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기분의 문제 (11)
[명상 Lv.幻와 [집중 Lv.2]를 흡수한 뒤 마법사들에게서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주위를 돌아봤다.
더 이상 빛은 없었다.
‘저번과 다르군.’
시간이 부족해서 빛을 빨아들일 수없는 게 아니었다.
빛을 흡수할 수 있는 숫자 자체가 무척 줄었다.
의아한 점은.
수많은 근위대의 시체.
그 가운데 전투력은 나만 못해도,
다른 면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인간도 많을 터.
하지만 다른 시체들에게서는 아예 빛이 비치지 않았다.
‘능력의. 총량 같은 건가?’
이런 식이라면, 다음에 왔을 때는기스-제-라이와 두 마법사 외에는 흡수할 상대도 없을 확률이 높다.
정수 흡수.
놀라운 권능이다.
하지만 그 한계가 조금씩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기스-제-라이가 제국 황제까지 암살해 가며, 영웅 묘역의 이용권을 얻어 내려고 한 마음이 이해됐다.
내 능력에 벌써 이 정도로 흡수대상이 까다로워진다면.
기스-제-라이는 ‘빛’을 보고 산 지무척 오래되었을 테니까.
근위대의 말들을 바라봤다.
질주 스킬을 흡수했던 명마들이다.
이제 아무런 빛도 비치지 않는다.
‘.시간이 남는데.’
마법사의 지팡이 두 자루를 챙기고, 근위대의 명검과 듀라한의 마검을 주워 모았다.
황제의 시체에 다가갔다. 손가락에서 인장을 빼냈다. 옥관을 벗겨 냈다.
이사벨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금괴와 금화들을 쓸어 모았다.
금괴의 싯누런 빛은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반짝이는 걸 믿으니까. 상당히 세련된 인간상이지.>
수녀가 자길 기다리던 선장에 대해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돈을 믿는 녀석들을 잔뜩 고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적이라든가. 용병이라든가.’
이어 갑옷과 방패까지 좋아 보이는 건 잔뜩 모았다.
물론 가져갈 생각은 아니다. 어떤 추적 마법이 걸려 있을지 모를 물품들이니까.
나는 저번처럼, 허공에 떠 있는‘공간’에 그것들을 차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 쑤욱!
무기와 보물들은 아무 저항 없이 공간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들어간 뒤 크기가 1/10 정도로 축소되는 것도 그대로다.
하지만.
저번과 비교해 공간이 두 배 정도로 넓어진 것 같았다.
‘웬만한 건 다 들어가겠는데.’
4미터를 넘는 랜스가 안으로 손쉽게 들어갔다. 눈에 띄는 무기와 방패들을 대부분 넣고도, 꽤 공간이 남았다.
시선을 내렸다. 기스-제-라이의 시신을 바라봤다.
이대로 놓아둔다면 좋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건 당연하다.
산산이 찢어져 곳곳에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나는 팔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네크로멘서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부스러진 뼈 촉수와 뼈 머리칼이팔 사이로 흘러내렸다.
몸 곳곳이 깨지고 뚫린 탓일까.
시체는 가벼워서 슬펐다.
네크로멘서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서 다시 시작하게 될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방향성 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치웠다.
품에 안은 시체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여기 들어가는 걸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발끝부터, 그녀의 시체를 천천히 정체불명의 아공간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레드 플레이크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들을 만나면 답을 줄지도 모른다.
기스-제-라이가, 자신의 시체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선호할지를.
지금은 시간도 여유도 없다. 잠시 이렇게 보관해 둔다.
남들의 눈에 이 공간이 보이는지,
사용할 수 있는지도 못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다시 와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수한 시체를 지나 걸어갔다.
시체와 시체 사이의 좁은 여백에발을 디뎠다. 이들은 충실하게 자신의 싸움을 했다. 내가 보일 수 있는 약간의 예우였다.
곧 구덩이 외곽까지 도착했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까마귀들이 될것이다.
나는 도망치고 숨을 계획이다.
‘어떻게 될까.’
유류품을 가지고 도망쳤을 때, 레안드로 후작은 나를 쫓아왔다.
아이템에 추적 각인이 있었던 거라고 짐작된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이 자리에서벗어난다면, 그는 이번에도 나를 추격할까? 흔적만으로?
맨손으로 구덩이를 벗어날까 했지만, 외곽에서 죽은 스켈레톤의 평범한 철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실례.’
마법 따위는 절대 걸려 있지 않을 것 같은 단순한 철검.
