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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117화 (117/458)

118화 기분의 문제 (9)

“뭐라고?”

그녀는 아예 투구를 벗었다. 바깥으로 긴 실버블론드가 흘러내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에 어울리지 않게.

무엇보다 도살의 한가운데 있는 인간답지 않게, 여자는 묘하게 달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시오. 후작이꼭 전해 달라 했소. 황제는 가짜요.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 마시오.”

“그, 그분이. 왜, 왜 나를?”

근위대에게 명령을 내리던,  삭풍 같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그나저나,

“왜 당신을. 이냐니.

의아한 이사벨의 반응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반응은 뭐지? 결혼이라도 한 사이 아니었나?’

“레안드로 후작과 당신. 친밀한 사이 아니었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명철하지 못한 의혹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주위에선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비명을 지르는 쪽, 으스러지는 쪽은 주로 근위대였다. 한 명 한 명의실력은 근위대가 우월했지만 숫자에서 너무 밀렸다. 그만큼 이사벨은급했고, 나는 느긋했다.

“헛소리!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이사벨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나에게 칼을 내리쳤다.

여러 자루의 창이 그녀를 찔러 왔다. 하지만 그녀를 저지하는 공격을 전부 흘려 내고, 나를 쪼갤 기세로 똑바로 검을 내리쳤다.

- 쩌엉!

‘이 정도로 강했다니.

검신이 부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칼자루를 쥔 손아귀가 충격으로 떨려 왔다. 이사벨은 칼을 휘두르면서도 다급하게 외쳤다.

“그분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너희 따위의 마수에 그분이 당할 리는 없다만.

“그렇지 않소!”

다른 해골들이 끼어들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창칼을 내 손으로 쳐내며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썼다.

곁에 있던 듀라한들은 칠흑 단검을 보여 주자 다른 전장으로 뛰어들었지만, 일반 군 단병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레안드로 후작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소. 아주 안전한 상태지. 난 그냥 부탁을 받은 거요.”

“너 따위가? 헛소리!”

“전장을 보시오. 우리가 압도적이지 않소?”

“그게 어쨌다는 거냐.”

“가만히 놓아둬도 어차피 황제는죽는데, 당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소?”

이사벨은 칼자루를 조금 낮췄다.

하지만 목소리에 서린 한기는 여전했다.

“증표는 있나?”

증生후작의 말을 듣고 왔다 할 증표.

그런 게 필요했나.

“증표도 없이. 감히 나를 현혹시키려 했단 말인가.”

- 팟!

그녀가 땅을 박찼다. 흙이 뒤로 높이 튀었다. 몸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빨랐다.

‘.젠장.’

간신히 칼을 들어 막았지만, 커다란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바스타드소드가 부러져 버렸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 쨍!

쇠와 쇠가 세차게 부딪쳤다. 나는 뒤로 네 걸음을 물러난 후에야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잠시 현혹되었던 내가 부끄럽군.

너는 그분을 모른다. 증표도 없이 명을 내릴 분이 아니시다.”

‘.실패인가.’

기절이라도 시켜 멀리 버려두면 좋겠지만, 그럴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단장이 든 검을 바라봤다.

칼끝뿐 아니라 날 전체에 은은한 연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검기를 구현시키고 있었다. 이사벨 시몬느는이제 힘을 아끼지 않는다. 끝을 보려는 태도였다.

“증표는 무슨 증표난 말이오!”

뭔가 알아내려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문답무용으로 곧장 공격해 들어왔다.

주위의 칼을 주워 몇 번의 검격을교환했다. 홀려 내며 시간을 끌려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증표. 증표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후작이 그런 증표를 내게 건네줄 리 없다. 녀석과 만날 생각도 없었다.

생각이 흐트러지자 칼이 절로 어지러워졌다. 훌쩍 뛰어 뒤로 십여 미터를 물러났다.

그 사이를 스켈레톤 나이트들과 트롤 해골들이 치고 들었다.

이사벨은 연푸르게 빛나는 칼을 휘둘렀다.

