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기분의 문제 (1 ①
군단 전체의 힘을 통합한 결계.
하지만 잘되고 있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기스-제-라이의 표정만 봐도 그러했다.
잿빛 기사는 멈추긴 했지만, 전혀곤란한 기색은 없었다.
진회색 갑주에 걸쳐 새겨진 기하학적인 회로가 번쩍였다.
- 피슛!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건틀랫에서,
거대한 빛의 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무심코 이사벨을 돌아봤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칼자루를 꽉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세계가 환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 슈우우우응!
커다란 구가 터지며, 수천수만의빛살이 주위를 덮쳤다.
죽었다.
부서졌다.
소란은 순간이고 고요는 길었다.
한 번에 내려앉은 죽음과 파괴로 사방은 온통 무거웠다.
하지만.
나와 이사벨을 포함해.
기스-제-라이의 뒤편에 있는 몇몇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잿빛 기사는 살아남은 자들이 거슬린다는 태도로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도망을.
말을 삼켰다. 주위를 둘러봤다. 누구도 도망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크. 크흐.!”
네크로멘서는 온몸이 벌집처럼 뚫린 채 힘겹게 헐떡거렸다. 그 뒤쪽은 모두 굳어 있었다.
이사벨도 그러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손만 파르르 떨었다.
- 콰드득!
잿빛 기사는 검면으로 네크로멘서를 으깨 버렸다. 뼈와 살점이 반반씩 으스러지는 소리가 기괴했다.
- 저벅.
걸어오는 죽음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칼을 휘둘렀다.
네크로멘서의 뒤에 서 있던 해골들이 한칼에 서넛씩 부서졌다. 휘두르는 대검에 뻣가루가 묻어났다.
어느새 나와 이사벨만 남았다. 이사벨의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거기에는 순수한 공포가 있었다.
- 달그락.
나는 칼을 주워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칼이었다. 칼끝으로 잿빛 기사를 겨눴다.
‘저 녀석.
직감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놈을 공격할 수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사벨은 나보다 강하다.
그런데 이유 모를 공포에 사로잡혀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기스-제-라이마저 잿빛 기사에게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압박감은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두 번째 만남이라 그런 걸까?
첫 번째에도 놈의 출현에 당황했을뿐이지,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는 느끼지 않았다.
‘내가 해야 돼.’
녀석은 나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투구 저편에 검붉은 빛이 끓듯이 이글거렸다.
[IT6a o a ar\u a i> r t) eia a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하지만 예전과 같은 언어인 듯했다. 대검이 허공에 들렸다. 일어선 나를 찢어 놓으려는 대검이,
- 부응!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양손검술 Lv.4를 습득했습니다!]
[양손검술 Lv.5를 습득했습니다!]
[참격 Lv.2을 습득했습니다!]
[일도양단 Lv.2을 습득했습니다!]
‘???이거다!’
반복되고 있었다. 두 번을 겪고 분명히 알았다.
나는 놈의 공격을 단순히 맞지 않는 게 아니다.
그 공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잿빛 기사의 투구에 붉은 회로가 반짝인다.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회로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같은 반응이었다.
‘다음은.,
- 좌르록!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날개처럼 수십 자루의 칼이 떠올랐다.
- 우우우응!
공간이 찢어지며 울었다.
허공에 뜬 수십 자루의 칼이 나를향해 폭사됐다.
‘똑같아!’
- 생!
칼들이 그대로 나를 통과했다.
허공에 텅 빈 공간이 생겨났다.
전부 같았다.
기사의 전신 회로가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공격은. 통할까?’
공격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어디 있었는지 모를 용기가 솟아올랐다. 적의에 불이 붙었다.
- 질주.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다.
- 부응!
하지만 칼은 허공에 미끄러졌다.
놈의 속도는 환영으로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잿빛 기사는 나를 상대하지 않고 지나쳤다.
뒤에서 섬뜩한 파육음이 들렸다.
공포에 떨던 이사벨 시몬느가 꼬치처럼 배가 꿰어 허공에 들렸다.
거대한 검신이 등 뒤로 비죽이 튀어나왔다. 부러진 뼈들이 엉망으로 내장을 찔렀다.
“끄, 끄, 끄허.!”
후작의 이름을 들을 때 얼굴이 상기되 던.
기사단장 이사벨 시몬느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잿빛 기사가 검을 털었다. 이사벨은 쓰레기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지만 전혀 닿지 않았다. 이미 저 멀리 떨어진 잿빛 기사가 뒤를 흘끗 돌아봤다.
