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패치워크 (4)
한 시간 전까지 비가 쏟아졌을 터.
그러나 그라스미어의 뒷골목은 무척 깔끔했다.
‘챈들러 백작인가? 영주가 일을 제대로 하는군.’
유블람이나 에라스트와는 비교되는 풍경이다.
여행자를 노리는 불량배도 없다.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달 군쇠를 두드리는 굵은 팔의 대장장이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 깡! 깡! 깡!
어느 골목에도, 대장간이 하나는 자리 잡고 있다.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남자 셋이 작업에 한창이다.
열 두엇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막대로 화덕을 쑤신다.
삼십 대 남자는 커다란 메로 달 군쇠를 내리친다.
- 깡!
집게로 달군 쇠를 고정시키고 있는건 흰머리의 노인.
노인은 쇠메로 내리치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 작은 손 망치로 쇠끝을 세심하게 다듬는다.
세 남자의 얼굴 윤곽은 비슷하다.
삼대三代.
50년 전에도 대장간은 비슷한 풍경이었으리라.
쇠끝을 다듬는 흰머리 노인이,
화덕 옆에 선 소년의 모습이었겠지.
하지만.
50년 뒤엔 전혀 다른 풍경일 거다.
모두 사라져 있을 터.
전쟁의 불길.
거기서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마왕이 강림할 때, 버티는 인간의 도시는 무척 적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 목록에 그라스미어는 없다.
- 달그락!
고개를 흔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 깡! 깡! 깡!
재가 되어 스러질 풍경들이.
절규에 묻힐 소리들이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여기쯤인가.,
지도를 다시 확인하고, 주변 풍경과 대조했다.
<옛 숲 엘프 여관>
동그랗게 표시된 곳.
감독관이란 녀석이 알려 준 장소가 맞다.
여관으로 천천히 다가설 때.
“히야압!”
여자의 기합.
‘잠깐.’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다.
‘어디서지?’
기억을 되감아 보려 할 때였다,- 까앙!
하지만 기합은 곧 커다란 칼 소리에 묻혀 버렸다.
흠칫 그 자리에 섰다.
스무 걸음 앞.
장소는 정확하다.
<먼 숲 엘프>라는 간판이 정문에 커다랗게 걸린 여관.
‘맞는데.’
경비 감독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재빠른 소녀에게 편지로 전달받은 장소가 분명하다.
“이 압!”
- 쌩!
기합이 다시 울려 퍼졌다. 칼이 바람을 가른다. 레나는 아니다.
그녀보다 훨씬 굵은 목소리.
‘탐지.’
두 명의 인간이 잡힌다.
싸움은 여관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
문은 닫혀 있다.
탐지로 그 정체까지 파악하기는 무리였다.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은신.’
끼어든다면 기습이 낫다. 담벼락에 가까이 다가갔다.
- 쩡!
다시 쇳소리가 울렸다.
가까이 다가가 돌담을 훌쩍 타고 올랐다. 2미터 정도의 높이였지만 도약 한 번에 해결됐다. 담장 위에선 채 안을 내려다봤다.
안에서 싸우고 있는 두 남녀를 확인하고 나는 무척 당황했다.
‘저 인간들이 대체 왜 여기 있지?’
게다가 전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갑니다!”
공격을 하는 건 여자였다.
여자는 날이 없는 연습용 칼을 쥐고, 긴장된 표정으로 다섯 걸음 떨어진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머리 둘은 더 컸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 덕분에 부피는 2배에 가까웠다.
- 팟!
여자가 세차게 발을 디뎠다.
맞은편의 호리호리한 남자는 한 손에 쥔 검을 슬쩍 늘어뜨렸다.
그는 완연히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쌩!
여자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날은없어도 쇠로 만들어졌다.
맞으면 인간의 뼈 정도는 수수깡처럼 부러진다.
- 째쟁!
하지만 남자는 칼등으로 살짝 여자의 공격을 받아 내더니, 가볍게 뒤로 돌아가며 여자의 정강이를 검으로 살짝 쳤다.
“실패! 그래도 좋아졌네!”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고 남자에게 칼을 겨눴다. 하지만 다음 격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쿵!
