게 쥔 검집으로, 가장힘이 적게 실리는 도신의 약점을 핀 포인트로 후려쳤다.
- 픽!
“커헉!”
부딪히는 순간 챔들러는 뒤로 몇 발자국 튕겨 났다.
칼은 간신히 잡고 있었지만 놓치기 어려운 허점이 한가득 생겨났다.
“하나.”
“으으웃.!”
자세를 가다듬은 챈들러는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며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질주.’
나는 아예 챈들러의 뒤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챈들러의 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다.
‘은신.’
뒤에서 은신 스킬을 사용하자, 놈은내 위치를 잡지 못하고 홈칫거렸다.
곧 육안으로 확인해 내게 칼을 겨누긴 했지만, 전투 중에 이런 식으로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나 싶어제법 신선했다.
‘자주 써먹어 봐야겠군.’
“둘. 이제 한 번 남았다.”
첸들러가 이를 꽉 악물었다.
“히야 아압!”
비 검秘劍신 월참新 月 新한 자루의 칼이 두 갈래로 휘어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좌우의 사선에서 나를 가두는 것처럼 대각선으로 베어 왔다.
‘호오. 이런 기술도 있었나?’
흡착!
- 좌르륵!
하지만 결국 한 자루의 칼. 흡착Lv.5에 챈들러의 긴 칼은 꼼짝없이 내 검집에 착 하고 붙어 버렸다.
“옷! 으웃!”
챈들러는 검을 떼어 내려 발버둥쳤다.
“이게 어떻게 된.!”
하지만 전생에 처음 만났을 때조차도, 힘은 내가 녀석보다 훨씬 더 높았다.
“세 번 다 끝난 거 같은데?”
- 획!
녀석을 당겼다. 칼을 놓칠 수 없는 검객인지, 챈들러의 몸은 그대로 흑끌려왔다.
- 픽!
주먹을 살짝 배에 꽂아 넣었다“끄흐억!”
챈들러가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걸로 된 거겠지.’
“끝났다.”
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뒤로 돌아섰다. 그때였다.
- 덥석.
“자, 잠시만.!”
“뭔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소? 제발. 손해는 안 보실 거요.”
챈들러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더 하자고?”
“그렇소. 제발.
“.왜 그러지?”
“검술에 진전이 없어 괴롭던 참이었소. 내 몸에 무기를 댈 만한 수준의 검객이 없었지. 대체 얼마 만인지. 동방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소이다.”
‘없기는.’
나는 후작을 생각하고 흠칫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챈들러 녀석도 무사 수행이랍시고 많이 돌아다녔을 텐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아, 내 저번 생에 괴물이 지나치게 많았던 건 확실히 사실인 듯하다.
“.그런가.”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시간은 많고, 나는 챈들러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 빠악!
“끽!”
- 빡!
“크흑!”
- 퍼억!
“끄아악!”
“.그만할까?”
“아니오. 더. 더 때려 주시오.”
‘말이 좀 이상하잖아」
- 베?악! 빡! 삐?박!
“끄흑. 끄허어억!”
경쾌한 소리가 달밤 아래 울려 퍼졌다. 챈들러의 정강이와 팔뚝을 세 차례 연속으로 후려갈긴 뒤 뒤로 물러났다.
나는 첸들러의 희망대로 그를 밤새 지도해 주었다.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저 통증을 극대화할 정도로만 때렸다.
‘확실히. 재능은 있군.’
한 번 맞을 때마다 같은 부분을또 맞지 않도록 움직임이 보완되는 게 보였다.
“끄흑.r챈들러가 식은땀으로 온몸이 범벅된 채 비틀거렸다. 나는 서서히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물었다.
“이제 가야 된다.”
“조금만 더 하면.
“.정중히 거절하지.”
“아쉽군. 하지만 정말 고맙소. 많은 가르침을 얻었소이다.”
챈들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예를 취하려 했다.
툭.
억지로 일어나려는 녀석의 어깨에검집을 대서 다시 앉혔다.
“무리하지 마라.”
바닥에 앉힌 채, 다시 가도로 향하려 할 때였다.
“자, 잠시만.r“더 맞으면 정신을 잃을 거다.”
“그게 아니라.
첸들러는 품에서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패를 꺼냈다.