지독한 존재감이었다.
사방에 뿌려진 피와 시체 부스러기들이, 티끌이 되어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는 활짝 벌린 허공으로, 질척한세계의 이면程面으로 발을 디뎠다.
공간이 찌그러져 닫혔다. 봉합선은 없었다. 학살자는 사라졌다.
- 달그락.
곁의 칼을 집어 들었다. 칼로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봤다. 죽음이 거대한 장막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번처럼 혼자만 살아남았다.
두 번째다.
정신을 차리는 건 처음보다 훨씬더 빨랐다. 나는 의지를 짜냈다. 일어서서 한 걸음을 디뎠다.
이사벨의 시체가 발에 걸렸다.
참혹하게 배가 뚫려 죽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인간의 편이 아니다.’
잿빛 기사는.
네크로멘서의 군단을 몰살시켰다.
황제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근위단장인 이사벨을 죽일 리가 없다.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이사벨이 죽었다. 저번과 같은 상황이다. 레안드로 후작도 곧알게 될 거다.
‘.이제 놈이 쫓아오는 건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부릅뜬 이사벨의 눈을 천천히 감겨 줬다.
잔해를 지나 기스-제-라이에게 다가갔다.
시체라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웠다.
살해당했다기보다는 파괴당했다는 말이 어울렸다.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찾지 못했다 해 포기하지 말라 고전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라고 해라.>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
의미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죽기 전, 자길 멈출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전해 준 말이었다.
흉악한 힘을 느끼고, 급히 내게 던져 준 유언이자 증표. 그 말을 건넨다면 정말 반응이 달라질까?
나는 기스-제-라이의 시체 앞에서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감상은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취할 행동은 무정할 정도로 단순하다.
나는 눈부시게 환한, 네크로멘서의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개골을 이식한 대상입니다.]
[특수 조건을 충족합니다.]
[에픽 등급 스킬: 정수 흡수 Lv.l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범위⑴로 확인되었습니다.]
[조정 프로세스 완료.]
[흡수를 허가합니다.]
[정수 흡수 Lv.2를 획득합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동화울: 81.53%]
레어 스킬도, 유니크 스킬도 아닌에픽 스킬을 또다시 흡수했다.
[뼈가 능력 흡수에 충분한 적응을 마친 상태입니다. 흡수 능력의 즉각적인 소화가 가능합니다.]
[소화 시간 24:00:00 -> 즉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정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한 구의 시체에서 흡수할 수 있는 정수의 용량이 50% 상승합니다.]
[죽은 지 7일 내의 상대로부터 정수 흡수가 가능해집니다.]
[흡수 가능한 스탯 상한이 75로 상승합니다.]
[흡수할 수 있는 스킬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흡수 레벨⑵에 의해, 레어 등급스킬로 흡수가 제한됩니다.]
나는 이 커다란 비극 위에 서서,
어쩔 수 없이 흡족함을 느꼈다.
흡수하는 정수의 용량이 올랐고,
흡수로 도달할 수 있는 스탯의 상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올랐다.
48시간 내 죽은 시체의 흡수에서,
7일 내의 시체 로부터로 스킬 사용의 가능 시간대가 크게 길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레어 스킬의 흡수.
레어 스킬을 가져갈 수 있다면.
정수 흡수의 효율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발돋움한다.
- 털썩.
네크로멘서 앞에 주저앉았다.
손을 조심스럽게 모아 주고, 눈을감기고, 잔해를 정리해 주었다.
“.다음에는.”
빼앗는 죄의식과 올라선 흡족함,미래에는 반드시 지켜 주리라는 책임감이 어지럽게 섞인 상태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빛은 잦아들었다.
뼈의 군주 같은 스킬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었다.
정수 흡수를 가져간 것으로 아예 끝인 모양이었다.
- 저벅.
근위 기사들과 이사벨의 시체를 향해 되돌아갔다.
구덩이는 예전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포함해서, 빛을 내는 시체는 일곱 구 정도였다.
‘입맛 까다로워졌군.’
기사들의 정수를 흡수하며 자잘한 스킬들을 얻었다.
검술 교육. 승마. 기마 창술.
‘교육은. 레나를 가르칠 때 쓸 만 하려나.’
물론 가르칠 기회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후작의 추적을 받는다면 곧죽어 버릴 확률이 높다.
체력과 민첩, 힘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나보다 높은 스탯을 가진 기사는 없었다.
이사벨을 흡수했다.
‘혹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
<깨달음>을 흡수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민첩과 힘이 주르륵 올랐다.