나는 기척을 드러내며 강하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이쿠!”
“헛!”
두 인간이 화들짝 놀라며 내 쪽을 바라봤다.
‘사실 놀란 건 내 쪽인데.’
기다리고 있는 건 레나여야 한다.
하지만 여관 밖에 나와 있는 건 전혀 엉뚱한 자들이었다.
둘 모두 익숙한 얼굴.
하지만 여기에서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이쿠^?? 어이쿠.”
잠깐 놀라긴 했지만, 호리호리한남자는 나를 보고 곧 활짝 웃었다.
“정말 와 주셨구려.! 성문에서안내 잘 받으셨소?”
“날 기다린 게 당신인가? 옷 색이 바뀌었군.”
호리호리한 하얀 도복의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이런 스타일로 한 스무 벌 정도 있소. 색만 다 다르지.”
두 달 전.
달밤에 요란하게, 한바탕 칼싸움을 벌인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다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감독관에게 일러뒀는데,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로군.”
“챈들러 형빈, 당신이 날 기다린 건가?”
“하핫. 그렇소.”
‘이상하군. 레나라고 말할 때 분명히 소녀가 반응했는데.
칼자루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칼을 빼 들지 않았다.
함정은 아니다.
챈들러의 어투에서 적대적인 감정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일단 차분히 대화를 진행하며 레나의 행방을 캐어 볼 생각이었다.
향후 레나를 찾는다고 해도, 녀석의 도움을 얻는 편이 빠르다.
그라스미어의 차기 영주.
말하자면 인간의 우두머리다.
‘나에게 협조적으로 보이는데.’
싸워서 좋을 건 전혀 없었다.
나도 녀석에게 짐짓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챈들러, 그날 헤어지고. 다시 무사 수행을 떠난 게 아니었나?”
“하핫.
첸들러가 가볍게 웃었다.
“그때 귀하에게 밤새 가르침을 받으며 생각했지. 지나가는 기사의 칼이 이렇게 매운데, 동방까지 배우러간 게 다 헛일인가 싶었소.”
“당신 검도 꽤 훌륭했어.”
“말씀 고맙소. 그날 이후, 여기저기돌아다니며 결투를 했지만 마음에안 차더군. 그래서 실은. 다시 귀하를 찾아다녔소.”
챈들러의 실력이라면 황실 근위대에 들어가도 밀리지 않는다.
제대로 무장한 병사 스물 정도는 한자리에서 가볍게 꺾는다.
그 정도의 실력자가 근방에 많을 리는 없다. 불만족스러운 비무행을계속했을 것이다.
“.날 찾았나.”
“하지만 어딜 가셨는지 도저히 감도 안 잡히더군.”
“그래서 어떻게 했지?”
빨리 레나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직접 캐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던 중 에라스트에서 토너먼트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소.”
“.참석했나?”
“그렇소. 혹시 귀하를. 만날까 해서 말이오. 하지만 거기 계시진 않더군.”
나는 챈들러 옆에 선 여자를 흘끗 바라봤다.
대련을 벌이던 여자.
익숙한 얼굴이다. 에라스트 토너먼트에 참가했을 때.
나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검술을 보여 주던 여자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대접은 받지 못했다.
<하하하.! 크레스틴이라고? 정체를 밝혀라. 편력 기사라고 되어있는데.>
<맞습니다. 본 경기에는 자원해서 참가했습니다.>
<그런가. 하하핫. 혹시 오우거의피가 섞인 건 아니겠지?>
크리스티나 더 브루이져.
그녀가 여기 있는 사연이 한순간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 기사는 토너먼트에서 만난건가?”
크리스티나가 눈을 끔핵거렸다. 첸들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소?”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훌륭한 기사로 보이는군.”
“맞소! 정말 감도 좋으시지.”
챈들러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딱 말씀대로요! 토너먼트에 참가한 인재인데, 쓰레기통 속에 던져두기 아까워 데리고 왔소이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남자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제법 흡족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안목이 인정받은 것에 호감을 느낀 것이다.
나는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미래가 변했군.’
원래대로라면 이 여자가 챈들러와 만날 일은 없었다. 저번 생과 달라진 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기스-제-라이에게 며칠 늦게 간 덕분에 챈들러는 살아남았다.