“오늘의 가르침은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소. 답례로, 이거라도 받아 주시지 않겠소?”
“이게 뭔데?”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그라스미어의 차기 영주요. 기본적으로 칼 보는 눈은 있지.”
알고 있다.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곳, 대장간의 도시 그라스미어. 눈앞의 남자가 그곳의 차기 영주라는 것도.
챈들러가 말을 이었다.
“가지고 계신 무기가. 실력에 비해 아쉽더구려. 이걸 그라스미어 경비병에게 보이고, 안내를 받으시오.
평생 무기 걱정은 안 하시게 될 거요.”
- 덥석.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팬들러가건네주는 금속 패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안 그래도 무기를 맞춰 볼 생각이었으니까.
“잘 써먹도록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성장해 있겠소! 기대하시오! 어이쿠. 77ㅇ ?.!”
온몸에 타박상이 뒤덮여 혼자 끙끙거리는 그를 놓아두고, 유블람으로걸어갔다.
가도를 따라 쭉 걸어갔다. 중간에,
벌써 시체들을 뜯어먹는 까마귀 떼가 있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옆으로 슬쩍 돌아갔다.
‘.다 왔군.’
곧 회색 성벽과 도개교가 보였다.
수풀 사이로 난 가도를 걸어가 성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활짝 열린 성문에는,
놀랍게도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경비병이. 없어?’
적당히 돈을 먹일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숨어 있는것도 아니었다.
무슨 함정인가 싶었다.
‘탐지.’
하지만 근처에 매복해 있는 녀석도 없다.
‘무슨 일이지.,
- 터벅.
성문 안으로 발을 디디자, 거리가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나는지 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어이쿠!”
하지만 그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곧 내했다.
‘으음.
자갈돌이 가지런히 깔린 거리를 따라 올라가자 곧 오른편에 대장간이보였다.
깡깡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지만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작업복을 벗으며 말쑥한 옷을 챙겨 입고 있다.
‘이 녀석.
익숙한 얼굴이다.<불>을 가지고 있는 인간 노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제법 들뜬 표정이다.
“노인, 말 좀 물읍시다.”
“크흠! 당신, 날 아시오?”
“.초면이오만.”
“그런데 왜 이리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거요? 몇 번 만나기라도 한사람처럼.”
살짝 놀랐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이었다.
“거리가 왜 이렇게 어수선한 거요?
성문이 경비병도 없이 활짝 열려 있던데?”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여행객이신가?”
“그렇소.”
“거, 투구 좀 벗어 보지.
‘마스커레 이드.’
나는 스킬을 시전한 뒤 투구를 벗었다. 이 노인은 후작의 얼굴을 모르고, 이건 정확히 말하면 후작의 얼굴도 아니다. 노인은 나를 보고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처음 보는 분인데. 음.
그게, 이 도시 영주라는 놈이 야밤에 뒷문으로 내뺐다오. 뒤가 더러운 놈 몇몇도 같이 도망갔지. 지금 경비대가 난리가 났지 난리가.”
‘.나 때문이군.’
나는 유블람 경비대장과 그 패거리를 죽인 뒤, 영주에게 자살하라 고전했다.
돌이켜 보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주는 자살하는 대신, 지은 죄가 두려워 야반도주를 택한 거다.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진짜 영주가 하룻밤 만에 도망쳐버린 거다.
한번 쫓아 볼까 싶었지만, 한밤중에 도망쳤다면 어차피 지금 추격해선 늦다.
‘관두지. 그나저나.
내 행동이 미래를 바꾸고 있다. 생생하게 와 닿고 있었다.
동굴에서 일어난 지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라스미어의 공자 챈들러가살아남아 나에게 대련을 청했고, 유블람 영주는 모든 걸 버리고 밤중에 도주했다.
내가 개입하려고 하면, 미래는 어마어마하게 바뀌게 되는 것.
‘전쟁이나. 마왕 강림, 용사 출현 같은 걸 아예 막을 수도 있을까.’
물론 지금으로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하지만 이렇게 회귀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누적 레벨을 올려 간다면, 언젠가는 4대 검주도 이길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전쟁과 마왕 강림을 막게 된다면, 서큐버스님도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지금 수준에서 생각할 건 아니었다.
나는 노인에게 흘끗 인사를 한 뒤대장간을 나와, 여관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