네크로멘서의 군단병들은 조각난 창칼을 붙잡고 뒤로 튕겨지거나, 빛나는 칼에 베여 쓰러졌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주위에 부서진 해골이 늘어났다. 하지만 뒤편에서 들리는 비명과 파육음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그녀의 주위에 기묘한 정적이 생겨났다.

네크로멘서의 군단이 모두 물러나공터를 만들어 냈다.

거칠 것 없는 이사벨의 검이 내두개골로 다시 날아왔다.

- 드르르르록!

땅에서 수십 가닥의 뼈 촉수가 그녀에게 덮쳐 왔다.

- 화특! 화륵! 좌르륵!

“끄으윽!

팔다리가 단단히 뒤로 구속되고,

온몸이 뼈 촉수에 칭칭 감긴 채 지친 이사벨이 허공에 솟아올랐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예언자 아기, 뭐 하니? 내가 죽는거니, 아니면 네가 죽는 거니?”

기스-제-라이였다.

- 화록! 좌르록!

버둥거리는 이사벨을 향해 몇 가닥의 뼈 촉수가 더 조여졌다. 작은 숨구멍만 빼고 온몸이 완전히 조여진 상태였다.

고요했다. 나는 전장을 돌아봤다.

‘다. 정리된 건가?’

근위대는 대부분 전멸했다. 두 마법사의 처리도 끝난 것 같았다.

“.벌써?”

벌써 끝난 거냐는 물음이었다.

기스-제-라이는 알아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네크로멘서는 피식 웃었다.

뭘 씹어 먹기라도 했는지 입가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저번보다. 처리가 빠르군. 뭐가 달라진 거요?”

“힘을 개방했어. 부작용은 있겠지만, 내가 죽는다는데 아낄 거 없잖아? 예열 좀 했지.”

굽이굽이 컬 진 그녀의 머리칼이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려한 곡선 뒤로 방울방울 흐르는 피가 묘하게 아름다웠다.

기스-제-라이의 시선을 따라 마차 쪽을 바라봤다.

날씬한 체구의 듀라한이 황제를 수레에서 덥석 잡고 끌어냈다.

“주군, 목표를 확보했다.”

“어, 펜리르! 민첩하네?”

펜리르라고 불린 듀라한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제 머리를 높이 한번 던졌다.

머리가 360도로 빙그르르 돌아가며 솟아오르다가, 떨어져 다시 펜리르의 손에 잡혔다.

‘.승리 의식 같은 건가.’

네크로멘서는 전장의 다른 듀라한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하멜라인, 안드레이, 길라우트. 늙은이 둘 목 따느라 수고했어.”

“주군이 미리 마법을 봉쇄한 덕분이지. 우리가 한 거 있나.”

네크로멘서의 시선이 향하는 쪽에,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린 두 구의시체가 보였다.

그나마 로브에 쌓여 있어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쥬라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랏빛로브는 붉은 피가 더해져 검붉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시체는 남기고 죽었군.’

두 마법사도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그 환한 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 좌르륵!

기스-제-라이의 촉수가 뻗어졌다.

끌려 나온 황제가 묶인 채 허공에 번쩍 들렸다.

“황제를 죽여 보고. 별일 없으면 다시 이 아이를 죽이는 걸로 하기로 했으니까. 좋지?”

네크로멘서는 촉수에 꽁꽁 묶인 이사벨 시몬느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내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 달그락.

홀린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불만을 말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제, 뭐더라? 정체불명의 잿빛기사가 나타나서 우리를 다 죽인다고 했나? 크하하하하.

“하하하하.!”

다섯 듀라한이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기스-제-라이가 전장을 향해 손짓했다.

- 드르르륵!

굵고 거대한 삐 촉수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끝에 자줏빛 기운이 은은히 서리고 있었다. 나는 기소-

제-라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번에, 죽은 기사들을 일으켰소. 지금은.

“뭐가 나온다며? 당장 전력으로 쓰기에는, 이런 게 좋아. 전원, 0호 전투태세.”

“존명.”

그녀를 따라 웃던 듀라한들이 군단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수천의 해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별거 다 아는 예언자의 말이니 무시할 수 없지.”

기스-제-라이는 나를 보고 말을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다고?”