그리고,
[검기劍氣 Lv.l을 흡수합니다!]
칼끝에 미약한 검기를 발현시킬 수있습니다. 숙련도가 낮을 경우, 무기가 파괴되는 일이 잦습니다.
레벨이 올라갈 경우 발현 범위와 발현 자유도가 상승합니다.
검기劍氣 Lv.6 이후로는 별도의단계로 취급됩니다.
‘이제 된 건가.’
하지만 곧이어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깨달음 Lv.l이 필요합니다.]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으음.’
검의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 쉬울 리가 없다. 이사벨에게서는 더이상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 저벅.
이제 남은 건 마법사들.
저번에는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핏자국이 되었던 남자들은, 예전과 달리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기스-제-라이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멀리서도 그 광채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무 빛도 뿜지 않는 시체와 잔해들을 넘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잘린 목이 휑하다. 찾아서 붙여 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흡수한다.’
검붉게 변한 로브에 손을 뻗었다.
- 우우우우응!
강렬한 초록빛이, 온몸의 뼈를 울리며 스며들고 있었다.
첫 흡수.
집중한 채 기운을 빨아들였다.
만다라도, 시약도, 스크롤도 필요 없이 마법을 발동시키는 자들.
아쥬라의 마법사.
기스-제-라이의 거대한 함정에 빠져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한 자들은 아니다.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서 불꽃을일으키고, 땅을 얼리고, 번개를 일으킨다.
<탑>의<마법사>.
드넓은 이 제국에서 고작 이백여명에 불과한 존재.
나는 그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그힘을 내 것으로 빼앗으려 한다.
- 우우우우응!
네크로멘서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이상, 나는 이 장소의 모든 정수를 제대로 빨아들일 의무가 있다.
[마법장전 Lv.l을 흡수합니다!]
- 스크롤이나 만다라, 시약 없이트리거만으로 권능을 발동시키는 마법사의 비의秘儀.
- 술자가 보유한 아케인 하트에 마법을 재어 넣습니다. 장전된 마법은 회로를 타고 격발됩니다.
‘마법 장전?’
낯선 개념이다. 아케인 하트가 없다면 노력과 수련이 무의미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는 들어 본 적 없다.
‘탑의 마법사들만 공유하는 건가’
비밀 사회의 장막을 슬쩍 들춰 본 기분이었다.
내가 모르는 개념, 내가 모르는 세계는 깊고 넓었다.
그때 였다.
- 띠링!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현재 ‘마법 장전’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달그락.
고개를 숙였다.
텅 빈 갈비뼈 안쪽을 내려다봤다.
‘아케인 하트라.
아케인 하트는 고사하고 평범한 심장도 없다. 어디서 가져다 박아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으음.’
일단 흡수를 계속했다.
강렬한 초록빛이 연달아 흘러들어오며, 계속 메시지가 떠올랐다.
[격발Blzae Lv.l을 흡수합니다!]
[격발Blzae Lv.2를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질풍Blast Lv.l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격발Blzae 과 질풍 Blast 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울거리는 불꽃 - 격발의 플레어 Lv.l이 해제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뇌격雷擊 Lv.l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필요.]
[얼음 방벽 Lv.l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가.]
[결빙Frost Lv.l을 흡수합니다!]
[아케인 하트.]
‘이거 좀 소외감 느끼는데.,
역설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은 빛이 약해져 갈때 입수한 스킬들뿐이었다.
[더블 캐스팅 Lv.l을 흡수합니다!]
[명상 Lv.l을 흡수합니다!]
[명상 Lv.2를 흡수합니다!]
잡념을 정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자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됩니다.
명상 중 낮은 확률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명상 상태에서 자신만의 개념 공간을 창조하거나, 천리안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집중 Lv.ll- 흡수합니다!]
[집중 Lv.2를 흡수합니다!]
확산되는 의식을 한군데에 모읍니다. 스킬의 수련 효과를 상승시킵니다.
명상과 함께 활용할 경우 명상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라가면 자신의 감각을 조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괜찮겠군.’
아케인 하트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마법들이나, 더블캐스팅은 몰라도.
명상과 집중.
두 가지는 지금도 중분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이었다.
수련 효과를 상승시킨다.
무엇보다.
<명상 중 낮은 확률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띠링!
스킬 창을 열었다.
이사벨에게 흡수한 검기 스킬을 다시 확인했다.
[‘깨달음’ Lv.l이 필요합니다.]
[현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명상 스킬을 사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