녀석은 저번 생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메마른 지하 묘지 주위를 자연스레 지나쳤다. 그리고 나와 유블람 가도에서 마주쳤다.
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에라스트토너먼트에 참가. 토너먼트에서 크리스티나를 만나 데려온 거다.
내 시선이 향한 탓일까.
크리스티나가 살짝 기사의 예를 갖추며 말했다.
“챈들러 남작님의 제자, 크리스티나 브루이져입니다.”
“에이, 에이.”
챈들러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아니라 호위! 내 유일한호위지! 공식적으로 임명했잖아?”
“.남작님을 지킨다고 말씀드리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라.
“제대로만 배우면 지금 나 정도는일 년 안에 뛰어넘을 거야. 자신감을 가지라고.”
챈들러가 장난스레 웃으며 크리스티나를 격려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도,
내가 챈들러에게 위해를 가하면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열심이군.’
레나가 하던 말을 회상했다.
<낭만을 가진 여자들이 있나 봐요.
충성, 명예, 뭐 이런 거에.>
<이런 결투 대회에 나오곤 하죠.
그렇게라도 기회를 잡으려고.>
‘.기회를 잡은 건가.’
족쇄 같던 투구를 벗고 있는 모습은 시원해 보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레나가 계속 떠올랐다. 빙빙 도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물어봐야 하나.’
레나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챈들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나만 당신을 기다린 건 아니오.<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지. 나와 레나가 말이오.”
“뭐? 레나는 어디지?”
“정확한 위치는 모르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여자는 아니니까.”
“.아는 사이인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내 질문에 챔들러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토너먼트가 끝나고 여기 돌아와서의 일이오. 보고를 받았소. 내서명이 있는 무기 제작권을 웬 여자가 행사했다더군.”
‘무기 제작권이라면.
작은 글씨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던 금속 패.
“내게 준 거 말인가?”
“그렇소. 처음엔 당황했소. 누군가 싶어 찾았지. 한참 지나도 못 찾겠더군. 내 도시인데 말이야.”
챈들러가 멋쩍은 둣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날 찾아왔소.
귀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이 도시로 들어온다고 말이야!”
“그 말을 믿고 날 기다린 건가?”
“그렇소! 정말 신뢰할 만한 여자였어. 수완이 아주 훌륭하더군.”
“레나, 그래. 당신의 레나도 여기곧 도착할 거요. 늦지 않게 온다 고했으니까.”
- 저벅.
챈들러가 내 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왔다.
“그동안 대련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소? 나도 두 달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라오.”
- 스르록.
그가 연습용 칼을 아래로 천천히 늘어뜨렸다.
‘더 강해졌군.’
완전히 날이 지워진 칼. 그럼에도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때 였다.
- 스스스슷!
허공에 매달린 투명한 줄을 타고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제가 먼접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자가 지붕에서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났다.
“스승님!”
“.레나?”
그녀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툭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몸에 걸친 새까만 옷은 특수한 재질로 보였다.
그 위에 얇은 강철 보호대가 곳곳에 둘러진 특이한 형태였다.
- 스르릉!
다리에 수납되어 있던 가느다란 사이드 소드가 뽑혀 나왔다.
‘살짝. 짧다?’
롱소드보다 날이 한 탬 짧았다.
무엇보다 칼이 얇았다.
칼끝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검신에는 피를 흘리기 위한 홈이 기능적인 형태로 파여 있었다.
손잡이와 가드의 디테일은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컨트롤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가드부분은 몇 개의 강철 매듭이 회오리치듯 잡혀 있었다.
약간의 조작만으로 검을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휙!
레나는 칼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른 뒤 제대로 잡았다.
‘레이피어도, 장검도 아니다.’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결합한 무기였다. 절단과 관통에 모두 기능적으로 보였다.
‘찌르고 베고. 찌른 뒤 베고.’
그녀와 완벽한 밸런스를 보이는 것같은 검.
곁에서 직접 골라 줘도 저 이상의 칼을 선택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좋은 칼을. 찾았군.”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빼낸 검으로 천천히 나를 겨누며 말했다.
“가르쳐 주세요, 두 달 치.”