나는 묶여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뱉어 내지 못하는 황제를 가리키며말했다.

“황제를 죽이면. 근처에서 허공을 찢고 출현하오.”

수천의 군단은 일종의 진법을, 결계를 형성하는 것 같은 모양으로 움직였다.

나는 이들의 준비를 보고 내심 웃기는 걱정이 들었다.

‘안 나타나면 어떡하지?’

준비를 마치고 멍석을 깔아 놓으면 일이 벌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입버룻처럼 말하던 어떤 마족이 떠올랐다.

황제를 죽였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내 입장이 얼마나 난처할까 싶었다.

물론 그 기사가 다시 나타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기스-제-라이와 다섯 듀라한이,

수천의 군단이 순식간에 살해당하는걸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걸 막기 위해서 여기에 왔던 것이다.

“.그럼 해 볼까.”

주위의 공기는 진지했다.

네크로멘서의 지시 한 마디에.

수천의 군단병은, 실제로 어마어마한 적이 나타나는 걸 상정한 듯이긴 장하고 있었다.

“시작한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그녀가 손을 들었다.

‘죽었다!’

기스-제-라이는 촉수를 뻗어 황제의 숨통을 끊었다. 호화로운 황금빛수의壽衣에 피가 묻었다.

촉수에 목이 졸려 있는 은발적안의 황제는 단말^가도 뱉지 못하고 죽었다.

‘황제 폐하 만세도 못 외치는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당장 나타나는 건 아니오!”

나는 변명처럼 외쳤다.

“그래. 그래.”

기스-제-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에 피를 담았다. 투명한 관에 피가 차올랐다.

보랏빛으로 변했다.

“본인 확인 완료.

여기까지는 모두 같았다. 기스-제-라이에게 말해 둔 그대로였다.

긴장된 침묵이 십여 초 이어졌다.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허공이 벌어질.

- 우우우우우응!

시작이오!”

이사벨 시몬느도 발버둥을 멈췄다.

그녀가 기괴하게 비틀리고 있는 공간을 주시했다.

- 우우 우우우.!

“.젠장.”

공간에서 나오는 기운을 느낀 기스-제-라이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촉수를 만들어 공간을 구속하지도, 도망치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직감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다시 날 보거든.”

“말씀하시오!”

“찾지 못했다 해 포기하지 말라 고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알아들을 거다. 어쩌면. 멈출지도 모르지.”

‘린트. 뭐?’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증표다.’

그녀는 내게 일종의 증표를 건네준 것이다. 다음 생의 그녀를 만나면사용할 증표를.

구덩이 전체가 폭발적인 긴장감에휩싸였다.

기스-제-라이처럼 정확히 힘을 절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찢어지는 허공에서 끔찍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 저벅! 저벅!

다섯 듀라한이 부글부글 끓는 허공주위로 걸어가 칼을 겨눴다.

- 털썩.

네크로멘서는 살아 있는 이사벨 시몬느를 땅에 내려놨다.

나는 이사벨을 돌아봤다. 그녀도안색이 죽어 있었다. 숨통이 트여 콜록거리긴 했지만, 분위기에 압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저 주위를 더듬어, 검한 자루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스-제-라이는 손을 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수십 가닥의 거대한 뼈 촉수가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쇄도.’

- 파바바바밧!

부글부글 끓는 허공을, 수십 가닥의거대한 뼈 촉수가 공격해 들어갔다.

- 과득. 콰드득. 우두두둑!

하지만 수십 가닥의 뼈 촉수는 허공으로 쑥 들어가더니,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깨진 공간에 서피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목격이다.

잿빛 기사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부글부글 끓는 무언가가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풍압에 주위 수십 미터가 휩쓸렸다.

듀라한들의 몸을 감싸던 칠흑 연기가 모두 날려 사라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대검을 휘둘러 모두를 양분해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 쿵.

기스-제-라이가 이를 악문 채 발을 굴렀다. 상대가 잠시 그 자리에 멈칫했다.

‘멈췄. 어?’

듀라한들과, 수천의 해골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전해져 네크로멘서에게집중되는 것 같았다. 공기가 웅웅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결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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