- 저벅.
구덩이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발걸음을 디뎠다.
레나에게 바로 가는 건 안 된다.
후작의 추적을 받을 경우 그녀에게 피해가 간다.
‘두 달.’
편지에 써 놓은 기한.
그동안 다시 동굴로 들어가 후작을 기다릴 생각이다. 놈은 2주 후 동굴로 들어왔다.
편지에 넉넉히 두 달로 써 놓기는했지만, 사실 한 달로도 좋다.
추격이 붙는지 안 붙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 팟!
일부러<메마른 지하 묘지>에 들렸다. 아이템 습득을 제외하고,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들을 최대한 저번과 같게 만들고 싶었다.
‘같은 루트로 간다.’
폭포를 지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별거 없군.
확인을 마친 뒤 다시 미로 동굴로 향했다.
삼 년 동안 산 동굴.
후작 정도가 아니라면 들어올 엄두도 못 낼 천연 미로. 저번과 같은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갑옷을 풀어 놓았다.
- 철컥. 똑.
갑옷 벗는 소리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섞였다.
허리에 매달고 있던 기스-제-라이의 단검이 눈에 띄었다.
‘이것도 놓고 왔어야 했나?’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녀가 일부러 내게 증표로 준 물건이다.
가지고 있고 싶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놓고 왔지만, 어차피 추적되던 건 이사벨의 갑옷일 가능성이 높다.
혈혈단신으로 나를 쫓았던 후작은‘인형’ 황제가 아닌 이사벨의 죽음에 집착했으니까.
하얀 글자들이 꿈틀거리는 칠흑의 단검 표면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뭐. 자살 용도로 쓰기도 좋고.’
2주.
멍하니 후작만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다. 새로 얻은 스킬을 써 보기로 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명상 Lv.2를 시전합니다!]
잡념을 정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깊은 명상에 잠긴 자는.
메시지가 스르르 사라졌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틈이 생겼다.
불안과 두려움이 그 틈으로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새로운 건. 없는데.’
명상 스킬이, 그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건 아니었다.
명상 스킬은 오히려 부드러운 천에 가까웠다. 마음에 묻은 먼지와 때를 조금씩 지워 주는 느낌이었다.
세계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집중 Lv.2를 시전 합니다!]
명상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달그락.
명상을 유지한 채 철검을 집어 들었다.
칼끝을 지그시 응시했다.
자루를 잡은 손의 감각을.
몸의 자세를 아주 느릿하게 음미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가장 또렷하게 인식되는 순간, 칼을 내리쳤다.
칼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빨랐던 건지, 느렸던 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무언가 아련하게 잡힐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잡히지 않았다. 수련을 그만두고 다시 앉아서 가만히 명상에 잠겼다.
간지러운 무언가를 또렷이 잡아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시 칼을 들었다. 다른 스킬을 더해 보기로 했다.
‘탐지.’
[탐지 Lv.5를 활성화합니다!]
[스킬 효율 1,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 똑. 똑. 또옥 ■
멀리서 떨어지는 종유석의 물방울소리.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에가라앉은 공기가 흔들리는 소리.
그게 전부였다.
나는 다시 명상에 잠겼다.
간지러운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굳이 잡념을 지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놓아두었다.
시간이 흘렀다.
생생한 이미지와 함께, 어떤 순간에 깊숙이 잠긴 느낌이 들곤 했다.
<착석하시오! 소란을 피우는 방청객들은 모두 퇴장시키겠소!>
후작의 기억.
바다 위.
그의 근처로 기어 오던 인어들이,
새파랗게 빛나는 칼에 온몸이 터져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360° 의 환경環景으로 천천히 펼쳐졌다.
칼날이 닿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피들을 반으로 가르던 모습.
- 달그락.
일어나 철검을 들었다.
머릿속에 있는 그 모습을 재현해보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났다.
- 뻐걱.
[체력이 고갈되었습니다!]
[더 움직일 경우, 영구적으로 전체체력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0.17%]
- 달그락!
뼈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잡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특별한 깨달음은 없었다.
이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걸까?
‘.일단 체력을 좀 회복해야겠군.’
저번 생처럼 흘러간다면, 후작과 마주치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 끝으로 칼자루를 더듬었다.
철검이 만져진다.
칠흑 단검의 위치도 확인했다.
후작의 발소리가 들리면, 스스로 두개골에 칠흑 단검을 꽂아 넣을 생각이다.
두 번 잡혀 줄 생각은 없다.
[체력을 회복합니다.]
[99.1%.]
날짜가 지나갔다.
동굴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놈을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올 때가 됐는데.’
마음 놓고 수련할 수도 없었다. 언제 나타나 뒤통수를 치고 팔다리를 묶어 끌고 갈지 모르는 놈이다.
‘탐지.’
스킬을 활성화했다.
놈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에 걸리지도 않겠지만, 초조한 마음을 달래 기위한 용도였다.
온다.
오지 않는다.
온다.
오지 않는다.
2주의 마지막 날.
벽에 등을 붙인 채 기스-제-라이의 단검을 꼭 쥐었다.
새까만 날 위에 꿈틀대는 글자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자리에 찾아올 후작이 어떤 괴물인지는 뱃속 깊이 안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갔다.
아직 들리지 않는 놈의 발소리에 거듭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사각사각 흐른다. 뭉쳤다가 핏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 똑. 똑. 똑-
14일째.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작은 오지 않았다.
하루가 더 지났다.
- 달그락.
긴장이 풀리며 몸이 내려앉았다.
‘안 오는 건가?’
싱숭생숭한 상태로 며칠을 더 기다렸다. 탐지를 켠 상태로 동굴을 오갔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저벅. 저벅. 저벅.
일부러 소리를 내어 걸었다. 동굴가운데로 돌아왔다.
몸을 천천히 동굴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고요했다.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워 동굴 천장을 바라봤다.
나는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종유석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살아. 남은 건가?”
정신이 멍하니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뭔지 모를 감각으로 마음곳곳이 간질간질 욱신거렸다.
하루가 더 지났다.
“.살아남았군.”
저번 생에서 놈에게 추격당한 건,
이사벨의 유류품을 가져갔기 때문인것 같았다.
아직 레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사십여 일이 더 남았다.
넉넉하게 두 달을 잡은 덕분이다.
"명상을. 다시 해 보자.’
탐지 스킬을 켠 채 다시 집중명상에 빠졌다.
좀 더 마음 편하게 후작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칼을 휘둘렀다.
‘이렇게. 아니, 이렇게.
- 쌔앵!
열흘이 지났다.
[주의!]
[무리하게 더 움직일 경우, 영구적으로 체력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온몸이 랙백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무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바로 앞에 있었다.
거의 다 왔다는 게 느껴졌다.
‘탐지.’
[탐지 Lv.5를 활성화합니다!]
[스킬 효율 1,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초당 0.0024%의체력이 소모됩니다.]
외부를 살피지 않았다. 내면에 집중했다. 내 움직임을, 손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감지했다.
온몸의 뼈가 삐그덕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칼을 휘둘렀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죽였던 인간들이 하나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을 파고들어 갔던 칼의 감각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검기는 얻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쪽에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검기란.
끌어올리는 게 아니었다. 솟아나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있는 걸 알아차리면 될 뿐이었다.
칼이 허공을 가른다.
한 번만 더.
- 달그락!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1 감소합니다!]
몰아沒我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더길게 이어 가고 싶었다.
- 우우우웅 !
칼이 우는 것 같았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2 감소합니다!]
이쯤 되니 칼이 아니라 팔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기스-제-라이.
반으로 쪼개지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수한 빛에 온몸에 구멍이 뚫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영구적으로 3 감소합니다!]
무너지려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칼을 휘둘렀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체력이 영구적으로 4 감소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체력 영구 감소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선 채로 몸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나는 굳은 채 칼을 휘둘렀다. 칼이 나를 휘두르는 건지, 내가 칼을 휘두르는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이 순간을 낚아채야 했다.
- 우우우응!
낡은 철검이 세차게 울었다.
- 슈아앙!
푸른 빛줄기가 시리게 허공을 베어나갔다.
- 파각!
앞으로 뻗어 나간 빛줄기가 바위벽에 아주 얇은 상흔을 남겼다.
상흔은 철검의 날보다 얇았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굵기.
“.!”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깊게 파인 벽의 흔적을 바라봤다.
벽과 나 사이에는 다섯 걸음이 넘는 거리가 있었다.
- 우우우응.!
철검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뻗어 나온 푸른빛이 허공을 격해벽에 상흔을 새겨 넣은 것이다.
“.아아.”
한참 동안 멍하니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내가, 방금 뭘 해낸 건지 천천히 되짚어 보려 하는 순간.
- 달그락!
- 털썩!
몸이 저 스스로 무너지며, 가벼운타격감과 함께 동굴 천장이 보였다.
억지로 서 있을 체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